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광영]스위스행 제지당한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동아일보

신광영 논설위원
신광영 논설위원
그가 스위스행 비행기를 탔던 지난달 9일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디데이였을 것이다. 조력자살을 도와줄 현지 기관에 이미 수많은 의료기록을 영어로 번역해 보내고, 화상 인터뷰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자발적 선택임을 확인받는 절차는 까다롭고, 비용도 수천만 원이 들었을 것이다. 60대인 그는 중증 폐섬유증 환자라고 한다. 폐가 점점 굳어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불치병이다. 그런 고통을 안고 홀로 스위스까지 가서 눈을 감겠다는 건 보통 결심이 아니다.

조력사 찬성 82%에도 멀기만 한 공론화

다만 가족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유서를 본 자녀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출국 15분 전 그를 기내에서 내리게 했다. 경찰은 그를 설득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스위스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삶의 마지막 힘을 쥐어짰을 그를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말기 암 엄마의 스위스행에 동행했던 남유하 작가의 책 제목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엄마가 조력사 전날 실제로 했던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다. “칼로 콱콱 찌르는 통증”에 시달려온 엄마는 스위스에 간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스위스에 가려면 걸을 수 있어야 한다며 허리 수술을 받았고 장시간의 비행을 견디기 위해 구토를 참아가며 링거를 맞았다. 통증을 끝낼 방법이 죽음밖에 없는 환자들에겐 조력사가 그만큼 절실하다. 그들은 자신을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날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고 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놔두지 말라는 것이다.

의료적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찬성 여론은 생각보다 높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82%가 찬성했다. 하지만 조력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사이 스위스로의 탈출구가 열려 있다 보니 일부 형편이 되는 환자들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문이 돼 가고 있다. 또 그들마저도 가족이 동행하다 자살방조죄로 처벌될까 봐 혼자 타국에서 잠드는 경우가 많고, 비행기를 못 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디데이’를 몇 달 앞당기는 상황도 생긴다.

조력사를 당장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스위스, 네덜란드, 캐나다 등 합법화된 나라들을 보면 신중히 따져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처음엔 말기 암 환자 등으로만 제한했다가 정신질환자 등으로 대상이 조금씩 확대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조력사 허용 범위가 넓어지면 자칫 중증 질환 노인들이 치료비가 없거나 자식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존엄사를 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호스피스 등 완화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기보단 쉬운 선택지로 존엄사를 남용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 때문에 조력사가 시기상조라고 선을 긋고 논의를 미룰 일은 아니다. 조력사 허용 국가들은 대부분 도입 논의가 시작된 후 20∼30년간의 사회적 숙의와 판례 축적 과정을 거쳤다. 조력사법이 지난해 하원을 통과한 프랑스는 정부 주도로 184명의 시민 토론단을 구성해 이들이 도출해낸 합의가 입법의 토대가 됐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도 하원에서 찬반이 3 대 2로 갈렸을 정도로 논쟁이 치열했다.

지금 시작해도 도입까진 한 세대 걸려

고령화 속도가 빠른 우리는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미뤄질수록 고통받는 사람이 많아질 수 있다. 조력사 허용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고 헌법재판소도 관련 소원을 심리 중이지만 사회 전반의 공론화 없이는 전향적인 단계로 나아가기 힘들다. 존엄사를 허용할지 말지, 허용한다면 어떤 기준을 둘지 지금부터 논의를 시작해도 제도화까진 한 세대가 걸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 더는 미룰 여유가 없다.

#조력사#존엄사#스위스#고령화#공론화#법제화#사회적 합의#고통 완화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