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차별을 깨뜨리는 공정한 절차의 위력[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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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3개월 전 일본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둘째 딸이 눈물을 흘리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같은 반 남학생 A와 옆 반 B, C 등 세 명이 수시로 “한국인”이라고 지칭한 뒤 놀린다는 것이다. A는 조별 토의 시간에 “한국인은 입 닫아”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그는 적지 않게 놀라며 “명백한 차별 발언이다. A B C 모두 따끔하게 혼을 내겠다”고 말했다. 실제 세 명은 혼이 난 모양이었고, 딸아이는 더 이상 같은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12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의회를 통과한 조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 조례는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 발언을 뜻하는 헤이트스피치를 한 사람에게 최대 50만 엔(약 55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혐오 발언 처벌 규정이 명기된 첫 조례였다.

일본은 2016년 ‘타 민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을 만들었다. 선언적 내용 중심이었고, 처벌 조항은 없었지만 한국인에 대한 살벌한 구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는 줄어들었다. 올해 최악의 한일관계 속에서 도쿄 신오쿠보의 한인 매장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대규모 우익 시위가 사라진 영향이 컸다.

하지만 우익 시위는 점점 교묘해지고 음성화되고 있다. 특정 인종을 공격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조선인 죽어라” 대신 “한국과 단교하라”고 표현을 바꾸는 식이다. 법에 처벌 규정이 없다는 한계가 지속적으로 지적됐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가와사키시가 처벌 규정을 담은 조례를 만든 것은 의미가 크다. 조례에 따르면 도로나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확성기나 전단을 사용해 외국인에게 차별적 말이나 행동을 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첫 위반자에게는 조례 준수 ‘권고’를 하고, 다시 위반하면 ‘명령’하며, 또다시 위반하면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한다.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50만 엔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물론 권고, 명령, 고발 등 3단계를 거쳐야 최종 처벌을 받기 때문에 실효성이 높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관련법 제정 이후 오사카시, 고베시, 도쿄도가 각각 신상공개 등 내용을 담은 헤이트스피치 금지 조례를 만들었지만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와사키시의 조례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 효과가 클 것이라고 믿는다. 가와사키시의 결정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재일교포 3세 최강이자 씨(46·여·가와사키시 거주)는 “시가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최 씨의 눈물을 본 뒤에 다시 딸에게 “한국인이라고 놀리는 동급생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었다. 딸은 “B와 C는 안 놀리는데 A는 여전히 놀린다”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A가 놀릴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A를 혼내주고 자신에게 귓속말로 “A는 원래 질이 나쁜 애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친구도 있다는 거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담담하게 대처하는 딸을 보며 인정(人情)의 힘이 느껴졌다. 아마도 잘못된 행동을 명백히 지적하는 공정한 절차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가와사키시 의회#혐오 발언#우익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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