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횡설수설/이진영]“올 수능 n수생이 34%”… 28년 만에 최고 찍나요즘 대입 수험생들에게 재수는 필수다. 고교를 ‘4년제’라 하고 사수, 오수생도 많아 삼수생부터는 ‘장수생’으로 묶어 부른다. 대학 1학기만 다니고 수능을 준비하는 ‘반수생’, 군대에서 수능 공부하는 ‘군수생’도 있다. 수능 지원자 중 20%대를 차지하던 n수생 비중이 올해는 34.1%로 28년 만에 최고치를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종로학원 추산에 따르면 11월 16일 치러지는 수능 지원자 49만1700명 중 재학생은 역대 최저인 32만4200명이고, 졸업생은 16만7500명으로 1996학년도(37.3%) 이후 최고 비율이다. 지난해 n수생보다 2만5000명 늘었다. 의대 쏠림 현상에 첨단 학과 신설 및 증원, 킬러 문항 빠진 ‘물수능’ 기대감 때문이다. 통합 수능으로 대학 간판 보고 문과에 갔다 실망한 이과생들, 이과생들에게 밀려난 문과생들도 대거 n수 대열에 합류했다. ▷수능 성적만 보는 정시는 n수생 합격자 비중이 더 높다. 최근 4년간 SKY 3개 대학 정시 합격자 중 n수생이 61.2%였다. 이과생들은 ‘의치한약수’에 들어가려고, 문과생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숭세단, 광명상가…’의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n수를 감수한다. 의대는 더 심하다. 최근 4년간 의대 정시 합격자 가운데 78%가 n수생이다. 합격자의 92%가 n수생인 의대도 있다. 요즘 의대 가려면 고교 3년은 내신에만 매달리고, 재수로 수능 성적 끌어올려 수시 최저기준을 맞추거나 아예 수능으로 진학하는 게 공식이 됐다. ▷일타강사들의 인강으로 재수의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대부분 ‘재종’(재수종합학원)을 다니고 드물게는 ‘독재’(독학재수학원)를 찾는다. 통학형 재종은 월 200만 원, 기숙형 재종은 월 400만 원이다. 9개월간 1800만∼3600만 원이 드는 셈이다. 급식비, 교재비, 모의고사비, 특강비는 별도다. 자녀가 재수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징역 9개월에 벌금 4000만 원 선고받는 심정”이 된다고 한다. 올해 n수생 16만7500명이 1인당 1800만 원씩 들였다면 총 3조 원이 넘는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점까지 감안하면 n수의 사회경제적 비용은 훨씬 늘어나게 된다. ▷n수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은 “외환위기가 오든 코로나가 오든 흔들림 없는 안정된 삶”을 위해 n수를 한다. 의사면 제일 좋고, 비정규직 아닌 정규직, 중소기업 아닌 대기업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 2년이고 3년이고 책상에 붙어 앉아 똑같은 문제를 풀면서 허리와 목 디스크, 섭식장애와 만성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실력이 느는 공부가 아니라 학벌을 위한 공부다. 개인으로도 사회 전체로도 긍정적 가치를 찾기 힘든 사회적 병리 현상이 n수 열풍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2023-08-07 23:51 
[횡설수설/이진영]“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동물은 이유 없이 죽이지 않는다. 인간의 살인에도 대개는 이유가 있다. 돈 때문에,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들어 이득 없는 ‘쾌락으로서의 살인’ ‘살인을 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이 등장했다는 것이 살인의 역사를 탐구해 온 영국 문명비평가 콜린 윌슨의 진단이다. 서울 신림동 묻지 마 살인도 지극히 현대적인 살인이다. ▷신림동 사건의 피의자 조모 씨(33)는 21일 오후 2시경 신림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남자 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중 20대 남성이 숨졌는데 이 남성이 쓰러진 후로도 10차례 넘게 찔렀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조 씨와 모르는 사이였고, 범행 동기가 없으며, 수법이 잔인하다는 점 모두 묻지 마 범죄의 전형이다. 조 씨는 “분노에 차” 범행을 저질렀는데 분노를 표출할 장소로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한 점도 묻지 마 범죄의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묻지 마 범죄의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현실 불만형이다. 주로 여름에 거리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범행 후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둘째 정신과 치료 경험이 있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정신장애형이다. 셋째 만성 분노형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해해서, 분풀이를 위해,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다. 세 유형 모두 부모와 불화하고, 경미한 폭행 사건 같은 전조를 보이며,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5월 과외 중개 앱에서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 사건은 묻지 마 살인이면서도 범죄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고, 흉기로 110회 넘게 찌르는 잔혹성을 보였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점은 다른 묻지 마 범죄자와 같지만, 여성이고 전과가 없으며 ‘광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집이라는 ‘밀실’을 범행 장소로 고른 점은 일반적 유형과 거리가 멀다. 전과자의 재범 방지 등 기존의 묻지 마 범죄 분석에 근거한 예방 정책은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동기 없는 살인이 대두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개인이 귀한 존재라는 자각이 생겨난 동시에 지나친 경쟁과 양극화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분노감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전통 가족제도 해체 후 헐거워진 인간관계도 분노의 압력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 조 씨는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정유정은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했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국적 불문 동기 없는 살인자들의 공통된 범행 동기다. 윌슨이 말한 ‘문명의 과부하에 짓눌린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여 해법을 찾아야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2023-07-23 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