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벼랑끝에 몰려 어느 기업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를 「불확실성의 시대」라서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깊은 상처가 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회사원 김모씨(40)의 경험담. 학교 선배인 모 그룹 임원에게 업무상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통상적인 인사말이었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씨가 무언가 실수를 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그동안 잘리기라도 했다는 거냐』는 퉁명스런 대답이 전화선을 타고 흘러 나왔다. 김씨는 그후 업무상 전화를 걸땐 가급적 인사말 없이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인원감축이다,부도설이다 해서 흔들리는 기업에는 흔히 인사말로 쓰이는 「별 일 없으시죠」 「요즘 어떠세요」라는 말이 오해를 살지 몰라 가급적 자제한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상사가 던지는 말에 아주 민감해졌다. S그룹의 L과장은 며칠 전 퇴근 무렵 부장으로부터 『별 일 없으면 일찍 퇴근하지』라는 말을 들은 뒤 영 께름칙한 기분이다. 「동료 과장들은 남아서 일을 하는데 유독 나만 퇴근하라니…」.
요즘 이 회사에서는 대규모 조직 축소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자네는 좀더 남아있지』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L과장은 말했다. 가족들도 따라서 위축되는 모습이다. 40대라고 밝힌 중년부인이 최근 동아일보에 전화를 해왔다.
―혹시 L그룹이 최근에 임원인사를 했나요.
『아직 안 했는데 왜 그러시죠』
남편이 L그룹의 임원이라는 이 부인은 차마 집에서 「임원인사가 있었느냐」고 남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기업 임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요즘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남편의 눈치만 살피는 그 부인의 심정이 쉽게 전해져 왔다.
대기업의 한 간부는 『직장에 조크가 사라지고 있다』며 『IMF시대의 또다른 후유증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