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스며든 천년 전 ‘K미소’… 백제인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들리는듯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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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충남 서산 - 태안 힐링여행
동짓날에 더 화사한 백제의 미소
자연과 하나되는 개심사 풍경
태안 바닷길 이국적 정취 물씬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올라간 입꼬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인 여래불(가운데)은 햇빛 방향과 보는 각도에 따라 
미소가 달리 보인다. 동짓날 해가 떠오를 때면 입술이 빨갛게 변하면서 짓는 은은한 미소가 환상적이다. 오른쪽 사진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보다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 중앙에 작은 키의 보살상이 있고 좌우로 큰 
키의 여래상이 배치된 독특한 구조다.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올라간 입꼬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인 여래불(가운데)은 햇빛 방향과 보는 각도에 따라 미소가 달리 보인다. 동짓날 해가 떠오를 때면 입술이 빨갛게 변하면서 짓는 은은한 미소가 환상적이다. 오른쪽 사진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보다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 중앙에 작은 키의 보살상이 있고 좌우로 큰 키의 여래상이 배치된 독특한 구조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는 듯한 세상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고 싶을 때면 즐겨 찾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한 거리의 충남 서산과 태안이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백제 시기 마애불상의 그윽한 미소에서 시름을 덜어내고, 서해안에서 만나는 절경들에서는 지친 육체가 힐링됨을 느낄 수 있다.》

○ ‘백제의 미소’에서 ‘세계의 미소’로
‘백제의 미소’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서산시 운산면의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서산마애불)은 오전에 불상의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다. 과연 그랬다. 계곡을 가로질러 비탈길을 타고 올라가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이 오전의 햇빛을 받아 은은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상은 햇빛의 방향,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독특한 표정과 미소를 짓는다. 현재를 의미하는 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의 보살상과 오른쪽의 반가사유상은 각각 과거와 미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모습에서 천진스러운 보살들의 웃음소리도 묻어나는 듯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안하고 푸근해지는 느낌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문화관광해설사는 “서산마애불은 동짓날(올해는 12월 22일)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날 동이 틀 때 여래불상의 입술이 가장 붉게 빛나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인들이 해가 가장 낮게 뜨는 날이자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를 중요시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선조들은 동지를 매우 신성시했다. 동지가 지나면서부터 낮이 점차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동지는 음(陰·밤) 기운에 가려졌던 양(陽·낮) 기운이 비로소 회생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인 것이다. 동짓날을 작은 설날(아세·亞歲)로 부르는 이유다. 그래서 동지에는 태양(낮)을 상징하는 붉은색 팥죽을 먹기도 한다.

얼굴이 복스럽게 통통한 느낌을 주는 서산마애불은 당시 백제인들을 닮았다고 한다. 이 불상은 백제가 서울에서 충청도로 수도를 이전한 뒤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모습에서 언뜻 6세기경 백제 성왕(재위 523∼554년)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성왕은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백제의 중흥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는 태안반도를 통해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양나라와 친선을 맺어 대중 서해 루트를 확장하는 등 백제를 해상강국으로 거듭나게 했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백제 문화 융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1400년 남짓 한결같은 ‘백제의 미소’를 보여주는 서산마애불은 동아시아의 찬란한 백제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서산마애불에 대해 매우 ‘속세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점도 흥미를 끈다. 1958년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이 불상은 산신령으로 통했다. “바위 위에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가운데 석가여래상)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작은마누라(미륵반가사유상)가 다리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용용 죽겠지’ 놀리니까 왼쪽 본마누라(제화갈라보살상)가 짱돌을 쥐고 집어던지려 하고 있슈!” 현지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런 말을 듣고 불상을 바라보면 유쾌한 미소가 피어오르며 고개가 끄덕거려지기도 한다. 이는 서산마애불이 K컬처의 해학적 감각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백제의 미소’가 시대와 국경과 종교를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인의 보편적 미소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절로 힐링되는 서산 절경 코스

서산시가 선정한 서산 9경 중 제2경인 서산마애불을 감상한 뒤 가을 산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제4경인 개심사(운산면 신창리)로 가볼 일이다. 서산마애불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개심사는 그 초입에 넓게 펼쳐진 목장 초지부터가 이국적인 풍경을 물씬 풍기는 곳이다. 봉긋봉긋한 야산의 초록색 초지에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절로 느긋해진다. 21km²(약 638만 평)에 달하는 이 초지는 ‘축협 한우 개량사업소 농장’으로 불리고 있다. 1969년 정치인 김종필 씨에 의해 조성됐다가 이후 정치적 이유로 국가에 헌납된 곳이라고 한다.

