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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범행 시나리오 개발에 무척 공을 들인다고 수사 경험자들은 말한다. 피해 사례들이 전파되면서 경각심이 높아져 ‘김미영 팀장’이나 ‘김민수 검사’가 나오는 식상한 스토리로는 어림없고, 정교한 디테일에 맥락이 살아있는 대본이어야 통한다는 것이다. 성공률이 높은 시나리오는 조직원용 교재로 쓰이거나 암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된다. 대본 개발자들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 정부 정책이나 국내외 이슈에도 정통하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보이스피싱 조직들에 절호의 기회였다. 상대의 절박감과 불안감을 먹고사는 그들에겐 생계난에 처한 이들이 많아져 ‘범죄 타깃’을 찾기가 손쉬웠던 것이다. 특히 정부가 국민들에게 손 내미는 타이밍을 노렸다. 재난지원금, 손실보상금, 소상공인 특별 대출 등을 받게 해준다며 연락하면 속는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보이스피싱 건수는 3만 건이 넘었고 피해액도 8000억 원에 달해 직전 5년 사이 최대였다. ▷당시 ‘재난지원금 조회’ ‘수령 기한 안내’ 같은 문자메시지가 미끼로 뿌려졌다. 그럴듯한 관공서 이름 옆 인터넷 주소(URL)를 무심코 눌렀을 때 휴대전화에 원격조종 앱이 설치됐다. 피싱범들은 피해자들의 SNS로 가족에게 접근해 돈을 송금받거나, 은행 앱에 접속해 돈을 빼가기도 했다. 피눈물을 흘린 자영업자들도 많았다. 정부 정책 발표에 맞춰 날아든 ‘선착순 지급’ ‘한도 소진’ 등의 문자에 깜박 속아 넘어갔다. 피싱범들은 싼 금리로 대출받으려면 기존 대출을 갚아야 한다고 꼬드겨 돈을 뜯어냈다. ▷21일부터 지급되는 민생 회복 소비 쿠폰도 보이스피싱범들은 ‘덫’으로 쓸 수 있다. 어떻게 받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데다 지원금도 15만∼50만 원까지 차등 지급돼 얼마나 받는지 확인해 보라며 접근해 올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 때도 지원금이 선별 지급되다 보니 수급 대상 여부를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범죄에 활용됐다. 벌써부터 민생 지원금 신청 사이트로 위장한 사례가 다수 발견됐다. 정부는 카드사나 공공기관을 사칭한 소비 쿠폰 문자가 뿌려질 것에 대비해 “URL 링크가 있다면 100% 사기”라며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요즘 같은 때 낚이지 않으려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일단 지원금을 받아 가라는 연락을 관공서가 먼저 하진 않는다. 받는 사람이 카드사 홈페이지에서 신청하거나 주민센터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 또 주민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전화로 캐묻는 공공기관도 없다. 정체불명의 앱을 깔라거나 인터넷 주소 링크를 보내줬을 때도 누르면 안 된다. 방심하다간 지원금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돈을 털릴 수 있다. 가뜩이나 힘든 사람들이 많아 지원금이 풀리는데, 사기당하지 않으려 정신까지 바짝 차려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국무회의는 용산 대통령실 2층 국무회의실에서 열리지만 12·3 비상계엄 당일 장관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모인 곳은 5층 대접견실이었다. 보통 외부 손님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곳인데 그날 밤엔 장관들이 집합했다. 윤 전 대통령이 어떤 논의 끝에 계엄을 선포했는지는 그동안 이들의 입만 바라보며 퍼즐을 맞춰 왔다. 하지만 그날 대통령실 5층엔 ‘무언의 목격자’가 있었다.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대접견실 내부와 주변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특검의 출국 금지 대상인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의 진술에는 공통점이 있다. 계엄에 반대했고, 계엄 관련 문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문이 양복 뒷주머니에 있는 걸 뒤늦게 알았다.”(한 전 총리) “받은 쪽지를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은 뒤 다음 날 열어 봤다.”(최 전 부총리) “단전 단수 내용이 적힌 쪽지를 멀리서 슬쩍 봤다.”(이 전 장관) 당시 윤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 계획에 크게 놀라며 만류했다면서도 관련 문서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접견실 CCTV가 남긴 기록은 달랐다. 계엄 당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던 한 전 총리의 진술과 달리 CCTV에는 두 사람이 국무회의 전 대화하는 모습이 찍혔다고 한다. 한 전 총리가 대접견실과 연결된 윤 전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간 뒤 손에 문건을 든 채 나오는 장면이 포착됐다는 보도도 있다. 그는 계엄 관련 문건에 서명한 적이 없다고도 했는데 그가 계엄 이틀 뒤 작성된 계엄 선포문에 서명했다가 며칠 뒤 폐기하도록 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날 밤 대접견실 회의 참석자들은 계엄 이후 입장이 둘로 갈렸다. 윤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국무회의에 절차적 하자가 없고 일부가 계엄에 동의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 전 총리 등은 회의가 요식 행위였고 계엄에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며 거리를 두려 한다. 계엄을 주도한 윤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다른 국무위원들의 진술 역시 객관적 증거와 배치된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선거사무소를 도청한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증거는 대통령 전화기 속 자동 녹음 장치였다. 녹음 기록이 공개되자 스스로 물러났다. 이번에 확보된 대통령실 CCTV 영상은 일부 국무위원들에겐 빠져나갈 수 없는 ‘스모킹 건’이 될 수도 있다. 영상이 3개월마다 덮어쓰기 방식으로 지워지는데 경찰이 대통령경호처에 자료 보전을 요청하고 집요하게 압박해 손에 쥐었다고 한다.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모른다. 국무위원들은 그날 밤 대통령실 5층에서 벌어진 일을 이제라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임신부는 지하철 열차 바닥에 넘어지면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샌들 두 짝도 모두 벗겨졌다. 몇 초 전만 해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그였다. 주변의 비명 소리에 황급히 발걸음을 떼다 바닥에 흥건하던 휘발유에 미끄러졌다. 쓰러진 임신부 뒤로 4, 5m의 ‘휘발유 길’이 나 있었다. 그 끝에 한 60대 남성이 있었다. 그는 뿌려놓은 휘발유 위로 불붙인 옷을 던졌다. 시뻘건 불길이 순식간에 뻗어 나가 샌들과 휴대폰을 집어삼켰다. 임신부가 맨발로 일어나 피한 지 2, 3초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달 31일 방화 사건이 난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폐쇄회로(CC)TV에 담긴 당시 상황이다. 토요일 아침이던 그 시각 승객들은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거나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화범 원모 씨가 가방에서 노란 휘발유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을 때 이를 알아본 승객은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익숙한 일상 공간에서 난데없이 휘발유가 흩뿌려졌고 이내 불길이 치솟았다. ▷“이혼 소송 결과에 화가 나 공론화시키고 싶었다”는 게 원 씨가 밝힌 방화 이유다. 사회적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이 많은 폐쇄 공간인 지하철을 고른 것이다. 자신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신변 정리도 미리 해놨다. 범행 후 열차에 쓰러져 있던 원 씨는 승객들 도움으로 구조됐는데 손에 그을음이 많은 걸 유심히 본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항의하는 승객에게 그는 “안 죽었잖아”라고 태연히 답했다고 한다. ▷그는 8량인 지하철 열차 가운데인 4번 칸에 불을 질렀다. 불과 연기는 양쪽으로 번져 나갔다. CCTV에는 승객들이 혼비백산하며 4번 칸에서부터 옆 칸으로 옮겨가 1번 칸에 가득 모인 상태에서 시커먼 연기가 덮쳐 오는 장면도 있다. 