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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덖은 차향기… 고승들 마음까지 살랑살랑《지리산 토끼봉 자락 해발 800여 m에 둥지를 튼 칠불사에서 작설차를 맛본다. 도응 주지스님이 하동군 화개면의 야생 찻잎으로 우려낸 차는 입안에 달짝지근한 향미를 남긴다. 이곳이 우리나라 차 시배지이자 초의선사에 의한 다도 중흥지라는 점도 차 맛을 북돋워준다. 초의선사는 칠불사에서 참선하면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고, 또 다른 저술인 ‘동다송(東茶頌)’에서는 하동의 차밭을 찬탄했다. 칠불사는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 성불 설화가 있는 고찰이자, 세계 건축사에서 유례가 드문 아자방(亞字房) 온돌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칠불사를 기점으로 하동 지리산 여행을 떠나본다.》○선승들이 탐내는 아자방 칠불사 주지가 객을 맞아 차를 따라준 방은 매우 독특했다. 방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높이 40cm 남짓한 나무 단이 디귿 자 형태로 마주보게 한 모양새(ㄷコ)다. 나무 단 아래쪽 방바닥은 자연히 열십(十)자 형태가 된다. 방 밑의 온돌 또한 독특한 구조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대형 아궁이로 한번 불을 때면 아(亞)자 형태의 온돌을 따라 방 안 온기가 며칠간 유지되는 구조라고 한다. 바로 칠불사 벽안당(아자방)을 재현해 놓은 아자방 온돌체험관이다. 도응 스님은 “나무 단 위에서 좌선이나 명상을 한 뒤, 방바닥에서 차를 마시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의스님이 참선을 한 원래의 아자방은 현재 발굴 및 복원 공사 중이어서 개방되지 않고 있다. 아자방에 대한 학술 조사 결과 고려시대 유물 등이 나와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고려 때 이미 최고의 온돌 건축물이 운영되고 있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사실 아자방의 전설과 기록은 훨씬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년) 때 ‘구들도사’로 명성이 높은 담공선사가 이중 온돌방인 아자방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심지어 ‘칠불선원사적기’엔 신라 지마왕 8년(119년)에 금관가야 출신 담공선사가 지었다고 씌어 있다. 아자방 온돌은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 혹은 49일간 온기가 지속됐다고 해서 중국 당나라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아자방은 겨울에 눈이 와도 쌓이지 않고 녹아버린다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풍수비결서(도선국사비기)에도 등장한다.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100리 가면 와우형(臥牛形) 명지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숭 못지않고 백자천손(百子千孫)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득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누워 있는 소(와우)’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칠불사다. 칠불사 경내에는 소의 젖으로 해석하는 샘물인 ‘유천’이 있고, 소의 몸통에 해당하는 운상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칠불사는 서산대사, 부휴선사 등 유명한 선승들의 일화가 남아 있고, 이곳에서 득도한 고승들도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칠불사가 9km 아래쪽의 쌍계사 말사임에도 ‘동국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당당히 걸려 있는 이유다. 도응스님은 “아자방에서 수행하신 스님들이 잘 풀리셨기 때문에 이곳에서 참선하고 싶어 하는 스님들의 민원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허왕후가 ‘강남 맹모’의 원조? 칠불사에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운상선원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7왕자 설화와도 이어지는 곳이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난 7왕자들은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김해에서 수행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야산, 화왕산, 와룡산 등지로 옮겨 다니다 마침내 기원후 101년 지리산 자락 운상선원 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7왕자의 성불(成佛)을 기념해 칠불사(칠불암)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칠불사 대웅전에는 이를 기리는 7부처가 모셔져 있고, 자식을 그리워한 김수로왕 부부가 연못 물에서 부처가 된 7왕자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영지’도 있다. 칠불사에서 계곡을 따라 화개장터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수로왕이 7왕자를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태왕궁)을 지었다는 범왕(凡王)마을,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대비마을(大妃洞·화개면 정금리)도 있다. 또 지리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산청에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피라미드형 무덤도 있고, 북쪽의 함양에는 구형왕대에 쌓았다는 추성도 있다. 이에 따라 지리산은 역대 가야왕실이 수시로 들락거린 산이었으며, 칠불사는 지리산권 가야불교의 중심무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동의 차꾼들은 우리나라 차 문화 역사 역시 가야에서 찾곤 한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 인도에서 차 종자를 가져옴으로써 차 문화가 지리산까지 퍼졌다는 주장이다. TV 휴먼다큐에도 소개된 지리산 ‘차도사’ 송화정 씨는 “아들들의 수행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지리산까지 찾아와 차를 공양한 허왕후야말로 ‘강남 맹모’의 원조”라고 말할 정도다. ○하동의 숨은 도사들하동에는 숨은 듯 자리 잡은 명소가 적잖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이 생전에 즐겨 찾은 곳으로 유명한 화개장터의 다우찻집은 수제차 전문점이다. 