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허용[횡설수설/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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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형법을 제정할 때도 낙태죄 찬반 논쟁이 있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들어있던 낙태 처벌 조항 삭제를 포함한 입법안을 제출했는데 이유 중 하나가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6·25 동란으로 인구가 줄어든 데다 독립국으로서 주권을 유지하려면 인구가 4000만 명은 돼야 한다’는 출산장려 논리가 우세했다. 논란을 거쳐 낙태죄 조항은 유지됐다.

▷1973년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할 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운동이 한창이었다. 낙태죄를 유지하되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혈족 간 임신,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산아제한용’이라는 해석이 나왔고 실제로 불법 낙태 시술로 처벌받는 사례도 적었다. 이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낙태죄가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 와중에 폐지된 건 아이러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형법의 낙태 처벌 규정에 대해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낙태 수술하다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제기한 소송이지만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여성주의 운동이 아니었으면 66년간 존속된 낙태죄가 폐지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어떤 이유로 낙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임신 24주까지 현행 허용 사유에 추가해 사회 경제적인 사정이 있을 때도 낙태가 가능하다.

▷유럽은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은 197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원칙적으로 낙태를 허용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불법 시술로 인한 사망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구트마허연구소가 1990∼2014년 92개국의 낙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의 낙태율은 감소했지만 그렇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낙태율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실적 결과가 없었다면 종교계가 지적하듯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합법의 지위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매년 5만 건의 낙태 시술이 이뤄지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10∼20배 많다는 것이 의료계의 추산이다. 지난해 10대들의 성관계 경험률은 5.9%로 증가세이고 10대의 출산 건수도 매년 1000건이 넘는다. 낙태죄 처벌 여부보다 내실 있는 성교육이 낙태를 줄인다는 것이 낙태를 앞서 허용해온 나라들의 경험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피할 만큼 분별 있고, 임신하면 혼자서라도 걱정 없이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라야 한다. 낙태죄 폐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낙태죄 찬반 논쟁#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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