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記者정신' 푯대…'신문의 날'제정 故정신영기자

  • 입력 2000년 4월 2일 21시 07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동맹국 부대와 동독군이 밤새워 마주선 베를린시의 분위기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긴장에 휩싸여 있다… .’

1961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은 멀리 동베를린으로부터 날아든 숨가쁜 소식을 전했다. 때는 동독이 장벽을 쌓아 동서베를린을 차단한 열흘 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기자들도 신변안전을 염려해 취재를 꺼리는 이 지역에 단신으로 뛰어든 것은 본보 정신영(鄭信永·1931∼1962)특파원이었다. 이후 정특파원은 두차례나 더 위험을 무릅쓰고 동베를린으로 잠입해 분단국가 기자의 눈으로 동서독 단절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한국언론사에 남을 기사를 썼던 그는 이듬해 봄 유학 중이던 독일 함부르크에서 서른한살의 꽃다운 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4일은 기자로서 짧지만 굵은 획을 긋고 간 그의 38주기. 또 해마다 ‘신문의 날’(7일)이 다가오면 그를 떠올리는 언론인이 많다. 당시 그가 ‘신문의 날’ 제정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정신영기자는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56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국회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기자직을 택한 데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던 둘째형 인영(仁永·한라그룹명예회장)씨의 영향이 컸다. 정인영씨는 6·25 발발 직후 전 언론사가 후방으로 철수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서울의 외국기관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50년 6월27일자 동아일보 호외로 알렸던 인물.

“쾌남아였으며 호기심도 많고 감수성도 강해 ‘감탄사’란 별명을 얻었던”(대학시절 친구 정재석·丁渽錫전상공부장관의 회고) 정신영기자는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취재원과 동료 사이에 신뢰를 얻었다. 57년 1월 소장 기자들이 ‘연구와 친목’을 목적으로 만든 관훈클럽이 기자생활 1년 미만이었던 정기자를 30번째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능력과 인간됨됨이가 선배들로부터 일찌감치 인정받은 증거였다.

5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독일로 유학한 뒤에도 그는 학생이기보다는 기자로서의 의식을 잃지 않았다. 58년에는 한국일보 독일 통신원으로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 관람기와 아일랜드 기행문을 게재했다. 61년 7∼9월에는 다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임명돼 당시 5·16 군사정부가 파견한 유럽 친선사절단의 활동을 보도했다. 그의 해외취재기가 끝나자 김상만(金相万) 당시 동아일보발행인은 ‘독자의 호평을 받던 형의 취재기사가 없어짐을 섭섭히 생각합니다’라고 이례적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국의 경제부흥을 확신하며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저축과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던 정기자는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장 폐색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 신문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맏형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이 아우의 못다한 뜻을 잇기 위해 77년 관훈클럽에 젊은 기자들의 국내외 연수, 저작활동을 지원하는 데 써달라며 기금을 기탁한 것. 이렇게 탄생한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은 지금껏 생전의 정신영기자처럼 탐구심에 불타는 젊은 언론인들의 재교육을 위한 귀중한 재원이 되고 있다. 그의 기자정신은 이처럼 곳곳에 살아 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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