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아이의 몸은 이미 축 늘어졌지만, 어머니의 손은 오히려 더 단단히 움켜쥔다. 짐승처럼 웅크린 채 자식의 몸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여인. 미술사에서 상실의 고통을 이토록 날것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 또 있을까.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년·사진)은 기독교 미술의 ‘피에타’를 연상시키지만, 전통적 성화와는 결이 다르다. 여기엔 성모의 고요한 체념도, 구원의 약속도 없다. 오직 본능에 가까운 절규가 화면을 압도할 뿐이다. 콜비츠가 그려낸 것은 숭고한 애도가 아니라, 삶의 뿌리가 뽑혀 나간 어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림은 훗날 작가의 생을 덮칠 가혹한 복선이었다. 베를린 빈민가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의사 남편을 통해 콜비츠는 질병과 빈곤 속에 어린 생명들이 속절없이 스러지는 현실을 가까이서 목격했다. 산업화의 그늘 아래, 아이의 죽음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비극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 아들 페터를 모델로 삼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체를 스케치해 이 죽음의 포옹 장면을 완성했다. 그리고 11년 뒤, 그 아들 페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중 손자까지 전장에서 잃으며 이 판화는 작가의 운명을 예견한 비극적 작품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전쟁과 폭력은 종종 사망자 수라는 건조한 숫자로 소비된다. 그러나 콜비츠는 통계가 아닌 얼굴을 보여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아 상실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 슬픔을 품은 채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존재들 말이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은 아이가 아닌, 살아남은 자의 초상이다.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의 팔은 한 생명을 붙드는 동시에 무너진 세계를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저항처럼 보인다. 콜비츠의 그림은 단호히 묻는다. 전쟁의 대가는 과연 누구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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