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69)

  • 입력 1999년 7월 15일 18시 44분


나는 변소의 비좁은 사방 벽과 천장에 있는 얼룩이며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를 머릿속에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게 되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눈앞의 얼룩과 무늬를 이리저리로 꿰어맞추며 형상을 만들어 보고는 하였다. 토끼나 개를 닮은 모양도 있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의 상반신이 되기도 하고 어느 것은 남녀의 성기를 닮은 것도 있다. 비슷하지만 상상 속의 모양과 조금 다른 것들은 손톱으로 긁거나 떼어내서 형상을 완성해 두는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보면 다시 얼룩과 흔적들은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곤 했다.

수의 안에 털 스웨터와 조끼까지 입고서도 아침 저녁으로는 너무도 등이 시리고 떨려서 담요를 둘러쓰기까지 하는데 고참들에게서 냉수욕으로 추위를 물리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모범수와 환자에게 지급되는 물통을 구했다. 물통은 방수 패킹이 달린 군대의 탄약통이었는데 거기 더운 물을 가득 채우고 뚜껑을 단단히 막고 주머니에 담아서 침구 속의 발치쯤에 넣어두면 아침까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겨울 날 하루 중 가장 추운 어둑어둑한 새벽에 체온으로 따스하게 덥혀진 잠 자리에서 빠져 나오는 일은 날마다 하나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을 잘 이겨내지 않으면 하루가 망가져 버린다. 아침 식전의 이 몇 시간 동안의 정신 상태야말로 온 하루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냥 담요 속에 처박혀서 꿈지럭대다가 아픈 시늉을 하고 운동시간까지 놓치고 나면 그 날은 태양은 물론 너른 바깥 공간의 대기마저 한모금 마실 수가 없다. 해가 금방 지고 나서 저녁 추위가 감방에 몰려오기 시작하고 사방의 벽이 온몸을 조여올 때 문에다 머리를 처박으며 소리를 힘껏 지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게 된다.

그래서 하루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변소에 뛰어든다. 변소 입구의 비좁은 공간에 놓인 잡수통 뚜껑을 열면 살얼음이 끼어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얼음을 깨고 작은 양동이에 퍼 담은 뒤에 수건으로 물을 축여서 냉수마찰을 시작한다. 비닐 사이로 새어든 바람이 젖은 몸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찢어지는 듯하다. 한참 살갗을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살이 발갛게 되면서 전신에 활기와 온기가 돌게 된다. 마지막 남은 물로 얼굴을 씻고 양동이채로 머리에서부터 들이붓는다. 이가 맞부딪친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특히 귓바퀴는 동상이 잘 걸리니까 수건으로 구석구석 여러번 닦아준다. 잠깐 호흡을 고르고 나서 시찰구의 철창을 잡고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제자리뛰기를 한다. 감옥에는 겨울과 여름 두 계절만 존재한다. 봄이나 가을은 너무도 짧고 덧없어서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달력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출역수들이 공장으로 나가고 나면 배식이 시작된다. 배식 준비, 하는 소지들의 고함 소리와 함께 달구지의 쇠바퀴 소리가 지겹게 들리면서 음식냄새도 차츰 가까워진다. 복도에 붙은 차림표는 그럴 듯하지만 음식은 모두 비슷비슷해서 건더기는 없고 정체 모를 국물만이 남아 있다. 국인지 찌개인지 조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내용물이 한두 가지씩 국물 밑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끔 두부나 꽁치나 돼지고기의 큰 덩어리가 담기는 날은 그런대로 운이 좋은 날이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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