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작은 거인」등소평의 간소한 장례

  • 입력 1997년 2월 25일 20시 13분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의 청(淸)왕조는 외국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청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개항을 요구해 오는 서양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거부했다. 청의 관리와 서양인들 사이거래에는 별도로 중개인이 있을 정도였다. 개항시대가 잠시 있었지만 중국대륙은 곧 공산당에 의해 다시 죽(竹)의 장막으로 둘러싸였다. 鄧小平(등소평)은 이같은 오랜 중국의 닫힌 문을 연 사람이다 ▼외국기업들을 중국땅에 들어 오게 했는가 하면 중국회사들은 거꾸로 서구시장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1989년 천안문(天安門)사태는 그같은 사회주의 노선과 개방 개혁정책이 맞부닥쳐 생긴 갈등의 결과였다. 등소평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 크게 갈리지만 관심은 이제 그가 가고 난 후 남은 공백을 누가 어떻게 메우느냐에 쏠려 있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는 흐루시초프가 장례위원장이었고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는 안드로포프가 장례식의 주역이었다. 毛澤東(모택동)이 죽었을 때는 華國鋒(화국봉)이 추도연설을 했다. 이처럼 중국과 소련에서는 후계자의 얼굴이 장례식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번 등소평의 장례식은 江澤民(강택민)당총서기 중심으로 치러졌다. 현재는 그가 후계자로 유력하지만 군부 일각에서의 반발보도가 심심치 않다 ▼등소평은 중국의 문을 열어 놓고 역사의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25일의 추도대회로 끝난 그의 6일간 장례식은 어느 지도자보다도 간소해 또한번 심금을 울렸다. 화장된 유골가루는 홍콩반환을 소원하던 생전의 뜻에 따라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각막을 비롯한 그의 신체 일부는 의학용으로 남겼다. 마지막 가는 길마저 아주 깨끗했다.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답다. 그러나 또한 그는 아무리 거인이라도 죽으면 한줌 재라는 것을 몸으로 만천하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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