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해방’ 조국의 첫인상과 ‘한류’

  • 입력 2005년 1월 12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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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덕담 한마디. 0으로 끝나는 숫자의 기념일이 올해는 한일관계에서 셋이나 겹친다. 1905년 을사늑약 100주년, 1945년 광복 60주년, 1965년 한일국교 수립 40주년.

을사늑약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일이요, 한일국교 수립은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보도를 통해 먼발치로만 구경했다. 직접 현장을 체험한 것은 8·15광복뿐. 이제는 8·15를 죽은 ‘기록’ 아닌 산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동시대인도 사라질 듯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그걸 12세 소년의 삶에서 목격한 경험담으로 적어 볼까 한다.

요즘은 ‘광복’이란 말이 공식어가 된 듯하지만 8·15의 역사공간에선 ‘해방’이 일상적인 표현이었다. 창씨개명한 학우들과 일본말을 ‘국어상용(國語常用)’하라고 배우며 자란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광복은 조국과 모국어를 맞은 거창한 해후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진짜 우리 것, 그러나 서먹서먹하기까지 했던 우리 것과의 첫 만남의 인상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겐 다중적 차원에서 3이란 숫자를 만나는 체험이었다.

우선 광복과 더불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3000리 강산’, ‘3000만 동포’였다. 3000리는 한반도의, 3000만은 한민족의 상징어였다. 다카야마, 가나자와 등 창씨개명했던 친구들이 광복되어 제 이름을 찾고 보니 고준호 김수웅 등 거의 예외 없이 3자 성명이었다.

▼해방공간의 ‘3字인연’▼

그뿐만 아니라 이제 맘껏 지껄일 수 있게 된 우리말은 상당수의 기본단어가 3음절임도 알았다. 아버지 어머니 개나리 진달래 꾀꼬리 부엉이 등. 되찾은 우리 민요도 한결같이 3박자(세마치장단)였다.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등. 우리 고유의 가사로 배우게 된 시조문학도 일본의 1행 시(하이쿠), 2행 시(와카)와는 달리 초장 중장 종장의 3행시였다. 사사로운 얘기지만 소화(昭和) 8년이라던 내 생년도 광복이 되면서 1933년생이 되었다.

광복 공간에서 만난 ‘3자 인연’은 이처럼 끝이 없으니 얘기를 앞으로 돌려 본다. 1945년 이후 60년, 그것은 어떤 시대였으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거시적으로 본다면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광복된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20세기, 특히 그 후반기는 어디서나 민족 민생 민권 회복을 추구한 ‘3민주의’의 세기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3민주의의 세기에 가장 성공한 제3세계의 모범을 보였다. 그 사이에 치른 동족전쟁의 아픔도 이겨가며.

이를 위해 우리는 3중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세계 최고의 고학력 고경쟁 사회를 이룩한 40, 50년대의 교육혁명, 최단 기간에 최빈국을 산업화 정보화의 선진국으로 탈바꿈시킨 60, 70년대의 경제혁명, 전쟁이나 외부의 도움 없이 군부정권의 개발독재 하에서 맨주먹의 시민 파워로 민주화를 쟁취한 80, 90년대의 정치혁명이 그것이다.

그러한 대역사를 이룬 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그걸 부정의 부정이라는 ‘해방’의 파토스라 본다. 못 배운 무지로부터의 해방, 5000년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견딜 수 없는 압제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교육 경제 정치의 세 가지 혁명이 모두 파괴적인 혁명전략이 아니라 건설적인, 비혁명적 발전정책으로 성취됐다는 사실이다.

▼한류를 한국문화 중흥 계기로▼

8·15 이후 60년. 무지 빈곤 압제로부터 해방된 21세기 초 한국의 에너지가 이젠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고학력 사회의 인적 자원이 교역 규모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으로 단군 이래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향유하며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가. 만일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한국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개화시키지 않는다면…. 15세기의 세종시대, 18세기의 영·정조 시대에 이어 300년 만에 다시 한국 문화의 제3의 중흥기를 열지 않는다면…. 지금 물감이 번져 가듯 세계로 퍼져 가는 ‘한류’는 그러한 21세기 한국 문화의 전조(前兆)요 선발 고적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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