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단백질 구조까지 관찰… 한국 미래 밝힐 ‘빛’ 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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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4세대 방사광 가속기 시험가동

고인수 4세대 가속기 구축단장(왼쪽)과 연구원들이 시험 가동을 시작한 14일 가속기 제어실에 모였다. 4세대 가속기에는 현재 연구원 70여 명이 근무한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고인수 4세대 가속기 구축단장(왼쪽)과 연구원들이 시험 가동을 시작한 14일 가속기 제어실에 모였다. 4세대 가속기에는 현재 연구원 70여 명이 근무한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위한 듬직한 기둥 역할을 할 겁니다.”

14일 경북 포항시 포스텍(포항공대) 내 4세대 방사광 가속기. 이날 정부의 승인을 거쳐 가속기가 시험 가동을 시작했다. 고인수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구축단장(62·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은 “과학자로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가슴 뛴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국민도 자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3, 4세대 가속기 구축을 주도했다.

○ 신(神)의 비밀을 보는 빛줄기


물이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생긴다는 사실은 상식이지만 산소와 수소가 붙는 ‘순간’은 인류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속도로 반응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 순간적 반응 속도는 1000조분의 1초 정도로 추정된다. 4세대 가속기 덕분에 신의 비밀(신비) 같은 이런 반응도 관찰과 촬영이 가능해졌다.

양질의 빛을 만드는 공장인 가속기는 1970, 80년대의 1, 2세대를 거쳐 3세대 시대를 열었다. 4세대는 미국 스탠퍼드대(2009년), 일본 이화학연구소(2012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우리나라가 구축했다. 과학 강국인 독일은 추진 중이다. 3세대는 가동을 시작한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3만9000여 명이 1만2000여 건의 연구를 수행했다.

4세대는 3세대 가속기가 조금 발전한 방식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4세대 대신 ‘완성 가속기’라고 해야 정확하다. 둥근 형태(둘레 280m)인 3세대는 여러 가지 빛(방사광)을 만들지만 직선 형태인 4세대는 아주 좋고 강력한 X선만 만든다. 전자총에서 나오는 전자를 빛의 속도(초당 30만 km)로 가속시키면 생긴다. 국내 기술력으로 구축한 것도 자랑거리다. 3세대를 통해 20년 동안 운영 역량을 쌓아 가능했다.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1845∼1923)이 발견해 제1회 노벨물리학상(1901년)을 받은 ‘해부하지 않고 뼈를 보는’ 이 빛줄기(X선)는 이제 가속기 덕분에 살아 있는 단백질의 구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수준이 됐다.

4세대 가속기를 활용해 물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물에서 수소와 산소를 분리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가능해진다. 지금은 전기분해로 수소를 얻어 수소자동차에 조금씩 활용하지만 분리가 어렵고 생산성이 매우 낮다. 고 교수는 “수소를 마음껏 활용한다면 석유시대는 완전히 끝낼 수 있다”며 “그 첫 단계가 4세대 가속기 활용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가속기는 올해까지 시험 가동을 마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에 들어간다. 실험실은 단백질 구조를 밝히는 생명과학 분야와 초고속 화학 반응을 파악하는 화학 분야 등 두 종류를 설치했다.

미국의 4세대 가속기가 내년부터 2년 동안 증설 관계로 운영을 중단하는 것도 포스텍에는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 교수는 “4세대는 최고 수준의 연구에 활용되므로 미국 가속기 운영 중단 기간에 우리나라 가속기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 연구자들이 한국을 찾을 것이고 국내 연구자들과 협력해 활용하면 수년 안에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 신약 개발의 혁명적 기반

직선형 4세대 가속기.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밝고 강력한 X선을 만들어낸다. 오른쪽 둥근 시설은 3세대 가속기이다. 포스텍 제공
직선형 4세대 가속기.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밝고 강력한 X선을 만들어낸다. 오른쪽 둥근 시설은 3세대 가속기이다. 포스텍 제공
4세대 가속기는 여러 분야에서 맹활약이 기대되지만 특히 신약 개발에 혁명적 변화가 예상된다.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면 이에 대한 맞춤형 신약 개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막 부분의 단백질(막단백질) 구조 분석이 가장 중요하다.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 가운데 60%가량은 구조를 밝히기 어려운 막단백질로 알려져 있다. 장승기 포스텍 생명공학연구센터장(생명과학과 교수)은 “4세대를 활용한 신약 연구는 모방에 의존한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접근”이라며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확실한 신약 개발 열쇠를 손에 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신약 분야의 국제 시장 규모는 2024년을 기준으로 1조 달러(약 1200조 원)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온 반도체 화학제품 자동차산업을 모두 합친 것보다 규모가 크다. 장 교수는 “신약 시장은 너무나 크고 중요한데도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미미할 정도로 성과가 적다”며 “이는 4세대 가속기라는 획기적 연구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스텍 생명공학연구센터는 4세대 가속기에 기반을 둔 신약 개발 계획인 ‘NBA(Next generation Bio Accelerator)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막단백질 구조 분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애리조나대 바이오디자인연구소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신약연구기관을 유치하고 제약전문기업을 대거 육성한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4세대 가속기 주변이 거대한 제약 기업 및 연구단지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장 교수는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속기 옆에 연구와 기업 지원, 신약후보물질 임상시험, 제품 생산 등이 가능한 개방형 센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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