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젠 기술독립이다]전자-IT 1~2년內 日수준 접근

  • 입력 2003년 8월 13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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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광복 후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기업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닌 질문이다. 경제의 독립, 기술의 독립 없이 진정한 광복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요즘만큼 일본과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린다. 특히 일본이 자랑하는 기술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앞으로 4, 5년 안에 일본을 꺾을 수 있다는 낙관론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한일 기술 역전론’의 실체와 일본 기술을 뛰어넘는 한국 기업들의 전략에 대해 알아본다.》

“소니는 물론이고 인텔보다도 낫다고 생각한다.”

올 4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 NEC그룹의 도모타 히로아키(友田宏名) 자재부장은 삼성전자에 대해 이 같은 평가를 내렸다. 삼성전자가 일본 기술력의 상징인 소니는 물론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인 미국의 인텔을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 그는 “컴퓨터, 무선통신, 디지털 가전, 반도체 등 다양한 정보기술(IT)의 융합시대가 오고 있다”면서 “폭넓은 기술 포트폴리오를 가진 삼성전자가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소기업 네옵텍은 지난해부터 일본 광통신 장비업체들에 광통신 소자를 공급하고 있다. 광통신 기술은 일본이 차세대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는 분야. 네옵텍은 스미토모 등 일본 경쟁업체를 제치고 핵심부품을 수출하게 된 것이다. 일본기업 담당자들은 처음에는 “한국 제품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1년여에 걸친 까다로운 기술 테스트를 거치고 난 뒤 최종 승인을 내줬다.

지난 30여년간 세계 1위를 지켜온 일본 조선산업은 1999년 한국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콧대 높은 일본 해운회사들조차도 LNG선, LP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은 한국 회사들에 발주하고 있다. 2001년 삼성중공업은 NYK사에서 6200TEU급 컨테이너선을, 현대중공업은 미쓰이 오사카에서 5000m³급 LPG 운반선을 수주했다.

기술 하나로 일본을 따라잡은 한국기업들의 성공 스토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한국기업의 평균 기술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일본기업은 124 정도. 전자·정보통신은 1∼2년 안에, 기계·자동차는 4∼5년 안에 일본과 대등해질 것으로 전경련은 내다봤다.

안정열(安正烈) KOTRA 도쿄 무역관장은 “요즘 일본 기업인들을 만나면 삼성, LG 등 한국 기술 선도기업들의 활력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면서 “경기가 참체되고 구조조정이 부진한 일본에서는 ‘이제 기술력에서조차 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한국과 일본의 기술격차는 엄연히 존재한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일(對日) 무역적자 140억달러 중 1위는 반도체, 2위는 반도체 제조장비, 3위는 자동차 부품. 모두 제품설계 및 소재개발 기술이 중요한 분야들이다. 지난해 한국이 핵심기술을 수입하면서 외국에 지불한 로열티 중에서 일본 기업의 비중은 31.7%로 1위 미국(32.7%)과 비슷하다.

한국은 기초기술 및 기반기술에서는 아직 일본에 뒤지지만 공정관리 기술과 조립가공 기술에서 일본을 넘어서고 있는 것. 사공목(司空穆)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010년경 설계기술이 핵심인 비메모리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의 60∼70%밖에 못 따라가지만 공정개선이 중요한 메모리 사업에서는 최고 120%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이 부족한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 투자가 최우선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본이 워크맨, 캠코더 등 인류의 생활양식을 바꾼 제품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산·학·관(産·學·官) 연합체의 풍부한 R&D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조사에 따르면 2000년 한국 상위기업 20개사의 R&D 투자총액(5조6800억원)은 일본 마쓰시다 1개 기업의 R&D 투자액(5430억엔·약 5조4800억원)과 비슷하다. 안현호(安玹鎬) 산업자원부 산업기술정책과장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의 공과대에 연구실이 개설되면 연구과제는 거의 100% 기업과 공동으로 이뤄진다”면서 “연구가 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연구실은 폐쇄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한국 기업들은 독자 기술개발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글로벌 제휴는 연구개발비를 분담하고 국제 판로를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장성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기업들이 글로벌 제휴에 적극적인 것은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면서 “대규모 기술개발 투자가 요구되거나 표준 선택에 따른 모험이 큰 분야일수록 전략적 제휴의 필요성은 커진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브랜드 가치 높여야 진짜 경쟁력▼