다우찻집의 이승관 사장은 손맛으로 차를 덖는 ‘덖음 도사’로 유명하다. 그는 법정 스님이 자신이 덖은 차 맛에 반해 직접 ‘청심아’라는 차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정성을 다해 차를 덖으면 덖을수록 차 맛이 다르다”는 게 그의 차 철학이다. 화개장터에서 차 한잔을 마신 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도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바로 악양면 정서리의 ‘화사별서’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후손 조재희(1861∼1941)가 조성한 고택인데, 200m²(약 60평)에 이르는 수려한 연못은 한때 식솔만 40여 명이던 이 집안의 가세를 짐작케 한다. 고택을 관리하고 있는 조덕상 박사는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길상’은 6·25전쟁 때 사망한 육촌 장형의 실제 이름이고, 고향을 떠나 만주를 돌아다니는 스토리는 우리 집안 이야기를 차용한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세계 100인 공학자’에 선정된 기술사인 조 박사는 화사별서의 원형 보존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현재 화사별서의 안채와 행랑채는 원형 그대로이고, 조 박사의 부친인 조한승 옹(97)이 살고 있다. 지금도 안채 마루에 앉아 유교 경전인 ‘서전 서문’을 끝까지 암송해내는 노옹의 모습에서 도인의 풍모도 느껴진다. ‘서전 서문’을 열심히 외면 도에 통한다는 얘기가 유림 일부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칠불사처럼 해발 850m 고지대에 있는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청암면 묵계리)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묵계 출신의 강민주 도사(한풀선사)가 1983년부터 ‘청학이 깃드는’ 이 터에다 고조선 시대의 소도(蘇塗)를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건국전을 비롯해 1000개가 넘는 돌탑, 한반도와 만주 고토를 상징하는 듯한 연못 등은 사진 촬영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 화개장터에서 삼성궁 가는 길이 벅차다면 하동읍에 있는 송림공원을 추천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군락지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힐링이 된다. 글·사진 하동=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2022-06-18 03:00
설문대할망이 빚은 탐라… 돌 하나하나 오백장군의 천군만마 기운《제주도는 한민족이 별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알려주는 증표들을 많이 간직한 곳이다.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하는 여신(女神)이 있고, 삼태성(三台星)을 상징하는 세 명의 건국시조가 등장하고, 세상 만물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도 존재한다. 하늘의 강인 은하수를 상징하는 듯한 물도 있다. 제주의 별 신화와 기운을 느껴보는 것은 이국적인 제주 풍광만큼이나 색다른 체험이다.》○ 제주도지사가 주재하는 한라산신제 제주대 후문 근처, 소산오름 기슭에 위치한 산천단(제주시 아라일동 392). 곰솔 군락지인 이곳은 제주 사람들이 특별히 신성시하는 공간이다. 매년 한라산의 산신을 모시는 제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한라산신제에서는 제주도지사가 초헌관(제향 때 첫 잔을 올리는 제관)을 맡도록 조례에서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한라산신제의 역사는 깊다. 제주가 독립된 나라이던 탐라국 시절부터 시작돼 고려 후기인 1253년(고종 40년)에는 국가 차원의 제례로 발전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제주목사는 매년 산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라산신제는 원래는 음력 정월 한라산 백록담 북쪽 기슭에서 봉행됐다. 한라산이 제주의 중심이자 하늘의 별 기운이 지상에 뻗어 내리는 신령스러운 터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한라(漢拏)’라는 산 이름이 “은하수(은한·銀漢 혹은 운한·雲漢)를 끌어당김”의 뜻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즉, 한라산 백록담의 물이 바로 은하수가 흘러내려온 하늘의 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제주목사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백록담까지 올라가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제물을 지고 험한 길을 올라가다가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성종 1년(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약동은 결단을 내렸다. 백록담에서의 산신제 폐단을 임금에게 고한 뒤 지금의 산천단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했다. 산천단은 풍수의 눈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은 터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 숲 한가운데에 차려진 돌 제단은 푸른 이끼가 덕지덕지 끼어 있고, 높이 솟은 곰솔 8그루가 제단을 수호하듯 배치돼 있다. 이약동은 산천단이 한라산신이 머무르기에 적당한 터라고 판단한 듯하다. 산천단은 커다란 곰솔들이 그늘을 만들어 줘 더운 여름날에도 산책과 힐링하기에 좋은 명소다. ○제주 원도심에 출현한 북두칠성제주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인 한라산은 제주도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과도 연결된다. 제주의 1만8000여 신들 중 가장 으뜸 신인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라는 섬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자, 나중에 한라산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또 제주 오백(500)장군을 길러낸 설문대할망은 사실상 제주판 마고(삼신)할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창세 신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제주돌문화공원(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이다. 330만 m²(약 100만 평) 대지 위에 제주의 희귀한 돌들을 전시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설문대할망과 그 자식들인 오백장군 이미지를 형상화한 돌 기념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한편으로 공원 내 돌박물관 옥상에 마련된 대형 연못(하늘 연못)은 물 위를 걷는 포토존으로 유명한데, 저 멀리 한라산이 연못 위로 비치는 반영(反影)은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듯하다. 