불을 낸 시점도 열차가 깊은 지하터널 구간을 지날 때였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열차 내장재가 불에 안 타는 소재로 바뀌었고, 승객들이 침착하게 비상 개폐장치로 문을 연 뒤 어두운 선로를 따라 줄을 서서 대피하는 등 현명하게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대형 참사로 번질 뻔했다. ▷검찰은 원 씨를 기소하며 방화와 함께 승객 160명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192명이 희생된 대구 지하철 사건에선 살인죄가 아닌 방화치사죄로 범인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땐 불을 붙이려던 범인에게 승객들이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다 ‘펑’ 소리와 함께 불바다가 돼 살인의 고의까지 인정되진 않았다. 이번 사건은 다르다. 원 씨는 승객들을 향해 휘발유를 뿌리고 임신부가 넘어져 있는데도 불을 질렀다. 승객들이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법원 판결이 확실한 교훈을 남겨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성매매가 음지로 숨어들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가 업주들의 손님 가려 받기라고 한다. 성 매수자로 가장한 경찰이 함정 단속을 해올 수 있어 이를 어떻게 피할지가 업주들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또 오피스텔 같은 일상 공간에서 성매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소란을 피울 ‘진상 고객’이라면 미리 걸러내려고 한다. 그래서 성 매수자들의 신상 정보는 업주들이 돈 주고 살 만큼 값진 정보라고 한다. ▷성 매수자 개인정보를 수집해 업주들과 공유하는 유료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이 앱을 열면 고객의 연락처는 물론이고 이용 횟수, 평판, 성적 취향까지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최근 경찰이 검거한 일당은 전국의 성매매 업주 2500명을 이 앱에 가입시키고 매월 10만 원가량 ‘구독료’를 받았다. 업주들은 영업용 휴대전화로 예약을 받으면서 손님들 정보를 저장해 놓는데 이 앱을 설치하면 그런 정보들이 자동으로 앱 서버에 전송돼 업주들끼리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활용해 ‘경찰’ ‘진상’ 등의 닉네임이 달린 전화번호로 예약 문의가 오면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성매매가 집창촌 등 오프라인으로 이뤄지던 시절엔 업주들이 고객 정보를 알 길이 없었다. 요즘엔 성매매 사이트 등을 통한 예약제로 운영되면서 성 매수 남성들의 휴대전화 번호나 SNS 아이디 등 정보 수집이 수월해졌다. 일부 업주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오가던 정보들을 디지털 형태로 대량 수집해 손쉽게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문제의 앱을 운영한 일당이 2년간 수집한 성 매수자 연락처는 400만 개에 이르고 범죄 수익도 46억 원에 달한다. ▷성 매수자 정보는 업주들끼리만 돌려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범죄 목적으로 재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특히 눈독을 들인다고 한다. 이들의 전화번호나 아이디 등을 활용해 직장이나 지인들을 파악한 뒤 성매매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거액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성매매 장소에 몰카를 설치해 찍은 영상을 보여주며 수백 명에게 돈을 뜯은 사례도 있다. 요즘은 남자 친구나 남편의 성매매 여부를 확인해 주고 돈을 받는 ‘유흥 탐정’ 업체들도 난립하고 있다. 그런 일을 당해도 떳떳하게 신고하지 못할 것을 노려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성매매를 하려면 자신의 정보가 암시장에 유통되며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걸 각오해야 하는 시대다. 불법 수집된 개인정보가 범죄에 활용돼 피해를 봤다면 일종의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성매매 자체가 불법인 이상 두둔해 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 매수자들은 단속에 안 걸렸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새어나간 개인정보가 두고두고 약점으로 남아 언제든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영국 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 국장은 ‘C’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1909년 임명된 초대 국장의 이름인 맨스필드 스미스커밍(Mansfield Smith-Cumming)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서명할 때 자신의 성 뒷글자 커밍의 ‘C’ 한 글자만 썼고, 그게 국장을 뜻하는 약어로 굳어졌다. 영화 ‘007’에서도 이를 본떠 MI6 국장의 코드명을 ‘M’으로 지었다. MI6 국장은 영국 관가에서 유일하게 공문서에 녹색 펜을 쓰는 공직자이기도 하다. 이 역시 맨스필드가 녹색 잉크로 서명하던 습관에서 시작됐다.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보수적 기풍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MI6에서 116년 역사상 첫 여성 국장이 임명됐다. 올해 47세인 블레이즈 메트러웰리다. 여성이 국장에 오를 것이란 전망은 지난달부터 나왔다. 차기 국장 후보 3명이 모두 여성이었다. 그중 바버라 우드워드 유엔 주재 영국대사가 유력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중국 대사를 지낸 경력 탓에 영국에선 “중국에 우호적”이란 지적이, 중국에선 “영국이 심은 스파이”란 비판이 나왔다. 결국 MI6 내부 인사인 메트러웰리가 기회를 잡았다. ▷그의 직전 보직은 요원들이 쓸 최첨단 장비를 만드는 기술 개발 부서장(코드명 Q)이다. 여기서 ‘Q’는 군대에서 무기 보급을 담당하는 병참감(Quartermaster)의 약자다. ‘007’에서도 ‘Q’는 제임스 본드에게 기관총이 숨겨진 고급 세단, 폭발하는 펜 등 기상천외한 장비를 건네면서 사용법을 시연하는 역할로 자주 등장한다. ▷여배우 주디 덴치가 ‘007’에서 MI6 국장을 연기했지만 실제로 여성이 첩보기관 수장이 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스라엘 모사드, 러시아 FSB(옛 KGB)에는 없고, 미국 CIA에선 트럼프 1기 때 임명된 지나 해스펠이 유일하다. 이런 남성 중심적인 문화는 오히려 여성 스파이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한다. 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돼 상대를 속이고 설득하는 데 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공감 능력이 좋고, 편안하게 정보 제공자를 무장 해제시키는 데다 냉철함까지 겸비했다는 평가가 많다. 영국 의회는 “정보기관들이 역량을 키우려면 중년 여성과 엄마들을 많이 채용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현대 정보전은 과거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N개의 얼굴’이 요구된다. 동맹국이 과거의 동맹이 아니고, 안보는 대치해도 경제는 손잡으며 교묘히 경계를 넘나들어야 한다. 모사드가 이란군 수뇌부를 한곳으로 유인해 암살하고, 삐삐 동시 폭발로 헤즈볼라를 붕괴시켰듯 상대의 허를 찌르는 섬세한 작전도 필요하다.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직 문화로는 잘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을 걷어내는 건 유능한 정보기관이 되기 위해서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기술이 아무리 첨단화돼도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게 사람의 피다. 우리 몸에 4000∼5000mL 정도(성인 기준) 흐르는 혈액은 회당 320∼400mL인 헌혈을 통해서만 보충할 수 있다. 피는 모자란다고 외국에서 수입할 수도 없다. 보존 기간이 며칠에 불과해 국가 간 운송이 어려울뿐더러 감염병 전파 우려 탓에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혈액의 상업적 거래를 금하고 있어 어떻게든 국내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 ▷근로 정년, 계급 정년처럼 헌혈에도 정년이 있다. 현재는 만 69세다. 70세부터는 헌혈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헌혈 정년’이 1971년 처음 생길 당시엔 64세였는데 그땐 기대수명이 62.7세였다. 건강해도 나이 탓에 헌혈을 못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9년에 헌혈 정년이 69세로 연장되기는 했지만 기대수명(84.5세)이 크게 늘어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요즘 70대 중에는 “아직 팔팔한데 왜 헌혈을 못 하게 하느냐”는 이들이 많다. ▷지금의 혈액 수급은 헌혈자를 나이 기준으로 딱 잘라 돌려보낼 만큼 한가하지 않다. 저출산으로 헌혈할 사람은 줄고, 노인이 많아져 수혈받을 사람은 늘고 있다. 헌혈 건수는 10년 전 정점(308만 건)을 찍은 뒤 차차 줄어 지난해 285만 건에 그쳤다. 2050년이 되면 헌혈은 지금보다 46% 줄고, 수혈은 39%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있다. ‘헌혈 역군’이던 2030세대의 감소분을 5060세대가 겨우 메우는 형국인데 정년 헌혈이 이대로 유지되면 혈액 재고가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정년은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장치다. 