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8년 ‘007’ 작가 이언 플레밍 출생

  • 입력 2005년 5월 28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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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대개 비슷하다. 주인공은 중요한 공작 임무를 띠고 적국에 침투한다. 그곳에서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을 만난다. 적의 공격을 받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적과 대치하는 바쁜 와중에도 여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최후 결전에서 기상천외한 무기들을 이용해 적을 쳐부순다.

‘007’이라는 암호명으로 더 잘 알려진 스파이 ‘제임스 본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 반세기가 지났건만 아직 그가 등장하는 소설과 영화는 수많은 추종자를 몰고 다닌다.

잘생기고 머리가 비상하며 돈까지 많은 남자.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이를 게임처럼 즐기는 ‘쿨’한 모습. 그는 여성들에게는 애인으로 삼고 싶은 대상이며 남성들에게는 닮고 싶은 존재다.

본드를 가장 닮고 싶어 한 인물은 다름 아닌 그를 창조해낸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이었다. 맡는 임무마다 성공을 거둔 본드와는 달리 플레밍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08년 5월 28일 태어난 플레밍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상속받은 유산이 없었다. 군인이 되려고 했으나 자격미달로 쫓겨났고 외교관이 되려고 했지만 외교관 시험에 낙방했다. 주식중개인 생활도 해봤지만 자신이 인정한 대로 ‘세계 최악의 주식중개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플레밍은 우연한 기회에 영국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스파이 파견 업무를 맡게 됐다. 물론 그가 활동한 장소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적지가 아니라 런던 정보국 사무실 책상 앞이었다. 비록 실전에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1952년 스파이 영웅 제임스 본드를 창조했다. 196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14권의 007소설을 펴냈다. 플레밍의 소설을 토대로 지금까지 20편의 007영화가 제작됐다.

냉전시대 개막과 함께 등장한 본드는 색다른 영웅상을 보여줬다. 이전에 나온 대다수 탐정 추리물들이 고독한 정의파 주인공을 내세워 비정한 사회현실을 고발했지만 플레밍은 값비싼 브랜드를 선호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멋진 본드 걸에 둘러싸여 가뿐히 소련 악당을 해치우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007소설에 열광했다.

냉전시대가 사라지면서 본드는 싸울 상대를 잃었다. 웬만한 상대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요즘 007영화에서 북한 같은 ‘꼬마 적’을 상대로 첨단무기를 휘두르는 본드를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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