설문대할망, 즉 마고할미는 별로 치면 북극성에 해당한다. 북극성은 삼태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세 쌍의 별로 이루어진 삼태성은 제주도에 나타난 세 명의 신인(神人)에 해당한다.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인 삼을라(고을라, 양을라, 부을라)는 삼태성의 기운이 밴 삼성혈에서 출현했다. 이들이 바로 탐라국 개국시조가 된다. 삼성혈(사적 제134호·제주시 이도1동 1313)은 제주시 구도심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지반이 꺼져 움푹 팬 넓은 터에 품(品) 자 모양으로 세 개의 구멍이 난 곳이다. 세 신인이 각각 세 구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고 한다. 신성한 구멍들 앞에는 삼성혈이라고 쓰인 돌 비석이 있고, 그 앞으로 돌로 만든 제단 세 개도 나란히 있다. 이곳은 폭우가 쏟아져도 고이지 않고 폭설이 내려도 쌓이는 일이 없다고 한다. 명당에서 목격되는 현상이 이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바다 저 멀리 벽랑국에서 온 세 명의 공주들과 혼인을 했다. 세 공주를 맞이한 곳이 연혼포(황루알)이고, 세 공주가 목욕재계한 곳이 혼인지이고, 그들이 신방을 차린 곳이 신방굴이라고 불린다. 특히 혼인지와 신방굴(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은 남녀 간 인연을 맺어주는 기운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인기를 끄는 곳이다. 설문대할망과 세 성인이 출현하는 제주 신화는 김수로왕의 도읍 설화와도 묘하게 연결된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이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신답평에 행차해 사방의 지형을 살펴본 후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만드니 7성인이 머물 만한 곳”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제주 신화에서도 하나(설문대할망과)에서 셋(삼성)이 나오고 또 일곱이라는 수도 등장한다. 제주도 원도심의 칠성단(북두칠성 상징물)이 바로 7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주목’에서는 “삼성이 처음 나왔을 때 삼도로 나눠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살았기 때문에 칠성도(七星圖)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또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고도 했다. 이를 근거로 제주시에서는 2011년 칠성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7개의 칠성단 표지석을 세워두었다. 그 배치된 곳이 하늘의 국자 모양 북두칠성과 같다. 제주시 중앙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에 있는 칠성단은 제주 원도심을 구경하면서 하나하나 그 위치를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뿐만 아니다.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의 불탑사 오층석탑도 삼태성 및 북두칠성과 관련 있는 곳이다. 중국 원나라 순제의 부인인 기황후는 삼태성과 북두칠성의 기운을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모국 제주도에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명당을 이룬 원당봉에 오층석탑을 세운 후 마침내 아들(소종 황제)을 얻었다. 실제로 오층석탑은 명당 에너지가 충만한 터이고, 지금도 자식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불탑사 주지 스님의 얘기다. 제주도에서 별의 흔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하늘의 별세계를 구경한 듯한 뿌듯함도 느껴진다.카페 200곳 자유이용권부터 환경 지키는 포인트기부까지… 비용 줄이고 보람은 두 배 통합 예약 플랫폼 ‘제주패스’제주도 여행을 알차고도 보람되게 즐길 수 있도록 고안한 플랫폼이 최근 젊은 여행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항공, 숙박, 맛집, 이동수단, 여행 콘텐츠 등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는 통합 예약 플랫폼인 제주패스(JEJUPASS)다. 스마트폰 앱으로도 선보인 이 플랫폼은 ‘제주도 카페 자유이용권’(1만 원)을 구입하면 제주 지역 인기 카페 200곳에서 아메리카노를 3일간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페패스’ 등 실속 기획 상품으로 여행객들의 호평을 얻고 있다. 국내 여행업계 최초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개념을 도입해 가치중심 여행을 추구하고 있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패스 이용자가 가입하는 ‘그린 앰버서더 멤버십’ 제도가 대표적이다. 멤버십 여행자는 상품 구매 시마다 지출한 비용의 5%까지 적립금(포인트)으로 돌려받게 되며, 이 중 1%는 기부 포인트로 전환돼 제주패스 ESG 캠페인(환경, 동물, 복지 등 6개 분야) 중 기부자가 지정하는 캠페인에 자동 적립되는 시스템이다. 제주패스 설립자인 윤형준 ㈜캐플릭스 대표는 “5월 기준으로 총 기부액이 1000만 원을 돌파했고, 6개 캠페인 중 환경보호 캠페인은 목표 금액의 78%를 달성했을 정도로 여행객들의 호응도가 높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여행객들이 사회에 공헌하는 가치중심 여행에 눈을 뜨게 됐다는 설명이다. 글·사진 제주=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2022-06-04 03:00
