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뒤에 원금 갚을게요” [횡설수설/김창덕]

  • 동아일보

1997년 글로벌 휴대전화 1위 미국 모토로라는 위성전화 서비스인 ‘이리듐 프로젝트’를 위해 만기가 100년 후인 회사채 3억 달러어치를 발행했다. 하지만 이리듐 사업부는 일명 ‘벽돌폰’이란 오명만 남긴 채 처참하게 실패했고, 2001년 헐값에 팔렸다. 그 여파로 휘청거리던 모토로라는 스마트폰 대응 실패로 2012년 휴대전화 사업까지 접었다. 장기 채권을 떠안게 된 존속회사 모토로라솔루션은 앞으로도 71년이나 더 이자를 내야 한다. 모토로라 이후 테크 업계에선 자취를 감췄던 ‘100년물 회사채’가 거의 30년 만에 재등장했다. 주인공은 구글이다.

▷투자자들은 구글을 ‘제2의 모토로라’로 여기진 않았다. 구글 지주사 알파벳이 10일 영국 채권시장에서 10억 파운드(약 2조 원)어치의 100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매수 주문이 10배나 몰렸다. 흥행에 힘입어 금리도 예상보다 낮은 6.125%로 확정됐다. 발행일 기준 영국 국채 30년물보다 겨우 0.8%포인트 높았다. 이 정도면 거의 ‘준국가급’ 장기 신용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알파벳은 미국과 스위스에서도 회사채 발행에 성공해 하루 만에 320억 달러(약 46조 원)를 확보했다.

▷채권 시장에서는 100년물을 흔히 ‘센추리 본드(century bond)’라 부른다. 보통 만기가 10∼30년이면 ‘장기채(long bond)’, 30∼50년이면 ‘초장기채(ultra long bond)’란 이름이 붙는데, 100년은 그런 수식어로는 부족해 아예 기간을 명시한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만기가 길수록 금리가 높아 수익 측면에서 유리하지만, 위험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채권 발행 기업이 그때까지 생존하지 못하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어서다.

▷100년물을 발행한 곳들의 면면을 보면 적어도 ‘안정성’ 측면에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은 월트디즈니, 코카콜라, 포드, 노퍽 서던(철도회사) 등이 있었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전력공사, 옥스퍼드대, 오스트리아 국채 등의 사례가 있다. 테크 기업으로는 닷컴버블 이전 IBM과 모토로라 정도만 있었다. 아직 만 서른이 안 된 알파벳은 앞으로 백년기업 반열에 들 확신이 있었고, 시장에서도 통한 셈이다.

▷알파벳의 이번 회사채 발행은 인공지능(AI)과 인프라 투자였기에 더 주목을 끈 측면도 있다. 알파벳이 AI용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데 올해 쓰겠다고 한 1850억 달러는 지난 3년간의 투자액을 합한 것보다 많다. 알파벳과 함께 미국 4대 빅테크라 불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도 올해 최소 4650억 달러의 실탄을 AI 분야에 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일 년 후도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시대인데, 10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빅테크들의 패기가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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