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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지만 늘어난 건 ‘수명’이지 ‘건강’이 아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7세로 높아졌지만 건강하게 사는 기간은 72년에 머물러 있다. 평균적으로 72세 이후부턴 11년 이상 병치레를 하다 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계속 늘어나는 기대 수명과 달리, 건강 수명은 제자리걸음이어서 둘의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다. 몸은 골골하는데 노후만 길어지는 장수는 마냥 축복으로만 보기 어렵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사는 게 화두가 되면서 최근 주목받는 용어가 ‘롱제비티(longevity)’다. 무작정 장수하기보단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을 뜻한다. ‘저속노화’나 ‘항노화’와도 비슷한 말이다. 불로초를 찾거나 소년의 피를 마시는 등 미신에 가까운 고대 황제들의 회춘 요법과는 다르다. 운동과 식단, 수면처럼 의학적으로 검증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강 관리를 조기에 시작하면 황혼기에 활력 있는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령화가 전 세계적 현상이다 보니 ‘롱제비티’는 산업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다. 비만치료제 열풍이 단적인 사례다. 노화를 부르는 대표적 만성 질환인 비만을 치료하는 게 글로벌 제약사들의 최대 승부처가 됐다. 일라이 릴리의 비만치료제 마운자로는 매출에서 부동의 1위였던 항암제를 제치고 올 1분기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아마존, 구글, 오픈AI 같은 빅테크들도 개인별 생체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을 예방하는 등 건강 수명을 늘리는 기술에 수조 원을 투자하고 있다. ▷최근 영국은 2009년생부터 담배 구입을 평생 금지하기로 했다. 미래 세대부턴 노후 건강의 최대 위협인 흡연을 원천 차단해 의료 재정 파탄을 막겠다는 전략이다. 독일이 설탕세 도입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처럼 건강 수명은 각국 정부의 정책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유병장수 하는 인구가 많아지면 의료비와 돌봄 부담이 커지는 건 물론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연령도 낮아져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우리 정부 역시 2030년까지 건강 수명을 73.3세로 끌어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려면 노인 환자를 돌보는 것 못지않게 아프기 전에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장기 대책이 나와야 한다. ▷9일부터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헬스쇼에선 노후 건강을 지키는 새로운 트렌드가 소개됐다. AI로 심장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앱, 무릎이나 허리가 안 좋아도 등산 골프 러닝 같은 야외 활동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입는 로봇’ 등이 주목받았다. 늙어서도 삶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려면 시대 변화에 맞게 나만의 관리법을 업데이트하는 ‘건강 지능(HQ)’도 필요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몸에 투자하는 것만큼 수익률이 좋은 노후 대비도 드물다. 노년의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70∼80년대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우주소년 아톰’의 원작자는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불린 데즈카 오사무(1928∼1989)다. 40년간 700여 편을 남겼고, 아톰 외에도 ‘불새’ ‘블랙잭’ 등 히트작이 즐비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대를 연 선구자란 평가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어려서부터 그의 작품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거장인 데즈카도 어릴 적엔 또래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왜소한 체구에 유난히 두꺼운 테의 안경을 쓴 그를 친구들은 “60m 안경”이라고 놀리곤 했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60m 밖에서부터 그의 안경이 보여서 붙게 된 별명이라고 한다. 그가 중고교에 다닌 1940년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때였다. 교실도 군국주의로 물들었던 시기다. 데즈카는 귀퉁이에서 만화를 그리다 교사에게 한가한 짓을 한다며 얻어맞고,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의대에 진학했지만 미련 없이 만화가의 길을 택했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은 데즈카에게 ‘해방’의 날이었다. 