건강 지켜주는 든든한 집사,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심형 요양 시설KB손해보험은 일찌감치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헬스케어 시장에 진출했다. 2016년 금융업계 처음으로 자회사인 KB골든라이프케어를 설립해 노인요양 사업에 진출한 후 지난해 10월에는 헬스케어 자회사인 KB헬스케어를 만들었다.‘업계 최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신사업 진출과 디지털 전환에 선도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회사 측은 올해부터는 ‘업계 최고’에 도전하기 위해 사업의 본격화에 매진한다는 방침이다. KB헬스케어, 서비스·커머스·데이터를 아우르는 통합 헬스케어 플랫폼 제공헬스케어 신시장 진출과 산업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KB헬스케어는 ‘헬스케어 플랫폼을 통한 서비스중개업’을 주된 사업으로 확정했다. 기존의 헬스케어 솔루션과는 다른 서비스·커머스·데이터를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을 만들어 차별적인 가치를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이름은 ‘오케어(O-Care)’로 지었다. 헬스케어 서비스 공급자들과 소비자가 플랫폼에서 자유롭게 만나 공정하게 거래하며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생태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다. 회사 측은 이를 위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다양한 헬스케어 전문기업들과 협업해 남다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플랫폼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맞춤형 건강관리와 개인화된 경험 제공을 통해 플랫폼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분기 KB금융그룹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헬스케어 서비스 사업도 돋보인다. 국민은행에 근무하는 40대 직장인 이 씨는 “오케어의 맞춤형 루틴을 계단 걷기, 식사 사진 촬영하기, 명상하기로 정해놨는데 루틴 완료 여부가 스마트워치로 자동으로 이뤄지고 오케어에서 받은 포인트로 주말에 아내와 커피를 같이 즐긴다”고 말했다. KB헬스케어는 2분기 이후부터는 임직원 건강관리를 원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건강관리서비스와 금융상품 연계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순차적으로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플랫폼을 통해 국내 헬스케어 산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KB골든라이프케어, 내년 하반기 서울 은평구 일대 신규 요양시설 오픈KB손해보험의 또 다른 자회사인 KB골든라이프케어도 요양 시설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KB골든라이프케어는 2017년 서울 강동구에 ‘강동케어센터(주야간 보호시설)’를 오픈한 데 이어 프리미엄급 노인요양 시설을 속속 설립하고 있다. 2019년 3월 서울 송파구에 설립한 ‘KB골든라이프케어 위례빌리지’와 2021년 5월 서울 서초구에 세운 ‘KB골든라이프케어 서초빌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주택가에 위치한 KB골든라이프케어 서초빌리지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클린존’이라는 글씨가 부착된 엘리베이터가 눈에 띈다. 방호복을 입어야 탑승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로 시설 내 직원이 코로나에 확진된 경우 일정 기간 직원들은 방호복을 착용하고 근무해야 한다. 코로나19 등 전염성 질환 전파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서초빌리지에는 5개의 마을이 있다. 입소자들이 유닛(마을)별로 모여 생활하는 구조다. 1인실과 2인실 중 선택할 수 있고, 병환(病患)이 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 건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정(中庭)과 옥상 정원이 있고, 지하에는 넓은 재활치료실을 갖췄다. 방 구조는 물론 건물 인테리어와 동선 하나 하나 어르신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맞춤형으로 꾸몄다. 식사는 아워홈에서 밥과 죽, 미음 등 맞춤형 식단으로 제공한다. 이미숙 서초빌리지 원장은 “시설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요양 서비스 인력 또한 남다르다”고 말했다. 간호 인력과 요양보호사는 물론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등을 법정 인력보다 충분히 확보했다고 한다. 회사 측은 프리미엄 노인요양 시설에 대한 고객 반응이 좋다고 밝혔다. 위례빌리지는 개소 1년 만에 입소 대기자만 1300여 명을 넘어섰고, 서초빌리지는 정원 80명 시설에 오픈 전 사전 접수에 신청자 300여 명이 몰렸다. KB골든라이프케어는 서울 은평구 일대에 새로운 프리미엄 노인요양 시설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준비 중인 은평빌리지(가칭)는 서울 강동과 강남 지역에 이어 강북 지역으로 사업장을 확장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이를 계기로 수도권 및 주요 광역시로의 서비스 확대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내다봤다. 회사 측은 2030년까지 국내 1위 요양사업자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KB손해보험의 신사업 행보도 속력이 붙고 있다. 금융과 비금융을 연결하는 플랫폼 구축 등을 선도해 고객의 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행보가 주목된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2022-05-30 03:00
유채꽃 필 무렵 그 바다에 달이 뜨면… 어디선가 고고한 학 울음소리《굳이 산을 타지 않아도 산을 감상하는 맛이 나는 곳이 있다. 전남 장흥에서는 비상하는 학의 형상을 한 산, 묵직한 산세가 위풍당당하게 보이는 사자산, 정상에 멋진 바위 관을 두른 임금 산 등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빼어난 산의 형상과 함께 양념처럼 버무려진 스토리는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등 필담 좋은 소설가들을 유독 많이 배출한 문인의 고장답다. 어디 그뿐이랴.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갑오징어, 키조개 등 싱싱한 횟감은 봄철 입맛까지 북돋워준다.》○‘천년학’의 무대, 선학동 유채마을 전남 장흥군 득량만의 작은 포구. 바닷가 마을은 물이 차오르고 달이 뜰 때면 서양의 늑대인간 변신 전설처럼 모습이 확 바뀐다. 마을 뒷산인 관음봉은 양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의 모습으로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을은 변신한 학의 품에 포근히 안긴 형상이 된다. 이 마을이 선학동(仙鶴洞)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선학동에서 2.5km가량 떨어진 진목마을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청준이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스토리를 불어넣었다. 