자연 그대로의 굽어진 나무를 건물 기둥으로 사용한 개심사 법당.
자연 그대로의 굽어진 나무를 건물 기둥으로 사용한 개심사 법당.
목장길을 드라이브 코스로 삼아 돌다 보면 이정표를 따라 개심사로 진입하게 된다. 개심사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웅전 기단만 백제시대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 성종 때 산불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개심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아한 절집 자태로 명성이 높다. 다듬지 않은 채로 굽어진 나무 기둥을 그대로 사용한 건물,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계단 등이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썩 어울린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청벚꽃과 왕벚꽃, 배롱나무, 단풍나무 등도 절집 인테리어로 한몫을 하는 곳이다.

태안 해변길 2코스(태배길) 태배전망대 상공에서 내려다 본 서해 바다.
태안 해변길 2코스(태배길) 태배전망대 상공에서 내려다 본 서해 바다.
서산에서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기고 싶다면 서산 제7경인 황금산 해변(대산읍 독곶리 일원)을 추천한다. 해송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숲길과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황금산은 해발 156m로 그리 높지 않다. 서쪽이 바위 절벽으로 서해와 접해 있고, 금을 캤다고 전해지는 2개의 동굴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산 황금산 아래 몽돌해변의 코끼리 바위. 밀물 때면 코끼리가 코로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서산 황금산 아래 몽돌해변의 코끼리 바위. 밀물 때면 코끼리가 코로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잘 다듬어진 등산로(약 1km)를 이용해 30여 분 산을 타고 넘어가면 장엄한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서산 사람들이 주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는 몽돌 해변이다. 이곳에서는 바닷물에 빠진 코끼리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코끼리가 긴 코를 바다에 들이밀고 바닷물을 마시기 위해 뒷다리를 접고 앉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코끼리바위’다. 코끼리바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물때를 잘 맞춰야 하므로 미리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태안의 이국적 가을 정취
태안 태배길의 해상 글램핑장.
태안 태배길의 해상 글램핑장.
서산에 서산마애불이 있다면 태안에는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태안마애불)이 있다. 백화산(284m) 8부 능선쯤에 자리한 태안마애불은 서산마애불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국보급 마애불상이다. 산 정상 부근에 있지만, 바로 인근의 태을암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찾아가기가 쉽다. 서산마애불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태안마애불은 독특한 구도로 주목을 받는다. 거대한 바위 동쪽 면에 감실을 마련한 뒤 삼존불을 새겨놓은 형태인데, 불상 배치가 일반적인 삼존불 구도(중앙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와는 확연히 다르다. 태안마애불은 부처보다 아래 서열로 치는 보살이 가운데에 배치돼 있고, 좌우로 여래불이 보좌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것도 중앙의 보살은 1.8m로 크기가 작은 반면, 좌우의 부처상은 2.4∼2.5m 크기로 큼직하게 새겨놓은 등 파격적인 구도다. 이러한 도상은 전 세계에서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그 통통한 얼굴에 잔잔한 ‘백제의 미소’만큼은 서산마애불과 비슷하다.

태안 청산수목원의 팜파스그래스.
태안 청산수목원의 팜파스그래스.
태안군 남면의 청산수목원과 소원면의 해변길(태배길)에서는 이국적인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청산수목원은 10만 m² 부지 규모에 조성한 수목원인데, 요즘 서양억새로 불리는 팜파스그래스 축제(11월 중순까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아르헨티나가 원산지인 팜파스그래스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에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은백색 꽃무리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팜파스그래스는 9, 10월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곳은 웨딩 촬영 명소로도 입소문이 났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의 해변길 2코스(태배길)는 갯벌과 독특한 해안절벽 등으로 절로 힐링이 된다.



글·사진 태안/서산=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백제#서산#태안#개심사#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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