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지금…트럼프의 엡스타인 문건 공개 ‘타이밍 정치’ [트럼피디아] 〈59〉

  • 동아일보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지난해 12월 12일 공개한 사진. 트럼프 대통령(맨 왼쪽)과 제프리 엡스타인(왼쪽 두번째)이 한 여성과 대화하고 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사진의 출처에 대해 “엡스타인이 생전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사진을 확보한 것”이라고 밝히며 엡스타인 사건 파일의 공개를 압박했다. 사진 출처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지난해 12월 12일 공개한 사진. 트럼프 대통령(맨 왼쪽)과 제프리 엡스타인(왼쪽 두번째)이 한 여성과 대화하고 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사진의 출처에 대해 “엡스타인이 생전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사진을 확보한 것”이라고 밝히며 엡스타인 사건 파일의 공개를 압박했다. 사진 출처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사건 파일 공개를 국면 전환의 지렛대(레버리지)로 삼고 있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1차 공개분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지난달 30일 풀린 3차 공개분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영국 노동당 정권을 비롯한 유럽 동맹들을 뒤흔들고 있다. 특히 중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정치 생명이 위기에 처했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는 3차 공개 직후의 혼란을 실책 수습의 계기로도 삼고 있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이민 단속 작전을 조용히 종료하며 퇴로를 모색하는 한편 엡스타인과 유착 의혹이 불거진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스티븐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에 대해선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24일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앞두고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국 운영 전략으로 풀이된다.

● 법무부의 엡스타인 파일 ‘임의 공개’ 논란
미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에 따라 지난해 12월 19일까지 약 600만 쪽에 달하는 엡스타인 사건 조사 파일을 전부 공개해야 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수사 중이거나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안, 피해자 특정이 가능한 정보 등을 지우는 작업에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며 내부 기준에 따라 수사 자료를 선별 공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약 350만 쪽이 대중에 공개된 상태다.

법무부가 공개한 자료를 엡스타인의 메일함 형식으로 재구성해 검색 기능을 제공하는 웹사이트 ‘JMail’도 등장했다. 원본 자료는 연방 상·하원 의원 본인만 열람이 가능하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 19일 엡스타인 파일의 일부를 처음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10만 쪽 중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비행기, 수영장 등에서 여성과 밀착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포함돼 주목을 받았다. 도덕성 논란으로 코너에 몰린 클린턴 부부는 지난달 11일 하원 감독위원회의 요청을 공식 승낙하며 이달 26, 27일 이틀간 엡스타인과 관련한 의회 비공개 증언에 나서기로 했다.

이후 법무부는 40여일 만인 지난달 30일 300만 쪽에 달하는 사건 자료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사진 18만 장이 포함된 이번 공개분은 영국과 노르웨이 등 유럽 정계를 강타하고 있다. 액시오스는 “엡스타인 파일 공개로 인한 줄사임과 수사 착수가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며 “비교적 차분한 미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고 짚었다.

● 英총리 퇴진론-유럽 줄사임 불지펴
미 법무부에 따르면 스타머 정부가 주미 영국대사(2025년 2~9월 재직)로 발탁했던 집권 노동당의 유력 정치인 피터 맨덜슨은 엡스타인으로부터 2003~04년 7만5000달러(약 1억950만 원)를 송금받고, 2009년 산업장관 시절 영국 정부의 세금 정책과 자산 매각 계획 등 각종 기밀 문서를 엡스타인에게 유출했다. 맨덜슨 전 대사가 속옷 차림으로 여성 옆에 서 있는 사진도 공개됐다.

2025년 2월 당시 주미 영국대사 맨덜슨(왼쪽)과 스타머 영국 총리. 워싱턴=AP 뉴시스
2025년 2월 당시 주미 영국대사 맨덜슨(왼쪽)과 스타머 영국 총리. 워싱턴=AP 뉴시스
2일 영국 경찰은 국가 기밀 유출 혐의로 맨덜슨 전 대사에 대한 수사 검토에 착수했다. 하지만 스타머 총리가 그와 엡스타인의 친분을 알고도 주미 대사에 임명했다는 의혹은 거세지고 있다. 8일에는 스타머 총리의 핵심 측근인 맥스위니 비서실장이 물러지만 스타머 정부에 대한 도덕적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하며 노동당 정부를 붕괴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당내 사퇴 압박에 직면한 스타머 총리는 5월 지방선거 후 퇴진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파일 공개로 입지가 좁아진 스타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압박에 취약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외에도 스위스 개인은행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의 수장인 아리안 드 로스차일드도 엡스타인과의 교류가 드러나며 논란을 빚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메테마리트 왕세자비가 과거 엡스타인과의 교류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했고, 토르비에른 야글란 전 노르웨이 총리 겸 노벨위원회 위원장과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최고경영자(CEO) 보르게 브렌데가 조사 대상에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장관과 그의 딸 카롤린이 엡스타인과 공동 명의의 역외 펀드를 소유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됨에 따라 파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 트럼프 이너서클은 ‘무풍지대’
미국에서도 엡스타인과 교류가 드러나 대형 로펌 폴 와이스의 브래드 카프 회장, 데이비드 로스 뉴욕 시각예술학교 학과장, 캐서린 루믈러 골드만삭스 총괄 법률고문 등이 직을 내려놨다. 엡스타인 스캔들이 재점화되며 기득권층에 대한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진영 특유의 반(反)엘리트 정서 또한 증폭되고 있다.