그는 ‘선학동 나그네’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선학동에 밀물이 차고 산이 학으로 변신할 무렵, 남도의 소리꾼인 늙은 아비가 눈먼 어린 딸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느덧 소리꾼 부녀가 날아오르는 듯한 학과 함께 소리를 하게 되자 선학이 소리를 불러내는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계에 이른다. 이른바 득음(得音)의 경지다. 목적을 이룬 부녀는 마을을 떠났다. 이후 포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판으로 바뀌게 되고, 물을 잃은 관음봉은 더 이상 학으로 변신할 수 없게 됐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눈먼 딸이 다시 선학동에 나타났다. 관음봉 명당에 묻어달라는 아비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득음한 딸은 학을 부르는 소리로써 명당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을 홀린 다음 아비 유골을 암장하고 떠났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학이 되살아났다는 믿음을 선물처럼 남겨두고서…. 실제로 옛 모습을 잃은 선학동은 외지인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로 변신했다. 2006년 임권택 영화감독이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아 만든 영화 ‘천년학’이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마을 갯가 둑에는 ‘천년학’ 세트장(방앗간 겸 선술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인데, TV드라마 촬영지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학동은 이후 유채마을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마을 주변 논밭과 산자락이 봄만 되면 노랗게 물든 유채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유채꽃밭은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규모인데, 길이 산책하기 좋도록 잘 다듬어져 있고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정자도 마련돼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유채꽃밭이 득량만의 쪽빛 바다와 어울려 몽환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장흥 지키는 스핑크스 산 장흥 남쪽 선학동이 노란 유채꽃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무렵이면 북쪽 제암산(807m) 능선에서는 철쭉이 진분홍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바로 제암산 곰재 능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철쭉평원이다. 곰재 능선에서 간재삼거리를 거쳐 사자산까지 이어지는 평원에는 30년 수령의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펼쳐지는 진분홍빛 꽃밭 길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린다는 데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올해는 철쭉이 일찍 만개해 지금 방문하면 진하디진한 꽃빛깔을 놓친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주변 경관이 충분히 보상해준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곰재 능선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북쪽으로 1.5k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제암산의 정상이 보인다. 정상은 임금 제(帝)자 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30m 정도 되는 바위가 3단 형태로 서 있는데, 널찍한 바위 꼭대기는 수십 명이 너끈히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크기다. 이 바위를 향해 주변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봉우리들이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임금바위, 즉 제암(帝巖)이라고 부른다. 천기(天氣)가 뭉친 바위는 신령한 기운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의미로 ‘제암단’이라고 부른다. 가뭄 때면 바위 기운에 기대 비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곰재 능선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사자산(666m)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사자산은 제암산, 억불산과 함께 장흥의 삼산(三山)으로 불린다. 사자산은 위엄 서린 표정으로 장흥읍을 굽어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장흥을 지키는 스핑크스’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일본 후지(富士)산을 빼닮았다고 해서 일본인들 사이에 ‘장흥 후지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자산은 산 아래에서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보이지만, 곰재 능선에서 바라보면 우람한 사자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상 서쪽의 사자 머리(사자두봉)에서 능선의 사자 등을 따라 사자 꼬리(사자미봉) 모습이 펼쳐지는데 마치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두봉에는 산신제를 올리는 큰 바위가 제단처럼 마련돼 있고, 가을에는 사자 갈퀴처럼 산등성이가 누런 억새로 우거져 더욱 장관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곰재 능선에서는 철쭉 축제를 즐기면서도 북쪽의 임금바위와 남쪽의 사자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氣) 체험 스폿(spot)’이 되는 셈이다. ○피톤치드 향과 장흥삼합 건강식 북쪽 제암산과 남쪽 선학동 중간 지점에 있는 천관산 역시 정상에 솟은 특이한 바위들로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산이다. 여기저기 늘어선 여러 기의 입석(立石)들이 마치 머리에 쓰는 관처럼 보인다. 천관산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들과 바위들이 불꽃 형상으로도 보인다. 