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희롱하고 바람을 읊었더니 너럭바위까지 풍류 철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여행 이야기]영남 선비문화의 향기 함양
화림동 계곡에 즐비한 정자들
사림의 학식-인품 깃든 서원들
60여채 고택 옹기종기 개평한옥마을

수백 명도 너끈히 품을 수 있는 너럭바위 사이의 맑은 못이 야밤의 달을 희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농월정(弄月亭·함양군 화림동 계곡). 인기 TV 드라마 ‘환혼’의 촬영지다.
수백 명도 너끈히 품을 수 있는 너럭바위 사이의 맑은 못이 야밤의 달을 희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농월정(弄月亭·함양군 화림동 계곡). 인기 TV 드라마 ‘환혼’의 촬영지다.
‘좌안동 우함양’은 영남 선비문화를 말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안동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고, 오른쪽의 함양은 주로 재야에서 활동하는 기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했다. 도학(道學)과 의리 사상으로 무장한 재야 선비들은 절대왕정 체제에서도 꺾이는 법 없이 바른 목소리를 내왔다. 영남 사림(士林)의 본향임을 자부하는 함양의 선비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





○정자마다 깃든 조선 선비의 향기
경남 함양에는 조선시대 누각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다. 주로 서하면 화림동 계곡을 따라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다. 누정(누각과 정자)은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던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광장이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뜻의 화림동 계곡이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을 따라 펼쳐지는 화림동 계곡, 즉 선비문화 탐방로는 2구간으로 나뉜다. 상류 쪽 거연정에서 시작해 농월정까지의 6km 구간(1구간)과 농월정에서 오리숲까지의 4.1km 구간(2구간)이다. 이 중 1구간은 정자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어서 ‘정자 탐방로’로 불리기도 한다.

거연정에서부터 탐방을 시작했다. 거연정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국치를 당한 후 낙향해 서산서원과 함께 지은 정자다. 1640년경 억새로 처음 지어졌다가 1872년 재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거연정은 울퉁불퉁한 천연 암반 위에 주초석(柱礎石)과 누하주(樓下柱)를 굴곡에 맞춰 깎아 절묘하게 높이를 맞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치 정자와 암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듯하다. 금천 가운데에 터를 잡은 이 정자는 옥빛 계곡수가 내려다보이는 구름다리를 통해 연결되는데, 조선 선비들의 극찬을 받은 명소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 등은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와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

거연정에서 군자정, 영귀정을 거쳐 선비문화 탐방로 이정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갑자기 엄청난 너럭바위 지대를 만나게 된다. ‘해를 가리는 천막처럼 넓고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巖)과 수정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옥녀담(玉女潭) 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이다. 바로 이 기운을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가 동호정이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하는 정자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길에서 왕을 등에 업고 환란을 피한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1895년 그의 9대손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옥녀담에서 탁족(濯足: 발을 씻음)을 즐겼다고 한다. 탁족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놀이이자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철학적 의미도 담겨 있다. 술통으로 사용됐다는 차일암 곳곳 움푹 팬 바위 웅덩이에서는 선비들의 호방한 풍류도 느껴진다.

동호정에서는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장 진막순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감상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함께 부르는 선비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동호정에서는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장 진막순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감상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함께 부르는 선비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때마침 동호정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연주가 운치를 더해 주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국악인 진막순 선생(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장)의 가야금 연주가 차일암에 새겨진 ‘금적암(琴笛岩·악기를 연주하는 바위)’ ‘영가대(詠歌臺·노래를 부르는 곳)’ 글씨와도 잘 어울린다. 가야금 반주와 함께 불러보는 민요 체험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끄는 여행 상품 중 하나다.

선비문화 탐방로 1구간 중 가장 하류에 있는 곳이 농월정(弄月亭)이다. ‘달을 희롱한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농월정은 고요한 밤 물 위로 달빛이 흐르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농월정 바로 앞 넓게 펼쳐진 반석 지대를 ‘월연암’ 혹은 ‘달바위’라고 부르는 이유다.