하지만 엡스타인 파일에 포함된 트럼프 이너서클 인사들은 백악관의 적극적인 엄호를 받으며 타격을 피하고 있다.

법무부가 공개한 엡스타인 문건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엡스타인과 2005년부터 최소 13년간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2012년에는 러트닉 부부와 그들의 네 자녀가 엡스타인이 소유한 카리브해 ‘리틀세인트제임스섬’ 방문을 계획한 정황도 드러났다. 하지만 10일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러트닉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의 매우 중요한 일원이며, 대통령이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한다”며 감쌌다.

러트닉 장관이 10일 연방 상원 세출위원회 산하 상무·법사·과학 소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엡스타인의 개인 섬에는 가족과 방문했지만, 그와 어떤 관계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진 출처 C-SPAN
러트닉 장관이 10일 연방 상원 세출위원회 산하 상무·법사·과학 소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엡스타인의 개인 섬에는 가족과 방문했지만, 그와 어떤 관계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진 출처 C-SPAN
트럼프 1기에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역임했으며 마가 진영의 주요 논객으로 꼽히는 스티븐 배넌은 백악관 직책에서 물러난 이후인 2018~19년 엡스타인에게 유럽 극우 정치인을 지원할 자금을 부탁했다. 또 성범죄 전과를 지닌 엡스타인의 대외 이미지 회복을 위한 자문과 다큐멘터리 제작에 응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공개된 직후인 9일 법무부는 1·6 의사당 난입 사건과 관련해 배넌이 받고 있는 의회 모욕죄 혐의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에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압박하고 중동 개입을 비판하며 이견을 냈던 배넌을 상대로 강온 전략을 펼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레임덕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마가 진영 내 결속력을 다지려는 취지로 풀이된다.

● 이민 등 불리한 ‘이슈 덮기’ 전략
엡스타인 파일이 헤드라인을 장악하며 트럼프 행정부에 불리한 이슈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미니애폴리스 이민 단속 논란과 케빈 워시 차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지명에 따른 시장 충격이 대표적이다. 전략적으로 선별한 의제로 뉴스를 주도하는 트럼프 백악관 특유의 ‘전선을 범람하라(flood the zone)’ 미디어 전략이 효과를 낸 것이다.

엡스타인 파일 3차 공개 직후 강경 이민책에 대한 비판이 동력을 잃자 트럼프 행정부는 미니애폴리스에 대한 이민 단속을 조기 종료했다. 이달 5일 백악관은 미니애폴리스에 파견된 연방 요원의 일부 철수를 발표했고, 12일에는 미니애폴리스에 대한 이민 단속 작전의 공식 종료를 선언했다.

이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반(反)트럼프 진영의 결집을 방지하는 동시에 24일 국정연설에서 강경 이민책을 성과로 포장하기 위한 전술적 후퇴로 보인다. 또 엡스타인 파일 3차 공개 전날 지명된 케빈 워시 연준 의장 후보자에 대한 상원 인준이 난항을 겪고 있지만 부각되지 않고 있다.

백악관의 이민 정책 담당자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사태 수습을 위해 현지에 파견된 톰 호먼 국경 차르가 12일 미니애폴리스에 대한 이민 단속 작전의 공식 종료를 발표했다. 미니애폴리스=AP 뉴시스
백악관의 이민 정책 담당자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사태 수습을 위해 현지에 파견된 톰 호먼 국경 차르가 12일 미니애폴리스에 대한 이민 단속 작전의 공식 종료를 발표했다. 미니애폴리스=AP 뉴시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교한 설계는 24일 국정연설로 귀결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직접 나와 연방 의원들과 국민을 상대로 지난 1년간의 정책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연례 행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해 의회 연설은 트럼피디아 14화에서 다뤘다.
“1분에 한번꼴”…‘99분 연설’과 99번의 기립박수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50309/131167514/1

미국에서는 14~16일 사흘간의 ‘대통령의 날’ 연휴가 시작된 가운데 항공 대란을 둘러싼 우려가 크다. 양당이 이민 단속 주무부처인 국토안보부에 대한 예산안에 합의하지 못해 14일을 기점으로 교통안전청(TSA) 등에 대한 예산 지급이 중단됐다. 대부분의 공항 근로자들은 이날부터 무급 근무를 서고 있지만 공화당이 상·하원 과반을 차지한 연방의회가 17~22일 휴회에 돌입하면서 사태는 장기화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국정연설에서 이를 민주당의 탓으로 돌려 강경 이민 예산을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곧 60화를 앞둔 트럼피디아 시리즈가 《트럼피디아: 트럼프 알고리즘을 해부하다》라는 단행본으로 최근 출간됐습니다. 연재에 대한 의견이나 궁금한 점, 건의 사항을 asap@donga.com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제프리 엡스타인#엡스타인 파일#키어 스타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