근로 정년이 있어야 청년층이 취업할 수 있고, 계급 정년이 있어야 인사 적체를 해소하고 조직 내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헌혈 정년은 둬야 할 이유가 모호하다. 고령자가 헌혈하면 어지럼증이나 혈압 문제가 생길 수 있다지만 이는 나이보단 개인 건강에 달린 문제다. 오히려 헌혈이 가능한 몸을 만들기 위해 건강을 더 챙기게 되고, 헌혈할 때마다 혈액검사도 해줘 도움이 된다는 노인들이 많다. 연령과 혈액 건강의 상관관계 역시 의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 고령자의 피를 수혈받는다고 문제 될 건 없단 얘기다.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헌혈 정년을 두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헌혈 정년 완화를 위한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헌혈 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20∼30년 꾸준히 헌혈을 하다 나이 제한에 걸린 고령자들은 “혈액이 부족하다면서 왜 막느냐. 건강이 괜찮다는 것만 확인되면 계속 헌혈하고 싶다”며 아쉬워한다고 한다. 남의 생명을 위해 내 것을 내어주겠다는 선의에는 정년이 없는데 칼로 무 자르듯 헌혈자를 은퇴시키는 제도라면 바꿀 필요가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폐쇄회로(CC)TV 하나 없는 뒷골목에서 강력 사건이 빈번하듯 범죄는 벌어질 만한 데서 벌어진다. 얻을 이익은 큰데 걸릴 위험은 작은 곳이 범죄 현장이 된다. 유명인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려 조회수를 올리는 악성 유튜버들이 많아진 것도 ‘고수익 저위험’ 생태계 탓이 크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 유튜버들은 명예훼손을 반복해도 소송을 피해 왔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소장을 보낼 주소가 있어야 하고, 수사를 하려면 가해자가 특정돼야 하는데 신원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상정보를 아는 구글은 외국 기업이라 우리 공권력이 미치지 않고, 본사가 있는 미국은 명예훼손을 처벌하지 않아 공조 수사도 어렵다. 이런 사각지대에서 악성 유튜버들은 수백만 구독자들을 끌어모아 억대 수입을 올려왔다.美 법원 설득해 유튜버 신원 기어이 확인 유튜브 채널 ‘탈덕수용소’의 운영자 박모 씨(37)는 그렇게 번 돈으로 집을 샀다. 걸그룹 가수 장원영 씨 등 연예인들 사생활에 대한 허위 악소문을 내고 인성, 외모를 모욕하는 방송을 2년 넘게 하면서 그가 번 수익은 드러난 것만 2억 원이 넘는다. 조회수 수익 외에, 월 회비가 최대 60만 원인 유료 회원까지 모집했다. 박 씨는 피해자들의 공개 경고에도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듯 얼굴을 가리고 방송을 계속했다. 구글이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 자신했던 모양인데 헛된 믿음이었다. 장 씨 측 변호사의 추적은 집요했다. 구글을 열어젖힐 방법을 찾다가 미 법원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활용하게 됐다. 재판 전 소송 당사자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절차인데 사건 관련 제3자에게도 정보 요청이 가능했다. 이를 근거로 구글에 박 씨의 신상정보를 요구하자 미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준 것이다. 처음엔 IP 주소만 던져주던 구글과 몇 차례 줄다리기를 하며 이름과 주소를 받아냈다. 이마저 허위 정보가 아닐지 조마조마했지만 주민등록초본까지 확인한 끝에 박 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해 법정에 나타난 박 씨는 온몸을 검은 옷과 모자로 꽁꽁 가리고 마스크까지 쓰고 왔다. 카메라 세례에 대비해 우산까지 챙겨 들었다. 피해자들의 사생활은 거짓으로 버무려 퍼트리더니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 그는 판사 앞에서 “대중의 알권리를 위한 공익적 방송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인터넷 댓글 등에서 본 내용을 사실인 줄 알고 말한 것일 뿐 비방할 목적은 없었다고도 했다. 인격 살인을 하며 거액을 벌어 온 그가 알권리와 공익을 운운하는 것이 법원에서 통할 리 없었다.“알권리 목적” 변명했지만 결국 패가망신 형사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그는 최근 민사재판에서도 장 씨와 소속사에 각각 5000만 원을 배상하란 판결을 받았다. 범죄 수익금 2억여 원은 추징됐고, 그가 사들였던 부동산도 가압류에 걸렸다. 장 씨 외에 다른 연예인이 피해자인 재판도 줄줄이 진행 중이어서 그가 유튜브로 번 수익을 토해 내는 건 물론, 추가로 수억 원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탈덕수용소 사건은 악성 유튜버들의 범죄 생태계에 균열을 낸 첫 사례다. 이를 계기로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혐오 장사를 해온 ‘뻑가’ 등 다른 유튜버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신원이 특정돼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다. 유명인을 주로 노리는 이런 명예훼손 가해자들을 패가망신 수준으로 단죄해야 일반인에게까지 피해가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유튜브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글로벌 플랫폼을 통한 신종 범죄가 늘고 있긴 하지만 얼마 전 텔레그램이 수사기관에 범죄자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듯 가해자들이 숨을 곳도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어도 피해자들이 용기 내 싸워 볼 만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트럼프 행정부와 일전을 치르고 있는 하버드대의 졸업식. 연단에 오른 앨런 가버 총장은 “절대적 확신과 의도적 무지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그 동전은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대가가 따른다”고 했다. 미국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절대적 확신을 갖고,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미국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해왔는지 모른 척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잘못된 확신은 진정한 잠재력을 앗아간다”고도 했다. ▷맹목적 확신에 빠진 사람은 현실을 자신의 믿음에 맞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다. 확증 편향의 덫에 그렇게 빠진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유학생 비자 발급을 중단하면서 “미 명문대에 유학생이 너무 많아 미국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댄 것도 미중 경쟁에서 고전하는 현 상황의 핑계를 엉뚱한 데서 찾은 것이다. 가버 총장은 “세상은 ‘편안한 사고’를 하라고 우리를 유혹한다”는 말로 이 문제를 꼬집었다. “자신의 가정은 정당하고, 주장은 진실하며, 의견과 관점은 타당하다고 쉽게 믿게 만드는 사고의 습관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다양성이 파괴되고, 개방성이 무너지면 ‘편안한 사고’에 잠식되기 쉽다. 하버드대를 포함한 미 대학들이 외국인 유학생에게 포용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번영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최고의 인재들이 자유롭고 차별 없는 연구 환경에서 혁신을 일궈낸 결과인데 이 성공 모델이 ‘반유대주의’를 명분 삼은 트럼프의 횡포로 위기를 맞고 있다. 하버드대는 트럼프의 연방 자금 지원 중단에 이은 외국인 유학생 등록 금지 결정을 막아달라며 연방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외국인 유학생이 없는 하버드대는 하버드가 아니다’라고 썼다.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하버드대가 미국의 퇴행을 막는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절대적 확신과 의도적 무지는 실패하는 지도자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나만 옳다는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실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겸손, 공감, 관대함, 통찰을 잃고 만다”는 가버 총장의 말대로 더 좋은 리더가 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셈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라는 정치적 폭주를 감행한 것도 그런 사례다.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척결밖엔 답이 없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실정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대해선 애써 귀를 닫은 결과였다. 