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J D 밴스 부통령과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뒷줄 왼쪽부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치는 모습. 워싱턴=AP 뉴시스
4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후 첫 의회 연설을 두고 역대 가장 분열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연설 내내 몸을 아예 왼쪽으로 틀고 서 있었다. 공화당 좌석이 있는 쪽이었다. 민주당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사로 해석된다. 그는 민주당을 향해 “급진 좌파 미치광이들”이라고 삿대질하거나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을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비난할 때만 오른쪽을 봤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쇼맨십을 가감 없이 발휘했다. 역대 최장 시간인 99분간 연설하며 취임 후 43일간 쏟아낸 거의 모든 정책 성과를 짚고 넘어갔다. 공화당은 최소 99번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미국식 국정연설’은 원래 이런 것일까. 집권 첫해에는 상·하원 의회 합동연설, 둘째해부터는 국정연설(연두교서)로 불리는 이 연설은 대통령이 그간의 성과를 강조하고 향후 계획을 설명하는 미국의 정치 이벤트다. 한국의 예산안 시정연설, 대통령 신년사, 국회 개원연설 모두 국정연설과 딱 대응되는 개념은 아니다. 미국의 국정연설 전통을 살펴봤다.
● 역대 ‘최다 박수’ 기록도 세워
99분짜리 국정연설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역대 최다 박수’ 기록도 세웠다. 백악관에서 공개하는 연설문에는 ‘박수(applause)’도 기록된다. 미국 국정연설에서 어느샌가 박수가 중요한 지표가 됐기 때문이다.
종전 역대 최다 박수 기록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었다. 2000년 클린턴 전 대통령의 89분짜리 연설에서 나온 박수는 128번.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박수를 140번 받았다. 이중 기립박수는 최소 99번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열정적인 기립박수로 화답하는 공화당 하원의원들. 워싱턴=AP 뉴시스 미국에서 국정연설은 헌법에 근거한 정치 전통이다. 1913년 이후 거의 매년 실시되고 있다. 미 헌법 2조 3항에는 “대통령은 연방의 상황(the State of the Union)에 관하여 수시로 연방의회에 보고하고, 필요하고 권고할 만하다고 인정하는 법안의 심의를 연방의회에 권고하여야 한다”고 적혀있다.
이 조항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례 연설을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1970년 1월 ‘연례 메시지(Annual Message)’라는 제목의 연설을 뉴욕 임시 의사당에서 했다. 1100단어짜리 짧은 연설이었다. 연설을 싫어하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1801년 취임 직후부터 이를 서면으로 대체했다.
연설 형태로 부활시킨 인물은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당시만 해도 3권분립이 엄격해 대통령은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부 수장에 그쳤다. 의제 설정은 철저히 입법부의 몫이었다. 현대 미국 행정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존 밀턴 쿠퍼 주니어 위스콘신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진보주의자였던 윌슨은 여론을 국정 운영에 더 잘 반영하기 위해 행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믿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1913년 의사당에서 112년 만의 국정연설을 하는 윌슨 전 대통령. 사진 출처 미 상원 도서관 이에 112년 만에 대통령의 ‘연례 메시지’를 재개했다. 1913년 윌슨은 상·하원 의원들 앞에 서 “정부 업무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제가 관례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하더라도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겠다”고 말하며 국정 계획을 밝혔다. 당대에는 워싱턴 질서를 뒤집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의회 권력을 침범하는 오만한 행동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WP는 연설 다음날 조간신문에 “워싱턴이 놀랐다”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청중이 전국민으로 확대되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1923년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라디오 중계를 시작했고, 1947년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이 TV 중계를 시작했다.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은 1966년 연설을 시청률이 가장 잘 나오는 ‘프라임타임’ 시간대로 옮겼다. 이때부터 미 동부 시간 오후 9시, 미 서부 시간 오후 6시 전후에 진행되고 있다. 1997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온라인 중계를 시작했다.
● 정치 양극화와 함께 늘어난 박수
박수는 1950, 60년대만 해도 30~40번에 그쳤다. 당내 계파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내 진보와 보수 계파가 각각 있었다. 미 상원 역사국의 도널드 리치 명예 역사학자는 “정당 내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했기 때문에 국정연설에서 당적에 따라 쩍 갈라지는 풍경은 매우 드물었다”고 뉴욕매거진에 말했다.
