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장권/反테러

  • 입력 2002년 9월 8일 17시 49분


세계화 시대, 지구촌의 주요 사안에 대해 즉각 세계적인 여론이 형성되지만 그 목소리는 다양하다. 명분에서부터 입장이 갈리기도 하고 명분은 일치해도 실제 행동은 따로 놀기도 한다. 4일 폐막된 세계 환경 정상회담처럼 환경보전이라는 명분에는 모두 동의해도 실제 교섭에서는 팽팽히 맞서 한낱 말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후자의 대표적 예다. 그런데 선진국간에 명분과 실제 모두 일치된 행동양상을 보여주는 사안이 있다. 바로 반(反)테러리즘이다. 1년 전 9·11테러 직후 미국이 테러에 대한 전쟁을 외치자 대부분의 선진국이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후 1년, 반테러 대책이 선진국 중심으로 강화되어 왔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부작용이 눈에 띈다. 미국에서는 아랍계 시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 사례가 크게 늘어났다. 영국은 지난해 반테러 보안법을 통과시켜 테러 용의가 있는 외국인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개인통신 및 신용정보를 정부가 조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거나 추진 중에 있다. 호주는 수백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수용소에 구금했다가 그곳의 비인간적인 상황이 폭로되자 반테러를 둘러댔다.

▷세계 인권단체들은 9·11테러 이후 선진국들이 반테러를 내세우며 자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인권 문제에서 눈을 돌리면서 이들에 대한 인권침해행위가 폭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적어도 15개국이 반테러 명분 하에 이민자,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보호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동안 선진국은 밀려들어오는 이민자 및 난민에 대해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인권존중 차원에서 관용 자세를 취해 왔는데 반테러가 이들을 억압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된 셈이다. 이는 상당부분 이들 선진국의 우경화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어느 정도 ‘강 건너 불’ 입장인 우리지만 왠지 80여년 전 일본 관동 대지진 사태가 떠오른다. 대지진으로 도쿄 등 관동지방 일대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무정부상태가 되자 일본정부는 재빨리 이를 조선인, 중국인 및 사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탄압하면서 민심수습에 이용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테러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다. 그러나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다른 형태의 테러가 행해진다면 이 또한 역설의 죄악이다. 테러를 낳는 반테러는 또 다른 모습의 테러일 뿐일 테니까.

김장권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교수·정치학 jk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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