그런 지도자를 겪고 나서 치른 이번 대선 역시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와 혐오로 얼룩졌다. 반성과 성찰 없는 확신의 정치를 멈춰 세우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몸살을 앓게 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생각할수록 황당한 양당 대선 캠프의 외부 영입 사례들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건희 여사 라인으로 알려진 김대남 전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을 국민참여본부 부본부장으로 임명했다가 결국 무산됐다. 국민의힘에선 5·18민주화운동 진압을 주도한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을 상임고문에 위촉한 뒤 취소하는 소동을 빚었다.황당한 양당의 김대남 정호용 영입 소동김 전 행정관이 왜 이재명 후보로 갈아타려 했는지는 그가 지난해 총선 탈락 후 ‘서울의 소리’ 기자와 나눴던 통화 녹취에 드러나 있다. “어디 공기업이라도 가서 연봉 잘 받으면서 다음 대권에 누가 나올 건지 예의주시해서 다시 올라탄다든지 그런 방법을 찾아야지.” 건설업계 출신인 그는 3년 전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 캠프 조직국장으로 활동하다 대통령실에 입성했다. 지난해 총선 낙마 후엔 “어디 공기업이라도 가서”란 말대로 금융권 경력이 없음에도 연봉 3억 원의 SGI서울보증 상임감사직을 꿰찼다. 이를 비판했던 민주당이 이번엔 이 후보 쪽으로 올라타려는 그에게 부본부장을 달아줬다. 김 전 행정관은 캠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하루 만에 돌변해 김문수 지지를 선언했는데 민주당이 영입하려던 사람의 공직관이 이런 수준이었다.국민의힘이 위촉했던 정 전 장관은 12·12 군사반란과 5·18 진압에 가담해 징역 7년을 확정받은 인물이다. 김 후보 캠프는 윤 전 대통령 변호인으로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해온 석동현 변호사도 합류시켰다. 비상계엄으로 대통령이 파면돼 치러지는 선거란 점을 외면한 황당한 일이다.큰 선거에선 지지층을 넓히는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 단, 명분과 원칙이 있어야 정치적 상징성이 있고 국민 통합 효과를 발휘한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공화당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버락 오바마 지지 선언을 끌어낸 적이 있다. 파월 전 장관은 이라크전을 옹호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공화당 우경화에 반대한다며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오바마 집권 후에도 공직을 맡지 않았다.여야의 이번 대선 캠프에는 전현직 교수들과 법조인, 관료, 언론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정책 제안서를 만들어 양쪽 캠프에 보내고, 자문단에 앞다퉈 이름을 올리는 교수들이 요즘도 많다. 줄만 잘 서면 정권 창출 후 한자리 꿰찰 수 있다는 출세 공식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해외에도 학자 출신이 현실 정치에 족적을 남긴 사례가 있지만 우리처럼 선거 때마다 수많은 교수들이 이곳저곳 기웃대며 정치권에 ‘보험’을 드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대선 캠프가 정치 철새들의 도래지로 변질된 건 정당이 가치 공동체가 아닌 이익 공동체가 돼버린 자화상을 보여준다. 정당 간의 이념적 정체성이 모호하고, 인물 중심에 승자 독식 선거가 치러지다 보니 언제든 점퍼를 바꿔 입을 준비가 된 부나방들이 몰린다. 정당들 역시 한 표라도 득이 될 것 같으면 일단 이기고 보자며 검증 없이 세 불리기에 매달린다. 얼마 전 김 후보 캠프에서 교사 수천 명에게 ‘교육특보로 임명한다’는 문자메시지를 임명장과 함께 무차별 발송했는데 캠프 운영이 이렇게 허술하면 철새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한자리 달라” “이기고 보자”의 결탁유권자들은 이런 문제를 알아도 상대 정당이라고 더 나을 게 없어 선택을 바꾸지 못한다. 그 결과 집권의 과실은 정치 철새들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약 1만 개의 자리를 받으려 대기표를 뽑아 든 이들이 정권 주변을 에워싼다. 3년 전 윤 전 대통령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그가 파면된 뒤에도 공공기관 낙하산으로 기어이 내려올 정도로 이들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이런 생태계가 유지되는 한 정치는 나아지기 힘들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2일 제주의 한 중학교 창고에서 숨진 채 발견된 40대 교사는 사흘 전 제자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OO아, 항상 네 편에 누님이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담임 입장에선 학교 열심히 나왔으면 좋겠다. 담배 못 끊겠으면 줄였으면 좋겠다. 잘 자고 내일 보자.’ 중3 담임이던 이 교사는 제자가 결석을 반복하고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자 정학을 막아 보려 병원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두 달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끝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사건의 발단은 교사가 올 3월 초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며 제자를 혼내면서부터다. 학생의 가족은 이때 폭언이 있었다며 교육청에 아동학대 취지로 민원을 냈다. 유족에 따르면 학생 가족으로부터 고인의 휴대전화로 항의 전화가 많이 왔고, 하루 10통 이상 온 날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그런 전화가 올 때면 나가서 받았다”고도 했다. 사망 전날에도 그 제자에게 ‘아프면 병원 들러서 학교 오세요’라고 문자를 남겼던 교사는 가족과 제자한테 미안하단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교사의 분향소에는 졸업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한 제자는 “엇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주시고, 남아서 공부하고 있으면 짜장면 사주시던 선생님”이라고 했다. ▷‘교사 괴롭힘’은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학부모가 자녀의 담임 교사 앞으로 “(당신의) 딸에게 별일 없길 바란다면 편지는 끝까지 읽는 게 좋을 것”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협박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자녀가 모르는 문제를 칠판에 풀게 해 망신을 줬다면서 교사를 고소한 일도 있다. 전북의 한 초등학교에선 학부모 2명이 10회가 넘는 민형사 소송을 내 담임이 6번이나 교체되기도 했다. ▷교사가 악성 민원에 노출되지 않도록 학교에 민원 대응팀을 두는 등 ‘교권 보호 4법’이 지난해 시행되긴 했다. 하지만 학교 측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고, 문제 학생에 대한 제재도 거의 없어 교사들은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괴롭힘을 당한 선생님들은 스스로 교사 자질이 있는지 자책하면서 위축되는 경향이 있어 외부에 알리는 걸 힘들어한다. 이번에 숨진 제주 40대 교사 역시 학교와 집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민원이 없는 완벽한 교사다’란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초임 교사일 땐 잘못한 제자들을 혼내다가 민원이 많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학부모 상담 때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고, 학생들이 딴짓해도 내버려둔 덕분이란 내용이다. 요즘 교사 5명 중 3명이 사직을 고민하고, 교대 합격선이 하락하는 건 이런 무기력감의 여파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야 좋은 교사로 평가받는 교실에선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는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병든 뒤에 고치려면 늦고, 건강할 때 즐겁게 지키자는 게 요즘 MZ세대들이다. 이들에게 특히 중요한 건 ‘즐겁게’다. 코 막고 녹즙 마시기처럼 인내와 의지, ‘노오력’이 요구되는 기존 방식보다는 즐길 수 있는 운동과 식이요법이어야 한다. 그래야 작심삼일 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살게 될 세대가 상처뿐인 유병 장수를 피하려는 나름의 전략이다. 오래도록 돌봐야 할 건강, 즐겁게 챙기자는 뜻에서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라는 말도 나왔다. ▷이들이 건강과 즐거움을 동시에 잡는 방법이 ‘함께’ 하기다. 같이 러닝하고 등산하고, 식단도 공유하는 소모임이 많다. 혼자 달리면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되지만 함께 달리면 숨도 덜 차고 덜 지루하다. 