동양의 음양오행론으로 분류하면 화(火) 기운이 강한 산에 해당한다. 이러한 산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기운 때문일까,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장흥 출신 문인만 60명이 넘는다. 천관산 기슭에는 이를 기념하는 천관문학관(대덕읍 천관산문학길 301)이 있다.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청준, 한승원 작가를 비롯해 송기숙, 김녹촌, 이승후 등 장흥 출신 작가들의 흔적이 전시돼 있다. 전남 남해에 있는 장흥을 여행하려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최소 1박 2일은 잡아야 한다. 건강을 고려한 숙박지로는 억불산 자락의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장흥군이 운영 중인 이곳은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삼나무 한옥 등 건강 체험이 가능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40년생 이상의 아름드리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가득하고, 편백소금찜질방에서는 힐링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약은 필수다. 장흥의 먹거리 또한 건강 보양식으로 즐길 수 있다. 장흥 하면 장흥삼합과 갑오징어를 빼놓을 수 없다. 장흥삼합은 영양소 풍부한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 참나무에서 키운 표고버섯, 장흥산 한우가 어우러진 보양 음식이다. 세 가지 음식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맛이 매우 좋다. 장흥 갑오징어는 신선한 회로 먹거나, 진한 먹물과 함께 먹는 먹찜으로 유명하다. 몸통에 큰 뼈를 가지고 있는 갑오징어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봄철에 가장 맛있다. 일반 오징어에 비해 식감이 매우 좋아 미식가들의 식단에 자주 오르는데, 약으로도 쓰이는 갑오징어의 먹물과 함께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글·사진 장흥=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2022-05-21 03:00
어두울수록 빛나는 신선의 누각… 아랑의 원혼마저 고이 접어 나빌레라《돌벼랑 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누각에 서니 아래로는 바람 따라 일렁이는 물결 위로 녹색 풍경화가 펼쳐진다. 오솔길을 따라 산새 지저귀는 산사에 오르다 보면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마저 잊게 된다. 수려한 경치뿐이랴. 이곳은 한민족 시조인 단군을 모신 사당, 조선의 빼어난 목조 건축물,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 등 내력 깊은 유적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전설의 고향’에서나 등장하는 설화 같은 실화(實話)가 전해져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바로 경남 밀양 시내에 있는 영남루(보물 제147호)다. 종교와 역사와 민속의 종합전시장인 영남루는 하루 온종일 노닐어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는 도심 여행지다.》○거북 명당 누각엔 유불선이 한자리에! 사방이 탁 트인 누각인 영남루는 그 규모와 입지 환경이 빼어나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밀양강을 굽어보고 있는 영남루는 지형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영남루 건너편 강변에서 바라보면 거북의 머리처럼 불룩하게 생긴 둔덕 위에 영남루가 서 있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신령스러운 거북이 산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부를 만한 터다. 거북 머리인 둔덕에서 시선을 옮겨가면 거북의 목 부위인 잘록한 고개가 살짝 보이고, 바로 이어서 거북 등에 해당하는 아동산(88.1m)도 보인다. 이 일대가 모두 영남루 권역에 해당한다. 이 신령스러운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은 쪽은 불교다.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영남루 명칭도 이 절 이름에서 빌렸다고 한다. 영남사가 폐사된 이후 고려 공민왕 때(1365년) 누각 규모를 크게 중수했고, 조선시대에 병화(兵禍)나 실화(失火)로 불타버렸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현재의 건물 형태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관청 건물(밀양도호부 객사)로 변신한 영남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건물 좌우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이 본채를 호위하듯 배치돼 있다.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쳐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풍채가 빼어난 외관만큼이나 누각 안의 단층 역시 창의적이면서도 화려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유학을 신봉하던 관료 집단이 조성한 누각임에도 불구하고 도교를 상징하는 코드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누각 네 귀퉁이에 배치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는 도교적 성격이 짙고, 난간 끝의 빼곡한 구름 문양은 신선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영남루는 밀양을 방문한 신분 높은 사람들을 접대하거나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이 때문에 누각은 당대 명필과 문장가들이 남긴 현판들로 가득하다. 누각 안에는 현판 글씨마다 누가 언제 쓴 작품인지를 친절히 설명해 놓고 있어 감상하기가 좋다. ○아랑 전설과 밀양의 4대 신비 영남루 돌벼랑 아래 강변 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대나무 숲 사이를 걷다 보면 ‘아랑각’이라는 사당을 만나게 된다. 정절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넋을 위로하는 제단이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아랑의 사연은 이렇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년)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 아랑낭자(윤동옥)가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나왔다가 치한의 습격을 받았다. 