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 건 2017년 수능부터다. 원점수 90점 이상을 받으면 모두 1등급이다. 그런데 올해 수능에서 영어 1등급 비율이 3.11%에 그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어 수학 등 나머지 상대평가 과목의 1등급 비율(4%)을 밑돈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올해 영어 1등급을 받은 수험생은 1만5145명, 지난해 절반 수준이다. 평소 모의평가 성적을 믿고 수시에 지원했던 수험생들은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대거 탈락할 처지다. “강제로 재수하게 생겼다”며 울분을 터뜨린다.
▷오승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10일 이른바 ‘불(火)영어’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했다.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1998년 출범 이후 원장 12명(1명은 연임) 가운데 오 원장을 포함해 9명이 중도 사퇴했다. 이 중 6명은 수능 출제 오류로 물러났다. 오 원장은 ‘평가원장 잔혹사’ 명단에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로 물러난 첫 사례로 이름을 올렸다. 전임 이규민 원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지시를 따르지 않고 수능 모의평가를 출제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경질됐다.
▷오 원장은 “(수능 출제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거라 아이들에 따라, 출제자에 따라 난이도가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입시 당락에 결정적인 수능은 ‘완벽한 시험’이기를 요구받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처음 출제 오류로 물러난 건 3대 이종승 원장이다. 2004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17번 문항이 복수 정답인 것으로 인정돼 재채점이 이뤄졌다. 입시 현장의 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해임됐다. 가장 최근에는 2022학년도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이 법원 소송으로 비화했다. 소송을 제기한 응시생 92명은 세계적 유전학 석학으로부터 “문제의 전제에 모순이 있다”는 답변서를 받아 수능 공신력을 문제 삼았다. 평가원이 패소했고 당시 11대 강태중 평가원장이 물러났다.
▷암기력이 아닌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며 수능이 도입된 지 32년이 지났다. 하지만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당초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전국 수험생을 일렬로 줄 세우는 변별력을 갖추려다 보니 배배 꼬인 문제가 출제된다. 최상위권 대학 합격생을 가려내기 위한 ‘킬러 문항’이 대표적이다. 32년 전과 교과과정은 다를 바 없는데 기출 문제를 피하고 변별력을 갖춘 ‘기적의 문제’를 찾아내야 한다.
▷사교육은 지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도 출제 패턴을 익혀 마치 퍼즐 풀듯 정답을 골라내는 요령을 주입하고 있다. 수능이 고교 교육과 괴리된 채, 되레 획일적 인재를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수능이 학업 성취도 측정을 넘어 대학의 역할인 학생 선발까지 떠맡아 벌어지는 일이다. ‘수능 만능주의’ 신화를 깰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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