그래서 더 자주, 더 멀리 뛰게 된다. SNS로 운동 기록을 공유하고, 패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이런 것들이 운동할 동기를 북돋워 준다. 제로 칼로리에 각종 단백질 음료 등 식욕과 공존이 가능한 다이어트 식품도 많아졌다. 건강 관리를 장기적 가치투자로 보는 MZ세대들은 이런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건강이 최고의 재테크인 것은 나이가 들수록 분명해진다. 아프면 병원비, 간병비가 많이 들고 일을 할 수 없어 소득도 줄어든다. 병원에 묶여 있으면 사회적 관계도 서서히 끊어진다.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3.5세, 건강수명은 66.3세다. 평균 17년은 병과 함께 노후를 보낸다. 이 시기에 얼마나 덜 아프고, 더 움직이느냐에 노년의 행복이 달려 있다. 나이 든 몸을 지탱해주는 근육 1kg은 1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어 근육만큼 든든한 ‘연금’이 없다고도 한다. ▷요즘엔 고령자들도 건강 재테크를 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노인들이 함께 생활체육을 즐기는 서울시의 ‘7학년 교실’이나 실버 요가, 저염식 요리 교실처럼 일상에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이들이 스스로 건강을 점검하거나 노화로 인한 장애를 줄일 수 있도록 ‘에이징 테크’도 발전하고 있다. 손목 밴드 하나로 혈압과 심박수를 실시간 확인하고, 스마트폰 앱으로 수면 중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시대다. 인공지능(AI)이 질병 징후를 포착해 경고도 해준다. 노인들에겐 아직 낯선 기술이지만 갈수록 쓰기가 쉬워질 것이다.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이처럼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하다가 큰 병을 얻는 부모들이 우리 주변엔 많았다. 요즘엔 의료비 부담과 노노(老老) 돌봄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이 신경 쓸까 봐 내색하지 않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헬시 플레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이들에게 절실해 보인다. 아프기 전에 미리미리 건강 자산을 쌓아둘 수 있도록 고령자들이 즐길 수 있는 건강 관리법이 더 다채로워져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019년 3월 22일 오후 11시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야구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을 에워쌌다. 한밤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었다. 태국행 비행기를 타려던 그를 출입국 직원들이 막아선 것이다. 당시 김 전 차관은 피의자 신분은 아니었다. 별장 성접대를 받은 의혹으로 그를 수사했던 검찰이 이미 두 차례 무혐의 처리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재수사 의지를 밝히자 그는 몰래 출국을 시도했고, 덜미를 잡혔다. ▷세 번째 수사에서 그는 결국 기소됐다. 하지만 앞서 수사했던 검찰이 봐주기·뭉개기로 6년을 허송세월한 대가가 컸다. 특수강간 등 혐의의 증거가 휘발되거나 공소시효가 지나버렸다. 1심 법원은 성접대와 금품수수를 인정하면서도 대가성이 불분명하다며 김 전 차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에선 뇌물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긴 했다. 하지만 법원이 인정한 건 사건 본류인 건설업자 윤중천 씨와의 유착이 아닌, 다른 업자에게서 받은 뇌물이었다. 이마저 대법원에서 “검사의 회유에 따른 거짓 진술 가능성이 있다”며 2심을 뒤집고 무죄를 확정했다. ▷최근 법원은 김 전 차관에게 1억3000만 원의 형사보상을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그가 2심 실형 선고 등으로 14개월간 수감됐던 것에 대한 보상이다. 형사보상은 무죄가 확정된 피고인에게 구금에 따른 손해와 변호사 비용 등을 보상해주는 제도다. 검찰 간부 시절 성접대와 금품을 받았던 고위 공직자가 국가 형사절차의 피해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 전 차관에 대한 전반기 수사가 부실·축소 수사였다면, 문재인 정부 이후 후반기에는 정권 입맛에 맞춘 무리한 수사가 이뤄졌다. 불법 출국금지 논란도 그래서 빚어졌다. 청와대 비서관과 법무부 간부, 현직 검사가 김 전 차관의 도피성 출국을 막기 위해 출금 요청서에 허위 내용까지 기재해 수사를 받았다. 김 전 차관은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로 대우받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전원은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 전 차관 관련 사건은 의혹이 제기된 2013년부터 10년 넘게 숱한 수사와 재판이 이뤄졌지만 유죄 판결이 난 건 건설업자 윤 씨뿐이다. 사법 시스템이 그렇게 낭비된 것도 모자라 김 전 차관에게 국민 세금으로 1억 원이 넘는 형사보상금까지 쥐여 주게 됐다. 애초에 검찰이 김 전 차관을 제때 제대로 수사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윤 씨를 담당했던 재판부는 “(검찰 수사가) 대부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좌절됐다. 검찰이 2013년 적절히 공소권을 행사했다면 피고인이 적절한 죄목으로 법정에 섰을 것”이라며 부실 늑장 수사를 질타했다. 수사기관의 직무 유기는 우리 사회에 이토록 값비싼 비용을 떠안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90년 독일 통일 후 구(舊)동독 주민들 중에는 화병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번영을 기대했건만 ‘2등 시민’으로 전락해 차별과 실직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이 만연했다. 당시 독일 학계에선 이 현상을 ‘외상 후 울분 장애(PTED)’라고 설명했다. 전쟁이나 재난 피해자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생기듯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취급을 거듭 당하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수시로 치밀어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큰일을 겪은 사회가 제때 상처를 수습하지 않으면 이런 집단적 울분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인은 절반 이상이 울화통을 안고 산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지난달 성인 남녀 1500명을 조사한 결과다. 54.9%가 장기적 울분 상태로 나타났다. 지난해 9월 조사 때보다 약 6%포인트 오른 수치다. 눈에 띄는 건 울분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한 응답자들의 답변이다.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85.5%), ‘정치와 정당의 부패’(85.2%)를 가장 많이 꼽았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 어수선한 대선이 국민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결과로 보인다. ▷울분에는 배신당했다는 감정이 녹아 있다. 상식과 공정에 대한 믿음이 현실에서 자꾸 부정당할 때, 신념과 현실의 괴리감이 클 때 사람들은 울분을 느낀다. “이게 나라냐”란 냉소가 그럴 때 나온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난데없는 계엄 선포는 국민들에게 ‘외상 후 울분 장애’ 수준의 충격을 준 사건이다. 적어도 국가 지도자라면 법과 상식에 따를 것이란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윤 전 대통령이 잘못을 축소하려 탄핵 법정에서 반복했던 궤변과 뻔뻔한 언행은 국민의 화를 더 돋웠다. ▷사회에 울분이 넘치면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킨다. 체제 불신과 정치 혐오가 커지기 때문이다. 울분에 찬 상태에선 합리적 대안을 찾기보단 감정적 대립으로 빠지기 쉽다. 서울대 연구팀이 2018년에 처음 ‘한국 사회 울분 조사’를 할 때만 해도 ‘정부 비리’ ‘정치 부패’는 울분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 중 5위 정도였는데 이후 해마다 순위가 올랐다. 우리 정치가 갈수록 양극화되고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는 현 상황과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울분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위험한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 일부 백인들의 울분을 자양분 삼아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우리의 이번 대선은 윤 전 대통령이 남긴 깊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계기가 돼야 하지만 한쪽은 후보 단일화, 한쪽은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에만 매몰돼 유권자들의 울분 지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울화통 터지는 정치에도 국민들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냉정한 심판을 하는 것 외엔 달리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작동하던 것들이 일제히 멈춰 선 건 월요일이던 28일 낮 12시 반쯤이었다. 