이듬해 18세의 나이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만화의 세계에도 평화가 왔다”고 인사말에 썼다. ‘아톰’ 역시 일본을 패망시킨 원자폭탄에서 주인공 이름(Atom·원자)을 따왔다. 그가 그린 아톰은 자신의 힘을 약자를 돕는 데 쓰는 로봇 소년이다. 데즈카는 후배 만화가들에게 “만화를 그릴 때 인권만은 건드려선 안 된다. 특히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깔보진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만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그지만 일본에서 사실상 금서 취급을 당한 작품이 있다.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을 그린 1970년 발표작 ‘긴 동굴’이다. 2차 대전 때 땅굴 공사에 강제 동원돼 학대와 멸시를 당했던 조선인이 전쟁 후 일본에서 출신을 숨기고 출세하지만 결국 뿌리 깊은 차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주간지에만 실린 뒤 자취를 감췄고, 여러 종의 데즈카 만화 전집에 한 번도 포함되지 못했다. 당시는 강제 징용 같은 과거사 관련 책이 나오면 일본 우익들이 출판사에 테러를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다. ▷반세기 넘게 빛을 보지 못했던 ‘긴 동굴’은 최근에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일본 호세이대 출판사가 2일 단행본으로 재출간했다.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말자는 데즈카의 목소리도 되살아나게 됐다. 그는 ‘긴 동굴’을 내놓기 4년 전인 1966년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은 군국주의에 희생되고 민족 역사를 짓밟힌 채 강제로 일본에 오게 됐다. 편견과 경멸 속에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일본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 우린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미 정부는 무기 제조에 쓸 금속이 부족해지자 동전을 대신할 5센트짜리 지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남북전쟁의 영웅 윌리엄 클라크가 정해졌지만 이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성이 같았던 당시 재무부 화폐국장이 지폐에 자기 얼굴을 새겨서 ‘셀프 발행’을 한 것이다. “나라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고, 의회는 재발을 막겠다며 곧바로 입법에 나섰다. 미국 지폐엔 오직 사망한 인물의 얼굴만 넣을 수 있다고 법에 못을 박았다. ▷이후 160여 년간 지켜져 온 원칙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건국 250주년을 기념해 트럼프 얼굴이 들어간 250달러 지폐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지폐 시안에는 트럼프가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한 혐의로 기소돼 교도소에 출석했을 때 정면을 노려보며 찍은 머그샷이 새겨져 있다. 45대, 47대 대통령인 트럼프를 뜻하는 4547 숫자도 보인다. 트럼프는 지폐 도안을 그린 영국인 화가와 연락하며 직접 의견을 냈다고 한다. ▷재무부 내 트럼프 측근 간부들이 이 작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지폐에 넣는 건 현행법 위반이다. 지폐 종류도 1, 2, 5, 10, 20, 50, 100달러로 법에 정해져 있다. ‘트럼프 250달러’를 발행하려면 법부터 바꿔야 하는데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현직 대통령이 그려진 250달러를 발행하는 데 부적절한 점은 없다”며 믿기 힘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와중에 바른말을 한 사람이 퍼트리샤 솔리메네 재무부 조폐인쇄국장이었다. 그는 법적 절차적 한계가 많다며 반대했다가 최근 경질됐다. 반대 이유에 대해선 “나 개인과 조직의 가치를 희생시킬 순 없었다”는 입장을 냈다. 공직자로서 당연한 처신이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이런 직언을 했다간 무사하기 힘든가 보다. 트럼프의 수사 중단 요구에 불응한 연방수사국(FBI) 국장, 불법 이민 단속 당국에 납세자 정보 제공을 거부한 국세청장, 백신 음모론에 반대한 질병통제예방센터 국장이 이미 줄줄이 해임됐다. ▷미국 지폐에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굵직한 업적을 세운 전직 대통령들이 주로 새겨져 있다. 트럼프가 벌써부터 자기 얼굴을 넣으려고 하는 건 미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조바심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정이 아닌 민주 국가에서 현직 지도자가 지폐에 자기 얼굴을 넣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독재 국가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북한의 김일성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자칫 이런 독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뿐이라고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트럼프 정부에선 씨가 말라가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에겐 중요한 선택을 고민할 109분의 시간이 있었다. 