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맛 잃었다" 공무원사회 '방관병' 만연

  • 입력 2000년 7월 12일 19시 19분


《중앙부처 고참 부이사관 L씨는 요즘 “기가 막힌다”는 말을 자주 한다. 국장 승진 때도 됐고 해서 일 좀 해야겠는데 위 아래를 살펴봐도 함께 호흡을 맞추며 일할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들리는 소리는 “시키지도 않은 일 하려다 다친다” “지금 정권에 충성파로 찍히면 2년반 뒤엔 살아남기 어렵다”는 등 ‘섬뜩한 충고’뿐이다.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에 이르면서 공무원사회에 ‘방관병(傍觀病)’이 더욱 깊어가고 있다.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고위 공무원일수록 이런 증세는 심각하다. 공무원 몸사리기는 과거 정권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증세는 △승진이나 발탁조차 꺼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리며 △지역편중 인사 시비로 인한 조직내 갈등까지 심각해 공무원들 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벌써 '차기정권' 염두…"승진-발탁도 싫어요"▼

얼마전 청와대의 모수석비서관실 비서관 후임자를 정할 때 후보군에 오른 경제부처의 국장급 간부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모 국장이 발탁됐지만 주변에서는 축하의 말보다는 ‘바람타게 됐다’며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본부 직원들이 ‘정권 끝물에 발탁돼 나가는 게 싫다’며 버티는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상당수 공무원들은 발탁은 물론 ‘직급사회 소속원의 염원’인 승진에 대해서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총리실의 한 관리관(1급)은 “과거 같으면 승진을 앞둔 과장급 이상 공무원들이 상사 등을 상대로 ‘운동’에 열을 올렸는데 최근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다른 부처도 비슷한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 듣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부이사관(3급)은 “이번에 잘 보여 승진하거나 요직에 발탁되면 잘해야 2년반이고 다음 정권에서 불이익을 볼 수 있으니 굳이 애쓸 게 없다는 게 보편적인 정서”라며 “지금 정권에 충성하는 것은 특정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한 일부 공무원들 뿐”이라고 말했다.

일부 공무원들은 아예 해외 근무나 연수를 희망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2년 정도 쉬었다 오면 ‘인사 갈등’도 겪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의 불이익’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원칙없는 정책 실망 "소신껏 일하다간 다친다"▼

요즘 정부 과천청사 공무원들 사이에 ‘스리 고’라는 말이 유행이다. ‘덮고 미루고 말리고’가 바로 ‘스리 고’. 이는 마늘협상처럼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은 일단 덮어두고, 의약분업처럼 해결책을 내놓아봐야 여론의 비판을 받기 쉬운 일은 미루고, 상하급자가 뭔가 하려고 하면 긁어부스럼 날까봐 말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관가 주변에선 ‘스리 고’ 분위기가 팽배하다. ‘웃분들’이 여론과 시민단체의 평가에만 신경을 쓰고, 일하는 공무원의 보호막이 돼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신껏 ‘작품’을 만들려다 공연히 다친다는 정서가 널리 퍼져 있는 것. 공무원들은 의료대란과 동강댐건설 백지화 등이 그런 풍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건설교통부는 시민단체와 여론에 밀려 동강댐 건설을 백지화한 후 홍수조절용 댐의 타당성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들 “(우리가 검토해 봤자) 결정은 국무조정실 수질개선기획단에서 할텐데…”라며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분위기다.

건교부 K국장은 “건교부 업무는 대부분 ‘환경파괴’란 욕을 먹게 돼 있는데 환경단체와 여론에 밀려 입안자만 골탕먹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의 한 공무원은 “정당한 절차와 합의를 거쳐 의약분업을 추진해 왔는데 이해당사자들이 반발한다고 계속 물러서면 누가 정부의 말을 믿겠느냐”며 “그러니 이해집단들이 모두 ‘대통령과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지역편중·낙하산인사 불만 "봐주기성 인사 심해요"▼

이른바 PK(부산 경남) 출신으로 경제부처에서 일하고 있는 이사관(2급) K씨는 “정권 출범 초기에는 호남 봐주기성 인사가 있더라도 ‘정권이 바뀌었으니 당분간은 불가피하겠지’라고 이해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동향끼리 만나면 ‘이제 정권 절반을 넘겼으니 2년반만 더 참자’고 서로 격려하지만 앞으로 2년반을 어떻게 더 버틸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총리실의 한 국장은 “다수 공무원들의 불만이 단지 고위공무원에서 호남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8%에서 27%로 늘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며 “문제는 각 부처의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를 특정지역 출신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총리실의 또 다른 인사는 “정부 부처 대변인들의 출신지역만 따져봐도 지역편중 인사의 정도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외교통상부의 한 심의관은 “외교관들이 비교적 지역색을 덜 타는 편이지만 출신지역에 따른 편가르기 조짐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산하단체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낙하산 인사, 편중인사 논란이 잇따르고 있다. '4·13총선'이후 정부산하단체장 자리에 특정지역 출신의 여권 공천탈락자들이 대거 임명됐으며 서울시의 경우는 특정지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요직을 차지, 타지역 출신들의 불만을 서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낮과 밤의 생활이 따로 따로인 공무원들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낮에는 소속 부서의 상사나 동료들과 어울리지만 밤이면 출신 지역별로 헤쳐 모여 이 집단이 저 집단을 비판하고 백안시하는 풍경도 흔히 눈에 띈다는 것이다.

<문철·박원재·신연수기자>full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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