달리던 전철은 지하터널 한복판에 서버렸고, 덜컹하며 멈춘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혔다. 착륙하던 비행기는 관제탑과 교신이 끊겨 공항 상공을 맴돌았다. 도로엔 신호등이 꺼져 교차로마다 차량들이 뒤엉켰다. 카드 결제 단말기가 고장 나 손님들은 현금을 찾아 헤맸고, 냉동 기능을 상실한 진열대 속 아이스크림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휴대전화는 인터넷이 끊겨 무용지물이 됐다. 그마저 배터리가 닳아버리자 낯선 이들끼리 전화 한 통을 사정했다. ▷대규모 정전으로 혼돈에 빠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의 풍경이다. 전기가 꺼진 사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행기가 안 떠 발이 묶인 관광객들은 호텔을 예약하려 해도 스마트폰이 먹통이라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이동 수단이 자가용뿐이어서 주유소는 기름을 채우려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로변에는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흔드는 히치하이커들이 길게 늘어섰다. ▷스페인에서 15GW의 전력 발전량이 갑자기 손실된 게 정전의 발단이다. 스페인 하루 발전량의 60%에 달하는 양이다. 스페인과 전력망을 공유하는 포르투갈도 덩달아 피해를 봤다. 전력 손실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이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을 통한 전력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에 맞게 전력망과 저장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게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일부 지역 전력망이 복구되곤 있지만 완전 복구까진 일주일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반도를 멈춰 세운 이번 정전은 21세기의 국가도 단번에 19세기로 후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기가 없으면 병원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문을 닫고, 수도 가스 등 기본 인프라가 무력화된다. 운송망이 끊기는 건 한 나라의 혈액순환이 멎는 것과 같다. 정유공장도 돌릴 수 없어 이 상태가 며칠 더 이어지면 연료가 바닥난 차들이 하나둘 길가에 버려지고, 텅 빈 거리만 남게 된다. 정부가 재난 정보를 알리려 해도 인터넷과 TV가 먹통이라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불안한 사람들 틈새로 괴소문이나 가짜 정보가 스며든다. ▷우리에겐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있다.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불, 언제든 열리는 인터넷, 시간표에 맞춰 도착하는 지하철, 카드를 긁으면 들려오는 결제 완료음…. 이 모든 것은 전기가 끊기는 순간 곧바로 사라진다. 스마트폰 없인 하루도 버티기 힘들 만큼 ‘연결 사회’가 된 지금은 전기에 더 깊이 의존하고 있다. 갈수록 활용도가 커지는 인공지능(AI)도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다. 우리의 문명이 깨지기 쉬운 얇은 껍질 위에 아슬아슬 얹혀 있다는 걸 이번 스페인 대정전이 일깨워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8일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전날 한 대학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헌재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데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얘기였다. “설득에는 시간이 걸린다.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가 있다. 급한 사람이 늦은 사람을 기다려야지, 늦은 사람이 급한 사람을 어떻게 기다리겠나.”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재판관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과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 권한대행은 “통합을 호소해 보자는 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했다. ▷재판관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의견 차가 있었는지 아직 확인된 건 없다. 헌재 안팎에서 야당의 잘못을 결정문에 어느 정도 수위로 넣을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는데 문 권한대행의 강연에도 그렇게 해석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정치권의 관용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는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요구되는 절제는 야당에도 요구된다. 양쪽에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다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느냐”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야당 중 어느 한쪽에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 야당의 잇단 탄핵안 발의 등 일방적 행태를 적시한 것은 그런 논의의 결과로 보인다.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고 한 대목이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야당 역시 정치적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해 설득력을 높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더디게 가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만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막을 수 있다는 걸 헌재가 보여줬다. ▷문 권한대행이 퇴임사에서 대화와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수용하지만 ‘대인논증(對人論證)’ 같은 비난은 지양하자고 했다. 대인논증이란 사람의 경력이나 사상 등을 문제 삼아 근거 없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태는 재판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일 뿐 아니라 법관들 간의, 법원과 국민 간의 합리적인 대화를 가로막는다. ▷대부분 판사 출신인 헌재 재판관의 구성을 다양화하자는 그의 제안도 비슷한 취지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재판관들이 폭넓게 대화하고 차이를 좁혀야만 판사들만의 집단사고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에선 변호사나 학자, 행정부 공무원, 정치인이 헌재 재판관이 되는 사례가 흔하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헌재는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법원이다. 다양한 재판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그들 사이에서도 관용과 절제가 발휘될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법관은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판사는 판결 쓰는 사람’이란 말도 있다. 판사가 판결문만 안 쓰면 판사 할 만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쓰기 어렵단 얘기다. 누가 옳고 그른지 반드시 가려내야 하고, 그 이유를 낱낱이 밝혀야 하며, 탈고한다고 끝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하는 효력이 그때부터 발효되는 게 판결문이다. 법관은 선고를 하고 나면 그 판결이 합당한지를 따지는 여론의 법정,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된다. 판결문이 읽기 어렵고 딱딱한 것은 판사들이 느끼는 이런 중압감 탓도 크다. 그렇다고 외계어 같은 어휘와 번역 투의 장문들이 판결문에 난무하는 게 정당화되진 않는다. 판결문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혼나야 할 사람이 왜 혼나는지 이해할 수 있고, 그 판례를 적용받을 국민들도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판결문이 어려우면 법관이 상식과 동떨어진 판단을 해도 난해한 문장들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법률가들이 “법의 언어는 그 법에 따라야 하는 사람들 귀에 외국어로 들려선 안 된다”(법철학자 빌링스 러니드 핸드), “독자가 판결문의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한다면 실패한 판결문”(전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같은 말들을 신조로 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쉽고 공감 가는 ‘법의 언어’ 보여준 헌재 잘 쓴 판결문이 꼭 유려한 문체의 명문을 뜻하는 건 아니다. 