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청구서[이은화의 미술시간]〈400〉

  • 동아일보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해학적인 풍속화로 유명하다. 그가 30대 중반에 그린 ‘한 방탕아의 몰락’(1732∼1735년·사진)은 여덟 점으로 구성된 연작으로, 부유한 상인의 아들 톰 레이크웰의 추락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레이크웰은 사치와 방탕으로 유산을 탕진한다. 임신한 약혼녀 세라 영을 가차 없이 버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의 무지와 허영을 틈타 재산을 은밀히 빼돌린다. 이 그림은 세 번째 장면으로 레이크웰의 삶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장소는 런던 코번트가든의 악명 높은 매음굴 로즈 선술집.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성들은 매춘부들이다. 이들이 얼굴에 검은 반점을 찍은 건 매독을 감추기 위해서다. 레이크웰은 고주망태가 되어 중심에 앉아 있지만, 사실 그는 파티의 주인공이 아니라 먹잇감이다. 한 여인은 그를 유혹하는 척하며 시계를 훔쳐 동료에게 건네고, 바닥에는 야간 순찰대의 지팡이와 등불, 옷가지와 음식이 난장처럼 널려 있다. 호가스는 탐욕과 속임수가 뒤섞인 이 장면을 쾌락의 정점이 아니라 몰락의 문턱으로 묘사했다.

이후의 전개는 곧장 파국으로 이어진다. 레이크웰은 채권자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힐 뻔하다 약혼녀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감사 대신 배신을 택한다. 늙고 부유한 노처녀와의 결혼으로 운명을 되돌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도박 중독으로 다시 빚더미에 올라 결국 감옥에 수감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정신착란 상태로 폭력을 일삼다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300년 전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지금에도 유효해 보인다. 쾌락의 순간은 짧고 달콤하지만, 그 청구서는 길고 무겁다. 더 큰 문제는 청구서의 무게를 레이크웰처럼 언제나 너무 늦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윌리엄 호가스#한 방탕아의 몰락#쾌락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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