소방청장에게 언론사 단전·단수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할지 말지가 그에게 던져진 숙제였다. 심사숙고 끝에 그런 지시를 해선 안 되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소방청장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그날 오후 9시 48분경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109분 뒤인 오후 11시 37분 소방에 전달했다.이상민의 109분, 한덕수의 91분 그는 일개 연락관이 아닌 장관이었다. 그것도 계엄 선포나 해제를 건의할 수 있는 주무 장관이었다. 15년 법관 경력에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그였다. 요건에 맞지 않는 불법 계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였다. 윤 전 대통령의 위험천만한 지시를 따를지 말지 스스로 판단할 권한과 시간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란 세력과 한배를 타기로 선택한 것이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도 계엄에 맞설 91분의 시간이 있었다. 한 전 총리는 그날 밤 윤 전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 계획을 듣고 ‘멘붕’에 빠졌다고 했다. 그 정도로 황당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법도 한데 그가 선택한 대응책은 국무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을 불러 반대 의견을 모아 보려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한 전 총리가 계엄에 명확히 반대했다고 증언한 국무위원은 한 명도 없다. “50년 공직 인생을 이렇게 끝내려 하느냐”는 최상목 전 부총리의 비난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엄 계획을 알게 된 후 실제 선포되기까지 91분간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더구나 자신의 건의로 열린 국무회의가 대통령의 일방적 계엄 통보로 끝났음에도 참석자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을 오히려 거들었다. 한 전 총리의 1, 2심 재판부 모두 당시 국무회의가 계엄에 합법적 외피를 씌우려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판결한 이유다. 박 전 장관 역시 내란을 거부할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계엄이 선포되자 바로 법무부로 이동하며 차 안에서 간부들에게 전화 지시를 했다. 윤 전 대통령 호출을 받고 용산에 들어간 지 2시간이 훌쩍 지난 때였다. 계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울고검장까지 지낸 법률가인 그가 불법 계엄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간부들에게 출국금지팀을 비상대기시키고, 구치소 수용 여력을 파악하도록 했다. 계엄 합동수사본부에 검사 파견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계엄령 위반으로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잡혀 올 것에 대비한 후속 조치였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박 전 장관은 “(계엄 선포가)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지시를 내리던 시각은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 표결을 위해 국회로 모이고 국민들도 거리로 나오던 때였다. ‘엎질러진’ 상황이 되지 않도록 막으려는 필사적 노력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계엄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뒷받침하는 행태를 보였다. 다음 달 9일 선고되는 그의 1심 판결에서 이에 대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엎질러진 물? 맞설 생각은 있었나 이들 세 국무위원이 당시 반대했더라도 계엄 선포는 막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반(反)국가적 결정에 국무위원으로서 어떻게 대응할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할 권한과 시간이 있었다. 박 전 장관은 최근 결심공판에서 6년 차 검사가 작심 발언과 함께 징역 20년을 구형하자 “내 인생을 깡그리 부정하는 후배 검사의 말에 참담함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공직 인생을 깡그리 부정한 건 그날 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민이 아닌 권력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그들 자신일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여사님 업체’라고 불렸던 21그램은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 용산 관저 공사를 맡기 전까진 영세 인테리어업체였다. 