상식에 맞는 논리로 쉽고 명쾌하게 썼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을 두고 ‘고개가 끄덕여졌다’는 반응이 많은 것은 잘 쓴 판결문에 가깝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화제가 된 문장이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신속 결의할 수 있었던 건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 임무 수행 덕분’이란 대목이다. 그간 윤 전 대통령은 계엄이 몇 시간 만에 해제돼 아무 일도 없었고, 경고성·호소용 계엄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에 대해 헌재가 계엄이 좌절됐을 뿐 윤 전 대통령 스스로 멈춘 게 아니라고 꼬집은 것이다. 헌재가 12·3 계엄의 수많은 장면 중 그날 밤 국회에서 군인들을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 멈칫멈칫하며 몸싸움을 피하는 장병들에게 주목한 것은 헌법의 시선이 국민의 눈높이와 일치한다는 걸 보여준다.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면서 그 어떤 법 기술로도 희석시킬 수 없는 반(反)헌법의 증거가 바로 그 장면이다. 문형배 헌재소장이 그 대목을 낭독할 때 많은 국민이 감명을 받은 건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가치와 상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헌법의 언어로 확인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좋은 판결문은 복종 대신 승복 끌어내 재판관들은 윤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 사실을 조목조목 따질 때도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썼다.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해 사회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 등의 대목에선 쉬운 말로 헌법의 가치를 일깨웠다. 또 ‘윤 전 대통령이 야당의 전횡을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일부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국회를 배제 대상으로 삼는 것은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라고 지적해 헌법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헌재 결정 이후 우려했던 불복 움직임이 벌어지지 않은 건 재판관 전원일치 판결과 함께, 결정문이 국민의 보편적 상식을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풀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판결에 시비를 걸려면 난해하고 비상식적인 주장을 펼 수밖에 없는데 그걸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잘 쓴 판결문은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복종 대신 승복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재난이나 전쟁이 벌어진 참사 현장은 훗날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9·11테러 현장인 미국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 비무장지대(DMZ) 같은 곳들이 있다. 역사적 고난을 물리적 증거로 남기는 동시에, 그때의 비극을 이겨냈다는 걸 보여주는 장소들이다. ▷얼마 전까지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집회에는 외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시위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해외 언론도 현장 생중계까지 하며 한국의 집회 문화를 조명했다. 참가자들이 K팝을 떼창하고 야광봉을 흔드는 모습에 K팝 콘서트를 연상시킨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에게 서울 종로와 여의도 등 집회 현장을 구경시켜 준다는 관광 가이드들까지 등장했다. 우리 민주주의에 재난과도 같았던 계엄 사태로 빚어진 시위가 현재 진행형의 다크 투어리즘 상품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올 2월까지 석 달간 입국한 해외 여행객이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계엄 충격으로 원화 가치가 떨어져 한국 여행이 저렴해지기도 했지만 탄핵 집회에 대한 호기심이 영향을 줬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의 시위 현장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SNS로 많이 퍼졌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택시 기사에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 가달라고 한다거나, 서울 도심 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들이 ‘집회 뷰(view)’가 나오는 방을 선호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계엄 사태로 인한 전례 없는 불안과 혼돈이 외국인들에게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탄핵 찬반으로 갈려 과격하게 목청을 높이는 국론 분열의 속살이 외국인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 법원이나 재판관들을 공격하자는 일부 시위대의 선동은 한국의 국격을 의심케 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 대부분의 시위대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승복해 자진 해산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외국인들에게 싸움 구경만 시켜주는 민주주의의 흑역사를 쓸 수도 있었다. ▷탄핵 집회가 자주 열린 서울 안국동과 광화문 일대는 우리 민주주의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북촌, 경복궁 등 유명 관광지들과 붙어 있어 외국인들의 시선이 늘 향해 있다. 이런 접근성 때문에 탄핵 집회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다행히 시위 참가자들이 평화롭게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더는 다크 투어리즘 상품으로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탄핵 집회는 뜨겁고 요란했지만, 뒤끝은 없었던 쿨한 이벤트로 기억됐으면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폭정과 독재 연구의 대가인 미국 예일대 석학 3명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학 정책에 반발해 이민 길에 오른다. 새로 둥지를 틀 곳은 트럼프가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무시하는 캐나다의 명문 토론토대다. 이런 선택을 한 티머시 스나이더는 ‘폭정’(2017년)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2019년) 등 저서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역사학자다. 그는 트럼프를 아돌프 히틀러에 빗대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해 왔다. 예일대 동료인 그의 부인, 유명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도 함께 떠난다. 스탠리는 “독재로 기울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이들이 ‘학문적 망명’을 결심한 건 미 유수의 대학들이 트럼프의 압박에 학문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컬럼비아대가 교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허용한 것을 문제 삼아 반(反)유대주의를 부추긴다며 4억 달러(약 5900억 원)의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학 측은 집회 중 마스크 금지, 시위 학생 징계 등 방안을 내놓으며 항복했다. 하버드대, 펜실베이니아대 등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관련 정책을 없애지 않으면 연방 예산을 끊겠다는 트럼프의 겁박에 비상이 걸렸다. ▷미 연구자들의 엑소더스(대탈출) 조짐은 학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최근 네이처지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5%가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예산 절감을 명분으로 연구비를 대폭 삭감한 충격이 크다고 한다.