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을 보고]하성란/이젠 통일 향해 웃자

  • 입력 2000년 8월 15일 19시 31분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오늘자 ‘언어 전달’을 달달 외워왔다. “광복절에 헤어진 가족이 만나요.” 광복절이란 낱말도 생소하지만 가족이 헤어질 수도 있고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제 부모와 한시라도 떨어져 있는 상상만으로도 일곱 살 아이에게는 악몽인 것이다.

▼50년 세월 모르는 아이들▼

50년이라니.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아직 숫자 개념이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 네가 누울 수 있는 그늘을 만들 동안, 허허벌판에 거대한 도시 하나가 들어설 시간, 너와 엄마가 같은 식당에 앉아 얼음보숭이와 아이스크림이라는 엉뚱한 말을 하게 될 수 있는 시간이라고. 그리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어쩌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 시간이라고. 아무튼 지옥같이 길고도 긴 세월이었다고. 오늘은 그런 가족들이 50년 만에 만나는 날이라고.

삐라를 주워 연필로 바꾸고 반공 포스터에 뿔 달린 도깨비를 그려 넣던 나와는 달리 아이는 ‘반갑습니다’나 ‘휘파람’ 같은 북의 노래를 곧잘 흉내내곤 한다. 적어도 북은 우리보다 아이에게 더 가까이 있었다.

▼정신 놓아버린 아흔 老母▼

고려항공 민항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면서 예년과는 다른 광복절 아침이 시작됐다. 그 전부터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근황을 보아왔다. 살아 있다던 어머니의 뒤늦은 사망 소식에 실신해 병원에 누워 있는 칠순 노인의 모습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서울에 온 사람들 속에 월북인이 섞여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름자 대신 동그라미로 처리됐을 인물들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많은 일들이 큰 보폭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사실 내 주위에는 이산의 아픔을 안고 있는 친지 하나 없다. 내가 다니던 동네의 설렁탕집 주인 아저씨가 바로 그 피해자였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의 고향분이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 때문에 가끔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느 시대에나 희생자는 있는 법이라고, 나는 운이 좋았다고 그렇게 흘려버렸다.

▼헤어짐의 아픔 다신 없길▼

하지만 코엑스 컨벤션홀이나 고려호텔의 빈자리를 보는 순간 그렇게 생각해 버릴 수만은 없었다. 만남의 시간이 오후 3시반에서 4시로, 다시 4시반으로 자꾸 지연되면서 빈자리를 앞에 둔 가족들은 조바심으로 진이 다 빠져버렸다. 50년 동안 아들을 기다려온 아흔의 노모는 다 늙은 아들의 얼굴을 보자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동생을 찾는 오빠는 누이의 얼굴을 더듬으며 어린 누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누이는 기억나지 않는 오빠의 얼굴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울부짖음이 커다란 홀에 웅웅거렸다. 50년이란 세월도 가족의 엇비슷한 얼굴과 정은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을 기다리지 못한 수많은 넋은 어찌해야 하나.

아이는 제 엄마가 왜 우는 지도 모르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것도 잠시, 마루를 뛰어다니며 장난치느라 여념이 없다. 저 아이는 계속 저렇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저 아이의 시대에는 이런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 또한 다시는 공휴일 하루 내내 가슴을 졸이고 울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

하성란(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