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食言史]정치판 오염 '말바꾸기 50년'

  • 입력 2000년 5월 23일 18시 59분


“내 입으로는 세금이란 말도 꺼내지 않겠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전대통령은 88년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서 임기 중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후보가 된 후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임기중 재정적자가 누적되자 증세를 택했다. 92년 재선에 도전한 그는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후보로부터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고 낙선했다.

이처럼 미국의 정치사에는 ‘식언(食言)’으로 여론의 심판을 받은 정치인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정치사는 ‘거짓말의 역사’라고 할 만큼 말바꾸기가 횡행해 왔다. 그것도 아무런 심판도 받지 않은 채. 자민련 이한동(李漢東)총재가 총리로 지명받으면서 번복한 ‘DJP공조 복원’ 발언은 가장 최근의 예일 뿐이다.

말바꾸기의 역사는 제1공화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남몰래 서울을 빠져나갔으면서도 온 국민을 상대로 자신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양 ‘서울 사수’ 방송을 내보냈다. 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도 5·16쿠데타 후 수 차례 ‘민정이양’을 공약했으나 이양하지 않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87년 대선 당시 임기 2년 후 중간평가를 공약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노전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는 89년 “3당합당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이듬해 합당을 전격 선언했다.

김영삼전대통령은 92년 대선공약으로 “쌀 개방은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했으나 결과는 공약(空約)이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86년 ‘대선 불출마 선언’, 92년 ‘정계은퇴 선언’, 97년 ‘당선 후 내각제 개헌’ 공약도 대표적인 말바꾸기.

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는 “정치인의 말바꾸기는 정치불신을 넘어 정치 무관심을 가져오는 원인”이라며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 대상 선정기준에 공인(公人)으로서 한 약속을 어떻게 이행했는가도 판단기준으로 적극적인 고려 대상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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