참 이상도 한 일이다. 14일이면 지난주 토요일, 그날 나는 강릉에 있었다. 제주 올레길에 못지않은 강원도 바우길을 개척하기 위해 일주일의 절반을 고향에서 보낸다. 부산에서 일본인 관광객 참사의 화재가 일어난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26분이다. 그 시간 나는 강릉을 떠받치는 산 넷 중 하나인 모산봉에 올라 있었다. 거기에서 하필이면 어릴 때 들은 일본 사람 얘기를 했다. 동해안 쪽에 바다가 보이고 꼭대기가 조금만 평평한 산마다 전설 아닌 전설을 안고 있었다. 거기에 오르면 일본 땅이 보인다고 해서 일본 사람이 산꼭대기를 죄다 깎았다고 어린 시절에 정말로 믿었던 것이다.
타국서 허망하게 떠난 日관광객
그런저런 이야기 속에 오후 늦게 트레킹을 마치고 단체로 어느 식당에 들어가자 벽면에 달아놓은 텔레비전에서 부산화재 참사의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았을 때 화면에 비친 것은 한자로 쓴 사격장(射擊場) 간판이었다. 불이 나서 일본인 관광객 7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사고의 정황을 듣는 동안 내 머릿속엔 사고와 전혀 상관없는 소설 한 편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어느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서진연 작가의 ‘붉은 나무젓가락’이라는 작품이었다.
소설을 풀어가는 화자는 재일교포 2세이고, 주인공은 사랑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어린 여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황폐해진 여자는 거의 죽음 직전에야 한국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말려도 다시 상처 속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한국에 먼저 죽은 애인의 영혼이 있고, 자신이 일본 땅에서 죽으면 두 사람은 나중에 영혼으로도 끝내 만날 수 없어서다. 왜냐면 나비는 바다를 건널 수 있어도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주인공이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작품을 읽고 ‘영혼은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는 말에 사로잡혀 언제 한번 이 작가에게 그 말이 실제 있는 말인지 아닌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곤 여태 묻지 못했다. 이번 부산 사고 소식을 듣고도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면 이분들의 영혼이야말로 억울하고 분통해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든 것도 바로 그 작품의 여운 때문이었다.
이 참사 앞에, 이 땅에 처음 나들이를 왔다가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영혼 앞에 한국의 작가인 내가 안전이며 시설규정이며 소방대책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말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 없을까. 부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영혼이라도 불속에서처럼 뜨겁지 않고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고 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서진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세상 겪지말고 영생하시길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주인공을 더 아픈 상황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던 소설적 설정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 그것은 소설을 위해, 또 소설로만 가능한 일이지 이 땅에 첫 나들이를 와 이렇게 억울하고도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분의 영혼이 바다에 막혀 돌아갈 수 없다면 억울해서 안 되는 일이었다. 얘기를 듣고 내가 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 어디에서든 돌아가야 할 영혼은 돌아가야 한다. 그것까지 안타까워서는 안 된다.
이 땅에 와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은 우리의 이웃 분들, 부디 두 나라 사이의 넓지도 않은 바다를 잘 건너 혼으로라도 가족 품에 무사히 돌아가시라. 부디 잘 돌아가셔서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그동안 다 받지 못한 위안 크게 받으시고, 뜨겁지도 서럽지도 않은 곳에서 가족과 이웃, 그리고 임을 안타까이 보낸 우리의 기억 속에 영면하시라. 부디 그곳에서는 이런 세상 겪지 마시고 편히 영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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