그러나 1960~80년대 미국 사회가 극심한 양극화를 겪으며 박수도 당파성을 띠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민권운동과 1970년대 공화당의 남부 민주당 유권자 흡수 전략 등을 거치며 이념 차이가 극명해졌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1982년 의회 연설에서 조지 H W 당시 부통령이 박수치고 있다. 사진 출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 유튜브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는 국정연설 문화를 영원히 바꿨다. 1982년 공화당 의원들을 상대로 ‘박수 지점’을 지정한 연설문을 배포한 것. 이때부터 국정연설은 운동 경기 응원전이 연상되는 모습을 하게 됐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할리우드 배우 출신이다.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에서 8년간 일하며 전국을 돌며 동기부여 강연을 한 이력도 있다. 이때 쌓은 경험으로 대중 연설의 전문가가 됐다.
일반 국민을 손님으로 초대해 연설에서 소개하는 전통도 레이건 전 대통령의 1982년 국정연설 때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 포트맥강에 비행기가 추락하자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생존자를 구한 공무원 레니 스쿠트니크를 “미국 정신을 대표하는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대통령 영부인 초대로 국정연설에 참석한 로베르토 오르티즈 국경 수비대 대원, 불법 이민자의 범행에 가족을 잃은 로렌, 앨리슨 필립스(왼쪽부터). 워싱턴=AP 뉴시스 최근에는 정책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이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현행 관례에 따르면 대통령 영부인과 하원의장이 각 24명씩, 의원은 각 1명씩 일반 국민을 초청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反)이민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불법 이민자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 국경 수비대 대원 등을 초대했다. 반트렌스젠더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여성으로 성전환한 선수와 경기를 뛰다 다친 학생들도 초대했다.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과 ‘국경 차르’ 톰 호먼 등 내각에 포함되지 않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실력자들도 하원의장 초청으로 국정연설에 참석했다. 1층에 앉은 대법관, 상·하원 의원, 내각 인사들과 달리 이들은 각국 대사 및 초대 손님들과 함께 2층에 앉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면에 앉은 2기 내각. 워싱턴=AP 뉴시스 ● 저항-조롱 의미 담은 박수도
국정연설에서 야당은 종종 대통령의 실정을 부각하기 위해 박수를 역이용했다.
1982년 박수 경쟁을 고안한 레이건 전 대통령 역시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그해 연말 중간선거에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공화당은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삭감, 정부 구조조정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 레이건노믹스가 실패해 1982년 미국은 10%대 실업률의 늪에 빠졌다. 결국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었다.
2년 전인 1980년 대선 및 총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자승자박’ 전략을 썼다. “레이건의 정책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겠다”며 레이건노믹스 관련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워준 것. 민주당의 예상대로 레이건노믹스가 실패하자 1983년 민주당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경제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로 말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실책을 강조했다.
4일 국정연설을 하러 입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정 가운데). 워싱턴=AP 뉴시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서도 이 전통은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88분경부터 대외정책을 본격 언급했다.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하며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조건도 없이 수천억 달러를 줬다”고 말하자 민주당 측에서 처음으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입을 삐죽 내밀고 박수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민주당을 향해 몸을 틀었다.
워런 의원이 박수치는 모습. 워싱턴=AP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는 아메리칸 원주민 혈통을 가진 워런 의원을 향해 “포카혼타스가 그러자고 하네요”라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면박을 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유세장과 트루스소셜에서 자주 야당 의원과 당내 비주류를 ‘새대가리’ ‘겁쟁이’ ‘울보’ 등의 멸칭으로 부르는 추태를 보였다. 국정연설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14화 요약: 미국 정치가 양극화될수록 미국 대통령 국정연설의 ‘응원전’도 격해졌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은 ‘99분 연설-박수 140번’으로 역대 최장 및 최다 기록을 세웠다. 그는 ‘역대 가장 분열적인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증명하듯 민주당에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15화 예고: 트럼프 대통령은 99분의 연설에서 70분 이상을 국내 문제에 할애했다. CBS와 유고브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날 연설 시청자의 51%가 공화당 지지자, 20%가 민주당 지지자, 27%는 중도 성향이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 연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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