농월정은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달바위 한쪽에 ‘지족당(박명부)이 지팡이를 끌고 거닐던 곳’이라는 뜻의 ‘知足堂杖구之所’(지족당장구지소)라는 한문 글씨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는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감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그는 선조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 김성일 휘하에서 군무(軍務)를 도왔고, 광해군 때는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면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맞아서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낙향해 이곳에 서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했다. 현재 농월정은 인기 TV 드라마 ‘환혼’의 촬영지로 소문난 이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남계서원의 유생 체험
강학 공간(사진)이 제향 공간(사당) 앞쪽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를 처음으로 확립한 남계서원.
강학 공간(사진)이 제향 공간(사당) 앞쪽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를 처음으로 확립한 남계서원.
함양에는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13개나 된다. 안동의 11개보다 많은 숫자다. 함양 서원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일두 정여창 선생(1450∼1504)을 모신 남계서원이다.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벌레(일두·一두)라고 낮춘 정여창은 동방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에 들 정도로 빼어난 인품과 학식을 지닌 군자였다. 화림동 계곡의 군자정도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은 서원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풍영루, 동재·서재, 강당, 경판고, 사당으로 이어지는 건물 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이 따르는 공간 배치로 활용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의 사당에서 의관을 정제한 관광객들이 직접 제례를 올리며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의 사당에서 의관을 정제한 관광객들이 직접 제례를 올리며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있다.
입구 누각인 풍영루의 2층 마루는 기운이 밴 명당터인데, 서원 풍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저 멀리 강당(명성당)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제례와 예절 체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례복을 걸친 관광객들이 제례 순서를 배운 후 서원 맨 뒤 사당으로 나아가 직접 제를 올리는 모습이 자못 경건하게 보였다. 선비문화 체험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남계서원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개평한옥마을에서도 즐길 수 있다. 60여 채의 크고 작은 고택이 옹기종기 들어선 개평한옥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선비촌 중 한 곳이다. 정여창고택(일두고택)을 비롯해 하동정씨고가,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등 명망가가 들어서 있다.

60여 채의 조선시대 고택이 옹기종기 들어선 개평한옥마을. 지금도 수백명의 박사급 인재를 배출한 명당터로 소문나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60여 채의 조선시대 고택이 옹기종기 들어선 개평한옥마을. 지금도 수백명의 박사급 인재를 배출한 명당터로 소문나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1570년대에 건축된 일두고택은 솟을대문부터 범상치 않다. 솟을대문 홍살문에는 임금이 네 명의 효자와 한 명의 충신이 난 곳임을 인증해주는 5개의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치니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깥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의 추녀 밑으로는 ‘忠(충) 孝(효) 節(절) 義(의)’라는 4개의 한자 글씨가 문짝 크기처럼 걸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허백련 화백이 이곳 사랑채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사랑채 뒤편 안주인이 거처하는 안채 역시 빼어난 기운을 가진 명당터다. 특히 안채 중 한 방은 무조건 갓 시집온 여성이 머물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일두고택을 안내한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방의 기운을 받아서 집안을 빛낼 자손을 낳도록 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일두고택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은 조선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일두고택은 TV 드라마 ‘토지’ ‘다모’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여서 애청자들의 드라마 체험 코스로도 유명하고, 고택 바로 맞은편 ‘솔송주 문화관’에서는 일두고택의 전통주인 솔송주(솔잎술) 체험을 할 수 있다. 조선 정종의 손녀이자 일두 선생의 부인이 창안한 솔송주는 53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주조 비법을 전수받은 박흥선 명인이 이곳에서 직접 솔송주 빚기와 칵테일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노참판댁의 고추장 만들기, 압화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함양군 한옥숙박시설에서 3박 4일간 머물며 여행과 체험을 동시에 즐기는 ‘함양 ON데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글·사진 함양=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함양#영남#선비 문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