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날 오후'

  • 입력 2000년 1월 21일 20시 12분


▼빌리 클뤼버 지음/창조집단 시빌구/207쪽 1만원▼

1916년 8월 12일 토요일. 파리는 쾌청했다. 먼 전선에서는 대포가 불을 뿜고 있었지만, 이따금 거리를 걷는 군인들을 제외하면 시내의 분위기는 평화로왔다.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몽파르나스의 로통드 카페에 ‘전방위 예술가’ 장 콕토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화가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느 날처럼 낮익은 예술가들이 너댓 명 모여있었다. 장 콕토는 그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세시 반경, 화가 모딜리아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를 걸으며 웃고 농담하며 사진을 찍는 유쾌한 시간이 지난 뒤 일행은 네시 반 경 마지막으로 포즈를 취했다.

며칠 뒤 친구들은 인화된 사진을 나누어 갖고 흩어졌다. 아폴리네르의 시처럼 시간은 센강의 물과 더불어 흘러갔고, 그 날은 잊혀졌다.

장 콕토, 시인으로 극작가로 영화감독으로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마음껏 재능을 발휘한 풍운아. 피카소, 풍부한 상상력으로 현대 미술에 새 지평을 열어젖힌 인물. 모딜리아니, 인물화의 정형을 거부하고 발랄한 조형의 빛을 덧입힌 주인공. 새로운 미의식의 지평을 찾아 나선 20세기 예술의 프론티어들이다. 이들의 교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26장의 사진이 망각의 시간을 딛고 80여년만에 우리 앞에 모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인 클뤼버는 세기초 파리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었다. 78년 어느날, 그는 다섯 장의 사진이 같은 날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 속에 실린 인물이 동일했으며, 넥타이의 매듭과 칼라의 각도까지 복장도 똑같았다.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두 천재가 나란히 등장하는 사실도 관심을 끌었다.

흥미를 느낀 클뤼버는 사진 주인공들의 행적을 추적해 이들이 1916년 여름 파리에 모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사진 속 건물과 차양의 그림자를 재고 천문대에 분석을 의뢰, 사진들이 8월 중순에 촬영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조연급’ 주인공들의 정체도 속속 확인됐고, 같은 현장의 사진이 속속 입수돼 20여장을 헤아리게 됐다. 마침내 주인공들의 일기와 편지 등에서 장 콕토가 ‘사진사’를 도맡았다는 점과 ‘8월 12일’이라는 날짜를 알게 됐고, 이를 토대로 그림자를 재분석해 사진을 시간대별로 배열할 수 있게 된 것.

몇 가지의 단서만을 가지고 퍼즐맞추기처럼 수십년전의 하루를 복원해 낸 저자의 치열한 탐구정신에 독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20년에 걸친 작업의 공로로 클뤼버는 98년 최고의 비평적 연구에 주어지는 ‘골든 라이트 상’을 수상했다. 사진사(寫眞史)적 의미에서도 천재 예술가 장 콕토의 시도는 빛을 발한다. 207쪽. 1만원.“초기의 아마추어 사진은 분명한 표정을 지은 모습만을 카메라에 담았다. 콕토는 몽파르나스 예술가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포착, 아마추어 사진에 새로운 리얼리즘을 이룬 것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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