올 4월 일본 유통과학대 강당에는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유통업체 간부 15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승한(李承漢) 삼성 테스코 홈플러스 사장의 ‘홈플러스의 성공 비결’ 특강을 듣기 위한 것. 이 자리에 모여든 일본인들은 “한국 유통업계의 새 점포 개점, 상품, 가격, 마케팅 등 모든 전략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유통 시찰단의 한국 방문도 줄을 잇고 있다. 1999년 이후 방한한 일본 유통업체는 40개사가 넘는다. 월마트, 까르푸 등 세계적인 할인점에 맞서 시장 1위를 지키는 국내 토종 할인점의 비결을 한수 배우려는 목적이다. 대부분 한국 유통회사들이 과거 일본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같은 일본 유통업계의 ‘한국 배우기’ 열풍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지난해 8월 나이토 마사미쓰 일본 참의원은 NTT 직원 30명을 이끌고 와 한국 초고속인터넷 시설을 견학했다. 일본 방문단은 하나로통신 등을 둘러보면서 “한국 정보기술(IT) 인프라에 완전히 압도됐다”고 말했다. 올 3월에는 일본 M&A센터 소속 80여명의 회계사들까지 “한국 산업의 경쟁력을 배우고 싶다”면서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한국기업들이 일본을 따라잡는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 데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적극 수용하는 한국의 소비환경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한국인들의 월평균 인터넷 사용시간은 16시간으로 일본인들의 두 배에 가깝다. 인구 100명당 휴대전화 가입자에서도 한국은 57명으로 일본의 46.4명보다 높다. 이는 신제품에 대한 초기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기업의 투자 위험 부담을 줄여주고 규모의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전문가들은 “최근 4, 5년간 한국기업들이 일본과의 격차를 많이 줄였지만 대등한 경쟁을 하려면 저가(低價), 저품질 이미지를 떨쳐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소니보다 순익에서 15배 이상 앞서지만 브랜드 가치에서는 뒤진다. 미국 컨설팅회사 인터브랜드와 비즈니스위크 공동조사에 따르면 세계 100대 브랜드 중 한국에서는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포함됐지만 일본 기업은 7개가 올라 있다.

일본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위를 달리는 진로는 매년 10억엔씩 현지 TV 광고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광고에서는 ‘소주’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으며 한국적인 분위기도 풍기지 않는다. ‘JINRO’라는 브랜드만을 내세운다는 전략이다. 일본인의 입맛을 철저히 연구해 당도를 한국의 10분의 1로 낮추고, 일본 경쟁제품에 비해 가격을 15%가량 높게 책정해 고급제품의 이미지를 심은 것도 주효했다.

주한 일본기업인 모임인 서울저팬클럽(SJC) 다카스기 노부야 이사장은 “한국은 전자 분야와 일부 유통업 등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축적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 상품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본격적으로 일본과 경쟁하려면 연구개발(R&D)과 함께 브랜드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양대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일본인이 보는 한국경제 vs 한국인이 보는 일본경제▼

외환은행 이병구 국제여신팀장(48)과 합성고무회사인 금호폴리켐의 엔요 히로지(延$弘次·57) 이사가 12일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이 팀장은 지난해까지 일본 도쿄에서 7년간 외환은행 지점에 근무했고, 엔요 이사는 한국에서 8년째 한일 합작회사 금호폴리켐에서 일본 대표를 지내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두 사람은 일본과 한국에서 근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이국땅에서 살았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 생겨서일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쉽게 풀려 나갔다.

“여전히 한국은 투자하기에 매력적인 곳입니다. 처음 한국에 왔던 1995년에는 낮은 인건비가 장점이었죠. 요즘은 정보기술(IT) 제품에 대한 풍부한 시장 수요가 가장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엔요 이사가 운을 떼자 이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일본에 대한 투자는 신중할 필요가 있어요. 일본 경제가 조금씩 좋아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아직 장기 불황에 빠져 있으니까요. 민간 소비도 침체돼 있고….”

엔요 이사는 한국에 대한 투자 전망은 밝다고 말했지만 일반적으로 노사 문제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노사 문제가 없는 회사를 찾기가 힘들 정도”라며 “일본도 1950년대에는 노사 문제가 심각했으나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게 되자 노사가 서로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 문제를 풀기 위해 엔요 이사가 내놓은 방안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서로 협조하는 것’.

한일간 경제협력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했다.

이 팀장은 “한국과 일본, 중국이 서로 협력해 동아시아 경제 블록을 만들어 힘을 키워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한일간 신뢰를 쌓는 게 필수”라고 말했다.

엔요 이사도 맞장구치며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이 가장 문화가 비슷해 노력하기에 따라 신뢰관계는 쉽게 쌓을 수 있다”며 “‘가깝지만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 서로 이익을 얻는 사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1시간 남짓 계속된 인터뷰는 대체로 일본말로 진행됐다. 중간에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한국어도 사용했다. 언어는 문화를 보여준다고 했던가, 양국어로 얘기하는 사이 두 사람 사이의 문화장벽도 녹아버리는 듯했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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