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우혜]햇살 아래 나서는 숙정문

  • 입력 2005년 9월 12일 03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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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시대를 반영한다. 건축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또한 시대를 반영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숙정문(肅靖門) 개방 계획을 대하니 상전벽해의 감회가 새롭다. 숙정문의 위치가 청와대 인근이어서 일반인 출입을 엄금한 지 38년 만의 개방이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보안’을 위해 국민이 희생한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창문’ 문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떠오른다. 한때 청와대가 육안으로 보이는 지역의 고층빌딩은 청와대 쪽으로 아예 창문을 낼 수 없었다. 이미 있던 창문은 굳게 폐쇄하여 열지도 못하고 밖을 내다볼 수도 없게 했다. 서울시청과 일대의 빌딩은 물론 대형 호텔조차 청와대 방향의 창문은 모두 두꺼운 불투명 유리를 끼운 채 폐쇄하고 지냈다. 그리 지난 얘기가 아닌데도 이젠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조선시대 지도 중에 ‘도성도(都城圖)’라는 제목의 지도가 꽤 있다. 수도 한양성을 그린 것인데 성벽과 성문, 궁궐과 여러 관아의 그림과 각 지역의 지명을 쓴 글씨로 빼곡하다. 그런데 도성도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정북(正北)에 있는 숙정문의 모습이다. 여덟 성문 중 유일하게 문루가 없는 ‘암문(暗門)’이기 때문이다.

성문 형태만 기이한 게 아니다.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건축 초기부터 인마(人馬)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던 특수한 성문이었다. 숙정문에 연결되는 큰길이나 마을은 없고 성문 앞은 그저 첩첩산중인 높은 산악지대이다. 그럼에도 도성의 정북 방향에 실용성이 없는 성문을 굳이 내야 했던 이유는 짐작하기 쉽다. 음양오행사상에 따른 ‘사물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음양오행설에서 북은 물(水)이요 겨울이며 그 성질이 음(陰)하다. 그래서 실용성과는 상관없이 성곽 북쪽에 음기가 드나들 문을 내야 했다. 따라서 성문의 모양을 문루가 없는 암문으로 건설한 것이고, 평소에는 음기가 성하지 못하게 늘 성문을 닫아 두었다. 그러니 숙정문이야말로 형체 없는 기운의 왕래를 위한 그늘의 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해 보면, 조선시대에는 숙정문을 속칭으로 부를 때 반드시 ‘북대문’이 아닌 ‘북문’이라는 칭호만 썼다. 그 역시 음양오행사상에서 ‘음’을 대하는 칭호법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음기가 차올라서 비를 내리게 하고자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북쪽의 숙정문을 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숙정문 개방’의 효능을 크게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연산군 10년에 숙정문이 본래 위치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문 이름은 축성 당시인 태조 때 지은, 물이 맑음을 뜻하는 ‘청(淸)’ 자를 넣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이 “숙청문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라”라고 명함에 따라 약간 우측으로 옮겨졌다. ‘숙청문’이라는 성문의 이름은 중종 18년의 실록에 이미 ‘숙정문’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숙청문’이 ‘숙정문’보다 더 음기가 센 이름인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연산군 때 ‘음기의 조절’을 위해 성문의 위치를 바꾸고 그에 맞춰 성문의 이름도 고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여색을 밝혔다고 알려진 연산군이 ‘세상의 음기’에 가장 큰 신경을 쓴 임금이었던 점이 흥미롭다.

요즘 언론에 공개된 숙정문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암문의 형태가 아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6년 암문 자리에 새로 문루를 올려 만든 성문이니까 숙정문은 ‘복원’이 아니라 새로 건축된 것이다. 성문이 지닌 음양의 성질에 관한 조선조 식 정서로 보자면, 음과 양이 한데 뒤섞인 것으로 비칠 것이다. 이런 사례는 전통의 파괴적 개혁인가, 창조적 오류인가. 모든 건축물은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숙정문 개방은 자못 즐거운 화두가 될 듯하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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