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불문학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갔던 파리. 8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어머니는 화가로 우뚝 섰고 동생과 함께 파리에 남았던 소녀는 사진작가가 됐다.
이순희(58·부산대 불문학교수)와 배주미(33). 이들 모녀예술가가 15∼21일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함께 전시회를 연다.
『열한살, 여덟살짜리 애들을 옆에 놓고 미친 듯 공부해 4년반 만에 소르본대에서 학위를 받았어요. 이제 귀국하려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애들이 원망을 하더군요. 엄마 마음대로 데리고 와놓고 이제와서 엄마 마음대로 돌아가느냐구요』
「아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만…」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그가 한 것이 그림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리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반대로 억눌렀던 욕망이 한없이 솟아올랐다. 그림그릴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을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큰 딸 주미가 열여덟살이 되자마자 혼자 귀국한 이순희는 부산대교수로 자리를 잡았고 개인전을 잇달아 열었다. 소르본대에서 영문학을, 뉴욕 파슨즈 스쿨에서 사진을 전공한 주미는 동서문화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진작가로 자랐다.모녀가 처음으로 함께 마련한 이번 전시회에서 이순희는 「기(氣)시리즈」 「꿈이야기 시리즈」 40여점을 선보인다. 청 녹 흑 회색을 덧칠해가는 서양화 기법에 난(蘭)을 치는 듯한 동양적 기법을 접목시킨, 선(線)의 축제같은 그림들이다.
작품에서 「기」란 그가 발견하고 표상(表象)하려는 원초적 존재를 일컫는다. 이를 위한 표현이 꿈이다.그래서 철학자 박이문교수(포항공대)는 『기계 문명의 소외로부터 해방돼 모든 것과의 조화를 찾으려는 외침, 낡고 인공화해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거부를 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배주미의 사진 역시 문명세계를 회의하는 동양적 감성을 담고 있다.시멘트 콘크리트 철강 등의 딱딱하고 무겁고 차가운 광물성의 대상들을 퇴색시키거나 희석해 부드럽고 섬세한 식물성의 분위기로 탈바꿈시킨다.
모녀는 『함께 전시회를 갖는 것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한때 「너같은 딸낳아서 나만큼만 받아라」했던 어머니,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테야」했던 딸이 결국은 한 길에서 만나 껴안고 있다. 02―721―7772
〈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