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중단 위기에 처했고, 적대적 이민 정책까지 겹쳐 연구실을 지탱해온 해외 인재들을 데려오기도 깐깐해졌다. ▷미국의 과학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시즘과 유대인 탄압이 심했던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망명해온 학자들 덕에 획기적으로 도약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 같은 과학자들이 미 기술 패권의 토대가 됐다. 요즘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건 인도계인 순다르 피차이(구글), 사티아 나델라(마이크로소프트), 대만계인 젠슨 황(엔비디아), 리사 쑤(AMD) 등 이민자 출신 CEO들이다. 또 풀브라이트 등 장학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인재들을 빨아들인 게 국제개발처(USAID)인데 트럼프는 ‘국제 봉사에 왜 돈을 쓰느냐’며 이 기구를 없애려 한다. ▷해외 대학들은 지금이 미국 인재들을 데려올 기회라고 보고 있다. 토론토대뿐 아니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이 이들에게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겠다며 손짓하고 있다. 중국도 미국이 뒤로 빠진 틈을 타 개도국 인재들에게 두둑한 장학금을 내걸었다. 트럼프가 일부 열성 지지층만 바라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사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는 28일 발생한 규모 7.7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대도시의 더없이 취약한 구조 인프라가 이번 지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너진 건물 틈새로 “살려달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하지만 잔해를 치울 장비가 없어 맨손으로 구조한다고 한다. 도시에 몇 안 되는 병원들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흙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들것에 실려 나온 한 임신부는 거리에 누운 채 출산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폭염까지 겹쳐 생존자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미얀마의 이 같은 아비규환은 비단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4년 전 군부 쿠데타와 그에 따른 오랜 내전으로 이미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군부와 저항세력 간 무력 충돌로 의료·구호 시설은 파괴됐고, 교통·통신 등 기반시설도 마비됐다.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군사 정권에서 일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떠났다. 게다가 저항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달레이 주변 지역은 군부 정권이 각종 물자 지원도 끊은 상황이었다. 군부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이 지역을 계속 공습해 왔고 심지어 지진이 나던 날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2021년 총선 패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4년간 군부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한다. 미얀마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차단해온 군부는 대지진이 나자 “모든 국가의 도움을 받겠다”며 국제사회에 처음 손을 벌렸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단 얘기다. 원자폭탄 334개에 맞먹는 강진으로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만 16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수 있다는 분석(미국 지질조사국)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얀마를 돕겠다”고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미국의 해외 구호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면서 원조 사업을 대폭 축소한 장본인이 트럼프다.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지원 공백이 현실화되는 첫 사례가 미얀마 지진일 거란 우려가 높다. 국제사회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군부가 통치 지역 외에는 원조품을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미얀마의 거의 절반은 민주 진영 임시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최악의 시기에 강타한 초강력 지진으로 구조대와 의료진이 절실한 만달레이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넘쳐난다고 한다. 총으로는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 힘겹게 구조 활동을 벌이는 시민들은 외신에 “여긴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한다. 재난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를 더 가혹하게 뒤흔든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지난해 12월 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의결 직후 윤석열 대통령이 찾은 곳은 용산 합동참모본부 지하에 있는 결심지원실이다. 그곳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 등 군 간부들이 있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시 대통령은 지체 없이 해제한다’는 계엄법에 따른다면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계엄 해제와 함께 군 철수를 지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윤 대통령 발언을 접한 방첩사령부 간부가 공수처에 한 진술은 그와 거리가 멀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소름 돋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국회의원부터 잡으라고 했는데”라며 소리를 질렀다.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는 김 전 장관의 말에는 “그건 핑계다. 국회에서 의결했어도 새벽에 비상계엄을 재선포하면 된다”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지켜본 방첩사 요원이 단체대화방에 이 내용을 공유해줘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합참 간부도 윤 대통령이 “그러게, 잡으라고 했잖아요” “다시 걸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공수처에 진술했다. ▷윤 대통령의 결심지원실 발언은 그가 계엄 당시 군경 지휘관들에게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왜 그리 반복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윤 대통령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에게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인원을 끄집어내라”고 했다. 조지호 경찰청장에겐 6차례나 국회의원 체포를 닦달했는데 이 중 2번은 국회의 계엄해제안이 통과된 이후였다고 한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도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회를 장악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계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지시가 나왔을까. ▷윤 대통령은 결심지원실에 와서 몇 분 뒤 김 전 장관과 박 전 사령관만 남겨 얘기를 나눴다. 세 사람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 회의 직후 곽 전 사령관에게 중앙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계엄 설계에 관여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도 통화하며 대응 방안을 상의했다. 이때까지도 계엄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발표한 건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한 지 3시간 반이 지나서였다. 합참 결심지원실에서 벌어진 상황에 비춰 보면 “국회를 무력화할 의사가 없는 2시간짜리 경고성 계엄”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3시간 반 동안의 행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하는 이유다. 윤 대통령이 그날 밤 합참에서 ‘의원부터 잡아놓고, 다시 계엄을 선포하면 된다’고 말한 게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 돋는 일”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