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넥타이’들 목이 졸린다

  • 입력 2008년 4월 8일 02시 53분


서브프라임 여파 고액 연봉자들 잇따라 ‘쪽박’

재취업도 당분간 어려워… 정신과 상담 호황

“美은행들 내년까지 20만명 해고할 것” 전망도

켄트 코프, 미스티 코프 씨 부부의 삶은 최근 완전히 바뀌었다. 두 사람은 미국의 대형 모기지업체와 금융서비스업체에서 각자 일하며 억대 연봉을 받던 금융 전문가들. 하지만 지난해 시작된 금융위기로 잇달아 직장을 잃으면서 삶의 질이 급전직하했다.

코프 씨 부부는 이제 매달 450달러의 실업수당을 받는다. 자주 즐기던 외식 대신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정원사도 내보냈다. 이 부부는 최근 CNN머니와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두렵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프 씨 부부만이 아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금융가에 감원 바람이 몰아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화이트칼라가 급증하고 있다. 대부분 월가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던 엘리트였기 때문에 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더욱 크다.

▽감원 쓰나미=금융리서치업체인 셀렌트LLC는 이달 초 보고서에서 “미국 은행들이 12∼18개월 안에 20만 명을 해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전체 상업은행 종사자의 10%에 해당하는 수치로, 미국 금융권으로선 전례가 없는 대규모라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은행들은 이미 지난 한 해 15만3000명의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투자업무(IB)와 자산관리, 자산유동화 분야의 인원을 집중적으로 줄인다는 방침 아래 감원 작업에 들어갔다. 올해 들어서도 1월에 1만6000명, 2월에 6000명 등 추가 인원 감축 계획이 줄줄이 발표됐다.

미국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과 2월에만 금융권 전체에서 무려 22만 명이 실직했다. 씨티그룹이 3월에 추가로 2000명을 퇴직시키겠다고 발표하는 등 퇴직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헐값에 매각된 베어스턴스는 향후 감원 계획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지만 조만간 대량 해고가 본격화될 확률이 높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지난 한 달간 미국 내 일자리 8만 개가 사라진 상황에서 문제의 시발점인 금융권은 가장 타격이 크다.

셀렌트컨설팅의 옥타비오 마렌치 대표는 “금융위기가 신용카드나 자산담보대출처럼 모기지 사업에 얽혀 있는 다른 분야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실직 사태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붕괴된 삶, 무너진 자존심=뉴욕타임스는 지난달 헐값에 매각된 베어스턴스의 본사 앞에서 한 무리의 넥타이 부대가 모여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최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내 인생이 하수구에 빠졌다” “안정적이던 삶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세컨드카(두 번째차)는커녕 집값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남성은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가 걱정이 태산”이라고 비즈니스 위크에 분위기를 전했다.

베어스턴스 다음으로 무너질 위기에 놓인 리먼브러더스에 대해서 “제발 살아남아 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은행까지 무너지면 실직자가 더 많이 생겨나 구직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것보다 자신감이 사라진 것이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 베어스턴스만 해도 에이스 그린버그 전 회장이 “우리 회사 직원들은 가난하지만 경제적 성공에 대한 열망이 높은 엘리트”라고 자랑해온 회사다.

충격을 견디지 못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례도 늘었다. 월가의 중역들을 상대로 정신과 상담을 해온 앨던 카스 씨는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상담 의뢰가 들어온다”고 CNN머니에 말했다.

자신의 전공을 살릴 금융분야 취업은 앞으로 한동안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구직경쟁은 치열해진 반면 채용의 문을 여는 회사는 전무하다. 미스티 코프 씨는 지난해 5월부터 계속해온 구직활동을 끝내 포기하고 보석과 장신구를 파는 온라인 쇼핑사이트 개설을 준비 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영대학원(MBA)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미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 15만8000여 명이 대학원 문을 나설 예정. 여기에 아직도 직장을 구하고 있는 지난해 졸업생들까지 합하면 바늘구멍은 더 좁아진다.

버지니아대 MBA인 다든스쿨에 다니는 예트 맥휴(26) 씨는 “(원서를 낸) 몇 개 은행에서 다른 곳을 알아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 마셜스쿨의 피터 줄리아니 국장은 “고용 의사를 밝히는 기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경기가 회복됐을 때에 대비해 좋은 인재를 뽑아두려는 기업들의 장기투자가 갑자기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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