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남북 화해시대의 '여유'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08분


남북정상회담이 분단 55년 만에 처음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대중대통령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은 만남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들 했다. 그런데 회담 결과는 만남 자체에서 휠씬 더 나아가 예상외로 통일 방안까지 포함된 공동선언문도 나왔다.

어떤 분은 정상회담이 빚어낸 귀한 작품을 도공이 도자기 다루듯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마에서 나온 지 열흘도 안돼 여기저기 흠집이 생겼다.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이 제각각 회담 성과를 자랑하려다 보니 할 얘기 안 할 얘기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시빗거리가 되는가 하면 하나의 사실을 놓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말이 엇갈려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다.

▼큰 작품에 생긴 흠집▼

또 이미 이곳 저곳으로 새어나온 회담의 속 얘기를 언론에서 보도한 게 잘못이냐 아니냐를 놓고 청와대와 언론사간에 언성이 높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속 좁은 정치인들끼리 치고 받는 모습이다. 정보 유출의 책임 소재 공방 과정에서 여당측이 야당 총재를 향해 ‘분별력이 없다’느니 ‘신사가 아니다’느니 하는 비판을 했다고 해서 여야간에 막말이 오가고 있다. 큰 작품이 ‘작은 정치’의 오물에 얼룩지고 있다.

6·15선언은 누가 뭐래도 대립 대결의 남북관계를 화해 협력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전기가 됐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그 외에도 대내적으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우리 사회에 정신적인 여유, 즉 냉전 시대의 폐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대로 보고 그대로 말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빡빡하던 사회가 좀 넉넉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다.

둘째는 우리의 정치에도 더 여유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분단 구조 하에서의 우리 정치는 딱딱하기만 했다. 특히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이른바 남북관계가 ‘적대적 의존 관계’로 서로 정권 유지를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 그늘에서 찌들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색깔 논쟁이니 북풍 논쟁이니 하는 터에 진정한 토론과 정책 경쟁은 꽃필 수 없었다. ‘안보’라는 큰 바위에 짓눌린 정치가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이젠 좀 여유를 찾자.

공연히 트집잡고 깎아 내리려는 비판 아닌 비판도 안되지만 상대방의 비판에 무조건 흠집내기 발목잡기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더욱 옹졸해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도 완전한 것은 없다. 6·15선언도 큰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제작 기일이 촉박하다 보니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의 비판과 의견을 들어 부족한 것은 메우고 고칠 것은 고쳐 나가야 한다. 특히 통일과정, 통일 이후의 갈 길에 대한 논의의 장은 미리미리 열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6·15선언의 미비점이나 문제점이라도 지적하려 들면 ‘반통일 세력’ ‘냉전주의자’로 몰리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움츠러든다고 호소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용공’이나 ‘좌경’으로 몰려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과는 반대 현상이 부분적이나마 번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상한 풍조다.

▼역(逆)색깔론도 곤란▼

진정으로 남북이 화해하고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 가려면 언젠가는 서로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주고받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김대통령 말대로 김정일위원장이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라니까 더욱 그렇다. 북한이 저지른 6·25와 각종 테러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고 해서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껍데기 화해’만 하려는 사람이다.

김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색깔론에 시달리면서 민주화운동을 한 분이다. 시대가 달라져 역(逆)색깔론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제 김대통령과 여권이 먼저 여유있는 정치를 펴 보일 때다. 수(數)와 힘의 대결로 완승(完勝)만을 하려고 조급해 할 것이 아니라 너그러운 자세로 화합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정치의 멋을 한껏 부려볼 만하다.

앞으로 내각과 청와대 개편 과정에서도 등용의 폭을 넓혀 새로운 화해의 시대에 걸맞은 큰 정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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