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황규호/백제를 생각하는 절 고산사

  • 입력 2003년 7월 24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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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고색창연한 옛 절도 아니고, 명성을 크게 떨칠 만큼 위세당당한 가람(伽藍)은 더욱 아니다. 1966년에 지었으니까 역사 또한 일천하다. 그런데 남다른 창건 사연을 간직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 작은 절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운주산(雲住山) 중턱에 자리했다. 운주산 자락에다 절터를 잡은 까닭은 백제 부흥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주류성(周留城)이 연기군 지역 어딜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운주산 정상부에는 백제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테메식 고대 산성이 있다. 바로 구름도 머물다 간다는 운주산성(雲住山城)이다. 산성에 올라서면, 일대 연기군 지역은 물론 천안과 청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역사 기록에 나오는 주류성이 여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운주산 언저리 계곡을 ‘피숫골’이라 하고, 운주산에 ‘삼천굴’이 있다는 전설은 백제 부흥군 최후의 항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얼마쯤은 역사의 요소를 바탕에 깔았다는 신화를 상기하면, 전설에도 역사가 스미게 마련이다. 백제 부흥군 부대가 ‘삼천굴’에 가까스로 피했다가 나당연합군에 들켜 몰살당하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는 ‘피숫골과 삼천굴 전설’은 논픽션의 사실(史實)과 맞물릴 가능성도 있다.

그런저런 역사를 좇아 운주산 자락에 절을 지은 고산사 창건주는 운주문화연구원 최병식 원장이다. 백제 역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연구소까지 차린 그는 늦깎이 고고학자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의 꿈을 접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고고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운주산에 절을 짓기 이전인 1996년부터 백제 부흥군 천도재를 겸한 ‘백제 고산제(高山祭)’를 해마다 올렸다. 백제 고산제는 올해로 10회째를 맞는다. ‘은산별신굿’과 ‘범패’ 연희자를 초청했고, 서울대 최몽룡 교수(고고학) 등 여러 고고학자와 사학자들이 고산제 현장에 내려와 학술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고산제는 ‘여지도서(與地圖書)’와 ‘충청읍지(忠淸邑誌)’ 등에 나오는 운주산의 옛 이름 고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산사라는 절 이름도 마찬가지다. 최 원장의 백제사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집념은 지난해 운주산 곳곳을 시추하는 시추 작업으로 이어졌다. ‘삼천굴’ 흔적을 아직 찾지는 못했으나, 미련은 버리지 않고 있다. ‘백제국의자대왕위혼비(百濟國義慈大王慰魂碑)’를 절 앞에 세운 그는 고산제 같은 큰 행사와 학술조사 비용 모두를 사재로 충당했다.

그는 올해 가을 고산제 때 회향(回向)할 여법(如法)한 극락전을 짓고 있다. 고산사에 모셔온 스님 한 분과 함께 건사하기 어려운 절집 살림을 직접 챙기면서 낡은 가건물 극락전을 헐고 절집 전통양식의 새 건물 건립에 착수한 것이다. 26일 상량법회를 여는 고산사 아래 피숫골 계곡물이 장마로 불어나 포말을 튕기건만, 전날의 산사는 여전히 적막했다.

황규호 한국문화재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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