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지호/‘日결례’ 자초한 한국외교

  • 입력 2003년 6월 8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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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하는 데 대해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의 족쇄에 잡혀 있을 수는 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식사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도착 한 시간 전 일본 참의원에서 유사(有事)법제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여야, 보수 진보를 초월해 이날만큼은 한목소리로 “한국민을 무시한 외교적 폭거”라며 일본의 행위를 성토했다.

▼주말 낀 무리한 국빈방문 ▼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일까. 문제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진다. 유사법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본질적 문제와 방문 당일 유사법제 통과라는 절차상의 문제다.

먼저 절차상 문제의 경우, 일본의 외교적 무례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정부의 준비부족과 안이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충일 방일을 결정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일본에는 국가원수 취임 후 1년이 지나야 국빈(國賓) 방문을 받아들이는 관례가 있다. 1998년 10월 취임 8개월의 DJ를 국빈으로 맞이한 것은 그야말로 이례적 대접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노무현 정부의 국빈 방문에 대한 집착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37분 회담에 갈증을 느꼈기 때문일까, 취임 100일의 노 정부는 예정에 없던 국빈 방문을 요청했다. 1년 전에 결정된다는 일본 천황의 일정을 재조정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유럽방문 일정을 단축시켜가며 일본측이 제시한 것은 6∼9일이었다. 주말을 낀 국빈 방문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무리한 일정임을 나타내준다. 결국 노 정부는 이 안을 받아들였고, 실무방문이었다면 가능했을 일정조정은 물 건너갔다.

방문기간 중 유사법제 성립에 대한 대비도 소홀했다. 지난달 15일 일본 중의원에서 유사법제 3개법이 통과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때부터 신경을 썼더라면 방문 당일 참의원 통과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일 불과 이틀 전인 4일 노 대통령이 서울주재 일본특파원들과의 만남에서 그 같은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우리 측의 준비부족이 부른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절차상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유사법제 자체는 어떠한가. 유사법제가 일본의 군사능력을 강화시킨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사법제 성립으로 한국이 재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미동맹이 유지되는 한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받을 가능성은 상상하기 힘들다. 오히려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 유사시 미군을 통해 연결되는 한미일 연합군의 전력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망언이 되풀이되고 일본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이웃나라들의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유사법제가 성립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은 자칫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유발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은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비전과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며, 군사력 강화에 앞서 예방외교 능력의 강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일본은 비로소 이웃나라들의 축복을 받으며 진정한 ‘정상(正常)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오늘 일본 국회 연설은 이 점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

▼ 盧 국회연설 유사법제 지적해야 ▼

그런데 최근 일본 안보정책의 변화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북한 요인이다. 일본말에 ‘헤이와보케(平和ぼけ)’라는 표현이 있다. 평화에 취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과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은 자위대보다는 유엔과 평화헌법 덕분에 자기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본 국민의 ‘헤이와보케’ 증상을 고쳐준 것이 북한의 핵, 미사일, 납치, 공작선이다. 그러나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한국의 일부 젊은 세대는 “북핵도 우리 것”이라며 안보불감증에 빠져들고 있다. 누가 틀리고 누가 맞는 것일까.

신지호 KDI 초빙연구위원·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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