연 매출 20억∼30억 원에 가정집이나 사무실 리모델링을 주로 했다고 한다. 증축이나 구조 보강 같은 전문 공사는 면허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 업체가 이미 정부의 관저 공사 의뢰를 받고 설계까지 마친 굴지의 종합건설사를 밀어내고 공사를 따냈다. 그 건설사 간부는 21그램 대표가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종합건설업 면허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하자 공사에서 배제됐다고 법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시작된 관저 공사는 졸속을 거듭했다. 공사 면허가 없는 21그램은 급하게 하도급 업체를 섭외해 일을 맡겼다. 공사에 동원된 18곳 중 15곳이 무자격 업체였다. 대통령실은 이런 불법 도급을 방관했다. 작업이 끝난 뒤엔 준공검사도 안 하고 ‘완료’ 서류에 서명했다. 관저 공사를 담당한 김오진 당시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은 21그램을 누가 추천했는지에 대해 ‘윤핵관’으로 불린 윤한홍 의원으로부터 “김 여사가 고른 업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2차 종합특검에 진술했다. ▷21그램은 공사비로 41억 원을 요구했다. 대통령실이 관저 공사비로 편성해 놓은 14억 원의 3배에 달했다. 정상적인 공사라면 시작 전 계약서를 쓰고 정해진 예산에 맞게 공사가 진행돼야 하는데 관저 공사는 그와 반대였다. 하도급 업체들이 일단 공사를 해놓으면 나중에 그에 맞춰 도면을 그리고 주먹구구식으로 비용 명세를 작성했다고 한다. 21그램이 제시한 41억 원이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 투명하게 집행되는지는 애초에 따지지 않았다. ▷행정안전부가 애꿎게 그 유탄을 맞았다. 대통령실은 행안부를 압박해 모자란 공사비를 대도록 했다. “전용할 예산이 없다. 차라리 인사 조치를 해달라”는 담당 공무원들의 반발에도 결국 강행됐다. 공사비를 증액해야 한다면 대통령실이 정식 예산을 받아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특검은 당시 대통령실이 관저 내 반려동물 수영장이나 다다미방 등 호화 시설을 설치한 게 드러날까 봐 행안부 예산을 끌어다 쓴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용산 이전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일단 예산을 낮춰 잡았다가 야금야금 늘린 것이란 시각도 있다. ▷특혜와 탈법으로 얼룩진 관저 공사는 이후 윤석열 정부 실패의 예고편이었다. 1급 보안시설을 짓는 중대한 국가사업이 영부인 입김에 휘둘리고, 공직자들은 그에 끌려다니거나 출세를 위해 편승했다.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되던 날, 21그램 대표는 자신의 아내에게 “정권이 바뀌면 박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근 특검이 관저 예산 불법 전용에 관여한 혐의로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한 걸 보면 틀리지 않은 예측이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인분 45만 원, 소변 15만 원, 비방 유인물 50만 원.’ 돈 받고 앙갚음을 해주는 보복 대행 업체들이 요즘 내건다는 범죄 차림표다. 식당 메뉴판 꾸미듯 범죄별로 가격을 매겨 고객들을 찾아 나선다. 문자 폭탄은 건당 5000원, SNS 악플은 50건당 30만 원, 회사에 성인용품을 보내는 배송 테러는 ‘물건값+10만 원’이라는 식이다. 보이스피싱한 돈의 일부를 송금해 사기 의심 계좌로 만드는 수법으로 피해자의 계좌를 동결시키는 ‘통장 묶기’도 단골 메뉴인데, 3개월 묶기는 40만 원, 6개월은 80만 원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고 싶다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듯 범죄를 주문하는 게 가능해진 세상이다. 보복 대행 업체들은 범행을 사주한 게 들통날 것을 걱정하는 의뢰인들에게 “100% 안전”을 강조한다. 범행 주문은 텔레그램으로 받고, 결제는 코인으로 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공대’라고 불리는 범죄 실행조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를 쓰고, 수사에 대비한 대본까지 암기시킨다고 홍보하는 업체도 있다. 하지만 보안이 철저하다는 주장과 달리 업체들은 보복 피해자에게 의뢰인의 정보를 주면서 ‘역보복’을 부추겨 양쪽에서 수익을 낸다. ▷보복 대행 업체들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면서 사적 복수를 고민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 측이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도 자주 활용된다. 올 초 투자 리딩방에 참가했다가 수천만 원을 사기당한 피해자는 사기꾼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은행에 요청했다가 이를 풀라는 협박과 함께 인분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복 대행업을 겸업하며 피해자가 경찰 신고를 취하하도록 압박하는 사례도 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