아랑은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고, 시신은 유린돼 울창한 대나무 숲에 버려졌다. 졸지에 딸을 잃은 부사는 실의에 빠져 자리를 옮겼고 이후 새로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첫날 밤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 담력이 센 부사가 부임해 낭자의 원혼으로부터 사연을 듣고서는 범인을 잡아들인다. 낭자의 혼이 나비가 돼 치한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그 후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낭자의 원혼을 달래려고 세운 아랑각에서는 매년 음력 4월이면 밀양아리랑축제 때 뽑힌 규수가 제관이 돼 제사를 지낸다. 영남루 앞 밀양교 가로등에는 나비를 상징하는 조명등도 설치돼 있다. 밤이 되면 밀양교의 무지개 조명과 함께 발광다이오드(LED) 나비 조명이 환상적인 야경을 펼친다. 영남루엔 ‘아랑 나비’뿐만 아니라 ‘태극 나비’ 얘기도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 날 춘삼월이 아닌데도 태극 문양의 날개가 달린 나비 떼가 사방에서 날아와 영남루 일대 아동산을 뒤덮었다. 나라가 혼란스럽던 시절 사람들은 태극 나비가 길조일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과연 고려가 건국돼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에도 태극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국성접(國成蝶)’이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태극 나비는 그 후 보이지 않다가 1945년 8·15광복 때 아동산 중턱에 있는 무봉사에서 연달아 출현했고,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4년 4월 태극 나비를 우표로까지 제작했다. 영남루와 무봉사의 태극 나비 전설은 밀양의 4대 신비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밀양은 기이한 자연 현상이 나타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재약산의 얼음골 결빙지,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각과 신비한 모습의 향나무, 바위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 등이 밀양의 대표적 신비물로 꼽힌다. ○어깨춤 들썩이는 놀이 공연 영남루 일대가 평범한 터가 아니라는 점은 천진궁(天眞宮)이라는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남루 맞은편에 자리한 천진궁은 조선시대 객사 건물이던 요선관을 새롭게 단장해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 및 역대 건국 시조를 모셔놓은 곳이다. 단군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 동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위패가 있고 오른쪽 서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위패가 있다. 천진궁 건립에는 사연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조선을 장악한 일본 헌병대는 영남루를 강점하고 요선관 건물을 옥사로 사용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는 이곳의 전패(왕을 상징하는 위패)가 일제에 의해 땅에 묻히는 수난을 겪었고, 1940년에는 영남루 뒷산인 아동산 중턱에 일본 신사가 설치되면서 영남루 경관이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압살하려는 일제의 간계였다. 그러다 광복 이후 밀양 유지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천진궁의 원래 이름은 대덕전(大德展)이고, 그 출입문은 만덕문(萬德門)이다. 큰 덕을 의미하는 ‘대덕’과 만 가지 덕을 의미하는 ‘만덕’은 단군의 통치를 상징하는 코드다. 지금도 단군숭녕회가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어천대제를, 음력 10월 3일에는 개천대제를 이곳에서 봉행하고 있다. 영남루를 방문한 4월 말, 때마침 천진궁과 영남루 사이 널찍한 마당에서는 민속 공연이 신바람 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6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민속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국가 무형문화재인 밀양백중놀이를 비롯해 밀양법흥상원놀이(경남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 무안용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풍경을 즐기고, 역사를 음미하며, 더불어 전통 놀이까지 더해지니 어깨춤이 저절로 추어지는 듯했다. 영남루를 뒤로하고 아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무봉사가 있다.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출발한 무봉사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으로 유명하고, 운치 있는 풍광 때문에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무봉사는 밀양 출신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표충사와도 인연이 깊어서 인근에 사명대사 동상을 세워놓고 있다. 사명대사 동상을 지나면 밀양읍성과 밀양관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산책로 코스가 전개된다. 특히 밀양읍성의 망루에 올라서면 밀양강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이렇게 영남루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저물고, 밤이면 영남루 야경이 또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글·사진 밀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5-07 03:00
