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집사(執事)

  • 입력 2003년 10월 17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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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20년 측근인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대선 직후 거액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정치판에서는 그를 ‘노 대통령의 집사’라고 부른다. 측근 중의 측근으로 은밀한 거래나 사사로운 가정사까지 상의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참모가 공적인 일을 담당한다면 집사는 내밀하고 사적인 일을 처리한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한보 비자금에 연루돼 구속된 홍인길 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과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이수동 아태재단상임이사가 각각 ‘상도동 집사’와 ‘동교동 집사’로 불렸다. 바야흐로 삼대(三代)를 이은 ‘집사 수난시대’인 셈이다.

▷국어사전은 ‘집사’를 주인집에 고용되어 그 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 또는 개신교 봉사 직분의 하나로 규정한다. 영어로 전자는 ‘버틀러(butler)’ 또는 ‘스튜어드(steward)’, 후자는 ‘디콘(deacon)’이다. 집사의 유래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다. 초대 교회가 번성하면서 가난한 형제와 과부들이 모여들자 예수의 12제자들이 일곱 명의 착실한 일꾼을 선택해 그들을 돕도록 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집사의 조건을 ‘반듯하고, 한 입으로 두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하며, 과음을 삼가고,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초대 교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집사들이 많았다. 자신을 돌로 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으며 죽음을 맞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뛰어난 전도자였던 빌립, 구제사업을 잘한 여자집사 뵈뵈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봉사와 헌신에 대한 어떠한 상급(賞給)도 기대하지 않았다. 은퇴 후 모범적인 신앙 및 봉사생활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침례교 집사다. 대통령 재임 시절 경호원들은 그의 코드 네임을 ‘집사’로 불렀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집사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평생직분인 안수(按手) 집사와 1년마다 재임명되는 서리(署理) 집사다. 집사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안다. 몰래 술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려고 해도 눈치가 보이는 직분이다. 재력이 있는 유력 신도에게 검은돈을 요구하거나 교회 공금을 빼돌려 개인 빚을 갚는 것은 집사가 할 일이 못된다. 그래서 온갖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한국 교회의 수많은 ‘청지기 집사’들은 요즘 ‘대통령 집사’ 한 사람 때문에 집단으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집단 항의라도 해야 할 판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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