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미국에서 기증받은 ‘한국인 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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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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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 장현진씨 美서 기증서약
한국인 환자에 연결돼 깜짝
“美선 면봉 하나면 절차 OK
동포가 이식받게돼 더 기뻐”

미국 골수기증기관을 통해 골수를 주고받는 이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묘한 우연이 일어났다. 골수를 기증하기로 약속한 미국 국적의 장현진 씨가 수술을 앞두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혈압을 재고 있다. 전영한 기자
미국 골수기증기관을 통해 골수를 주고받는 이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묘한 우연이 일어났다. 골수를 기증하기로 약속한 미국 국적의 장현진 씨가 수술을 앞두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혈압을 재고 있다. 전영한 기자
“당신과 골수유전자(조직적합성항원형)가 일치하는 사람이 백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요. 당신의 골수(조혈모세포)를 기증받으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회사원 장현진 씨(40)는 지난해 6월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들긴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1988년 서울 대원외국어고 3학년에 다니던 장 씨는 무역업을 하던 부모를 따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장 씨는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영화사에 취직했다. 1999년 이 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발령 받은 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현재 한 대기업 자회사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골수 기증 시술을 위해 최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장 씨는 2006년 10월 미국에 들렀다가 골수 기증 봉사활동을 하던 지인으로부터 “미국에는 유독 한국인들의 골수 기증이 적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그는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에 골수기증 의사를 밝혔다. 피를 뽑아야 하는 한국보다 등록 절차도 간단했다. 면봉으로 얼굴과 혀 아래 부분의 세포만 긁어내면 바로 등록이 됐다.

장 씨는 미국에서 골수 기증 의사를 밝힌 지 3년 만에 나타난 이 환자가 당연히 미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술도 미국에 가서 받아야 할 거라 여기고 출국 준비도 했다. 그러나 장 씨의 골수를 기증받는 환자가 공교롭게도 한국인이라는 걸 곧 알게 됐다. 기증자와 환자의 신원을 비밀로 하는 규칙상 서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미국 기관을 통해 골수를 주고받게 된 이들이 모두 ‘한국인’인 인연을 맺은 셈이었다.

골수 안에 비정상적인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해 생기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이 환자는 골수기증자를 찾지 못해 수년간 고통을 겪었다. 이 병은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의 골수를 이식받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지만 골수기증자와 환자의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에 불과하다. 이 환자는 그동안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를 통해 기증자를 찾아봤지만 유전자가 맞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대만 등지까지 수소문하다 지난해 미국 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유전자가 일치하는 골수기증자가 있다는 낭보를 들었다. 물론 환자와 미국 은행 측 모두 기증자가 한국인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장 씨는 골수 채취 수술을 받기 위해 최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실에서 만난 장 씨는 “수술을 받는다고 하면 걱정하실까봐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고 형에게만 알렸다”면서도 “한국인의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돼 오히려 더 잘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난치병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나도 잘 안다”고 털어놓았다. 장 씨의 아버지도 난치병을 앓다 지난달 7일 세상을 떠난 것. 아버지를 1년 동안 괴롭힌 병은 신경세포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을 쓸 수 없게 되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었다. 장 씨는 “병이 악화돼 가는 아버지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며 “골수를 빨리 기증해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모두 덜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술에 앞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술까지 끊었다는 장 씨는 “부디 수술이 잘돼 환자가 새로운 삶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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