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죽음의 수술실 오명 벗겨준 ‘소독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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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의 탄생/린지 피츠해리스 지음·이한음 옮김/344쪽·1만8000원·열린책들

미국의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1875년·왼쪽)과 ‘애그뉴 클리닉’(1889년)은 짧은 기간에 조지프 리스터의 소독법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 준다. 그로스 클리닉에선 어둡고 음침한 수술실 한가운데서 평상복을 입은 의사들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직접 상처를 만진다. 반면 애그뉴 클리닉엔 깨끗하고 밝은 수술실에서 하얀 수술복을 차려 입은 의사들의 수술 장면이 담겨 있다. 열린책들 제공
미국의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1875년·왼쪽)과 ‘애그뉴 클리닉’(1889년)은 짧은 기간에 조지프 리스터의 소독법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 준다. 그로스 클리닉에선 어둡고 음침한 수술실 한가운데서 평상복을 입은 의사들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직접 상처를 만진다. 반면 애그뉴 클리닉엔 깨끗하고 밝은 수술실에서 하얀 수술복을 차려 입은 의사들의 수술 장면이 담겨 있다. 열린책들 제공
국민 드라마 ‘허준’(1999∼2000년)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허준(전광렬)이 자신의 몸을 해부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자결한 스승 유의태(이순재)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적 설정이지만 당시 시청자에게 꽤나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약 정말 허준이 스승을 해부했다면 멀쩡했을까. 다시 찾아보니 드라마 속에는 허준이 유의태의 몸을 가를 때 사용한 작은 칼을 ‘소독’하는 과정이 없다. 만약 드라마대로라면 허준이 유의태의 몸에서 옮겨온 균에 감염돼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물론 허준이 살던 1539∼1615년은 조지프 리스터가 살던 1827∼1912년보다 200여 년 전이니 칼을 소독하는 장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조지프 리스터는 소독의 아버지다. 이름이 생소하다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강 세정제 ‘리스테린’을 떠올려보자. 이 브랜드는 1879년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한 리스터의 미국 강연을 들은 조지프 로런스가 만든 소독액이다. 제약업체 ‘존슨앤드존스’ 역시 리스터의 강연에 참석한 로버트 존슨이 살균한 붕대와 실을 공급하면서 유명해진 업체다. 이처럼 리스터의 성과는 우리 삶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리스터는 ‘외과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제임스 사임 밑에서 수련의(醫) 생활을 거쳤다. 본격적으로 의사가 돼서는 병원을 초토화하곤 했던 질병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가 고민했던 건 특히 감염이었다. 당시 영국은 해부를 통해 외과의술을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의대생들이 질병에 감염되는 경우가 잦았다. 감염 경로에 대한 지식조차 없어 장갑이나 보호용구 없이 해부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을 끝낸 의대생들 옷에 살, 내장, 뇌 조각이 달라붙은 경우도 흔했다.

왜 외과 수술 중 감염이 발생하는지 고민하던 그는 자신만의 살균제를 만들었다. 이 살균제 덕에 해부나 수술 이후 감염으로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크게 줄어들었다. 리스터가 살균제를 상용화한 뒤에 살아남기 시작한 건 환자와 의사 모두였던 것이다.

의학사를 다룬 저술활동을 해온 저자는 ‘의학적 관음증’에 빠진 당시 사람들 묘사를 통해 독자를 끌어당기기도 한다. 1846년 12월 21일 런던의 한 병원 수술실에서 환자의 허벅지 절단수술이 벌어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군중 수백 명이 모이는 장면을 생생히 그리며 독자를 몰입시킨다. “수술실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밀치고 드잡이를 하는 것이 투견장이나 극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하는 짓과 별다를 바 없다”는 묘사에는 당시 사람들이 지닌 외과의학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 환상이 모두 담겨 있다.

과거 영국 이야기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지금도 리스터의 제안은 유효하다. 감염을 막기 위해 손세정제를 쓰고, 비누로 손을 꼼꼼히 씻으며 코로나19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데엔 그의 덕도 빼놓을 수 없다. 리스터가 소독법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인류는 더 힘들게 병마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기 전 주의사항이 있다. 수술실에 대한 생생한 묘사 때문에 잠들기 전에 읽다간 악몽을 꿀 수도 있다. “생생하고, 끔찍하다” “좀 잔인하다”는 해외 언론의 평가처럼 읽다 보면 오슬오슬 한기가 몰려오기도 한다. ‘경고: 잔인함!’이라는 책 표지 주의사항이 대수롭지 않은 독자들이여, 책장을 넘겨보자.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수술의 탄생#린지 피츠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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