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조헌주]사가미댐서 스러진 무명의 조선인들

  • 입력 2005년 10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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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의 도쿄(東京) 특파원 임기가 끝나간다. 몸도 마음도 공연히 바쁘지만 지난 금요일에는 짬을 내 사가미(相模) 호수를 찾았다. 도심에서 전철로 1시간여, 가나가와(神奈川) 현에 속하는 이 호수는 일본 최초의 다목적댐인 사가미 댐이 완성되면서 생겨났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호반(湖畔)에 비친 홍엽(紅葉)과 계류(溪流)의 청징(淸澄)함을 보며 흩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싶기도 했지만 귀국하기 전 술 한잔을 바칠 곳이 있어서였다. 호수 옆 공원에는 1993년 10월 나가스 가즈지(長州一二) 당시 현 지사의 이름으로 세워진 위령탑이 있다. 맥주와 오징어포, 사과와 빵을 제수 삼아 재배, 헌주(獻酒)한 뒤 탑을 둘러본다. 공사 때 숨진 83명의 이름, 그리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된 비문을 한 글자씩 읽어 본다.

‘…전쟁체제하 노동력 부족으로 일본 각지에서 온 노동자와 근로학도, 포로로 동원된 중국인,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반도에서 국가의 방책에 따라 동원된 분 등의 노고와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일제가 맹위를 떨치던 1940년에 시작된 댐 공사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군수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이 달리자 급피치를 올렸다. 연인원 350만 명이 동원된 큰 공사였다. 결국 완공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 공사 때는 대개 2000여 명이 일했는데 이 중 70∼80%가 한반도에서 끌려온 징용자였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던 이들의 생명은 까마득한 절벽에서 발파작업을 하다, 혹은 높다란 제방을 짓다 수도 없이 스러져갔다.

‘모집’ ‘채용’이란 허울 좋은 꾐에 빠져, 혹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렸던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후일 댐을 보며 “호수 물이 아니라 핏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위령탑에 새겨진 희생자 이름은 대부분 일본인. 창씨개명으로 알아보기 힘든 탓도 있겠지만 한국명은 극소수다. 중노동과 굶주림, 학대와 차별 속에 이름조차 못 남기고 간 사람이 대부분이니 요즘 거론되는 유골 반환은 어찌 보면 꿈같은 소리다.

가나가와 현은 가와사키(川崎) 등 군수공장이 밀집한 지역이라 징용자 가운데 귀국하지 못하고 정착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의 노력과 양심적 일본인들의 요구에 굴복해 현지사가 위령탑을 세운 것이다. ‘강제 동원’이란 역사적 용어 대신 ‘국가의 방책에 의해 동원된’이란 애매한 표현을 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위령탑이 세워진 1990년대 초반은 요즘보다는 분위기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일본은 어떠한가. 일제 침략을 ‘해방전쟁’이라 우기고, 전범이 숭고한 애국자로 추앙받는다. 민중을 전쟁도구로 내몰기 위한 집단세뇌 장치였던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일본 총리가 해마다 참배해도 비판 여론은 갈수록 약해져 간다. 식민지배와 집단학살, 민족말살 정책은 잊어버린 채 ‘내정간섭’ 운운하며 피해자에게 도리어 역정을 낸다.

오늘의 일본인은 일제 가해의 역사를 모른다. 흔히들 역사책에 없어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문제는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류 바람 속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역사인식으로까지 지평을 넓히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이래서야 형세를 제대로 판단할 리 없다.

한국의 요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 동해, 독도, 역사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등 문제가 일 때면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대일(對日) 비판. 이것이 맹목적 증오로 비치지 않으려면 한국인부터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외세 침탈과 망국, 분단과 내전, 군부독재의 역사가 남겨 준 교훈은 다 어디 갔는가”라고 묻고 싶은 오늘이다.

조헌주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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