海神이 지킨 신들의 정원… 정약전의 유배문화 활짝《귀양살이 중인 두 형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유배지가 더 좋다고 뽐냈다. 동생은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겨울 해가 한양에 비해 길고 여름 해는 짧다”며 강진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으스댔다. 형은 이에 질세라 “흑산도의 여름날엔 갈옷과 삼베옷 입을 일이 드물고 겨울날엔 서리가 내리거나 얼음 어는 것을 보기 힘들다. 강진이 이처럼 좋은가” 하고 응수했다. 동생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고, 형은 손암 정약전(1758∼1816). 귀양살이하기가 고약했던 곳으로 소문난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난 정약전은 이곳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세상과 격리된지라 무릇 세속의 교만, 사치, 음란, 도적질 따위의 악습에 물들지 않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정약전이 예찬한 흑산도를 만나러 바닷길 여행에 나섰다.》○산 정상에 나타난 철마(鐵馬) 흑산도는 과거부터 서남단의 어업 전진기지이자 해상 교통로였기 때문에 해적 혹은 왜구가 늘 들끓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무장 군인들이 수색과 토벌로 땅을 지키는 주요 수토(搜討) 지역 중 한 곳이었다. 수토는 군인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조선 선비들은 역사적 유적지나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땅을 관찰하고 돌보는 등으로 수토 행위를 했다. 정약전이 흑산도 일대 생물 생태계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긴 것도 땅을 지키는 수토였다. 정약전의 ‘흑산도 수토’를 쫓아 뱃길에 몸을 실었다. 목포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2시간 남짓 높은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흑산도에 도착했다. 관광용 택시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해안일주도로(25.4km)를 따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라산 정상의 제사 터. 흑산도에서 가장 북쪽 지대인 이곳은 고대에 산 정상에서 노천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풍수적으로 하늘의 천기(天氣)가 하강하는 터에다 제사 단을 마련해 놓은 것을 보면 신성한 공간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이런 터에서 명상이나 기도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해 보는 것도 수토에 해당한다. 제사 터에서는 철제마 3점을 비롯해 주름무늬병, 줄무늬병편 등 제의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곳을 조사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은 “철제마는 큰 바다를 오가는 무역선이나 사신선이 하늘에 무사 항해와 운수대통을 빌던 신앙적 행사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 일대가 봉수대로도 활용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인종 1년(1123년) 7월 4일, 흑산도를 지나가면서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王城·개경)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했다(‘고려도경’). 한편 상라산 정상은 흑산도 제1경이라 할 만큼 전망도 수려하다. 이곳 전망대는 일출과 일몰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뱀이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듯 생긴 12굽이길이 장관을 이루고, 길 아래로는 예리항의 평화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상라산 정상에서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일주도로와 만나게 곳에 다다르니 비로소 흑산도를 상징하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노래비를 뒤로 하고 일주도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면 읍동마을 뒤편 무심사지(无心寺址) 석탑과 석등을 만나게 된다. ○ 흑산도 신들을 부르는 초령목 ‘무심사’는 신라 말인 9세기경 창건돼 14세기까지 운영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최근 학술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역사적으로 흑산도는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거점지대였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해 해상왕으로 활동하던 시절 흑산도는 산성과 관청, 사찰이 들어서는 등 중요한 해양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흘러 절은 폐사됐지만 이곳 읍동마을 사람들은 석탑을 ‘수탑’, 석등을 ‘암탑’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다.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지만, 석탑 옆 오래된 팽나무(당산나무)가 이곳이 마을 주민들의 신앙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무심사지에서 빠져나와 시계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흑산도 신들이 노니는 정원을 만나게 된다. 흑산도에서 가장 성대하게 당제가 열렸던 ‘진리당’이 바로 ‘신들의 정원’이다. 마을 숲속 서낭당과 이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변의 용왕당으로 구성된 진리당은 매년 정월 초부터 3일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뱃길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던 곳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서낭당은 숭어의 꼬리 부분 명당에다, 용왕당은 숭어의 머리 부분 명당에다 세워졌다는 게 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다. 이 일대가 ‘신들의 정원’으로 불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진리당 주변으로 당집을 보호하는 성황림이 우거져 있는데, 그 안에 귀신들을 부른다고 해서 ‘귀신나무’로 불리는 초령목(招靈木) 자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초령목은 제주도와 흑산도 권역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보호수이기도 하다. 현재 수령 300년인 초령목은 1994년에 고사했고, 대신 어린 초령목 4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초령목 자생지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신들과 만나는 색다른 체험을 원한다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 흑산도의 짝꿍 홍도 비경 흑산도 북쪽 권역이 역사적이고 토속적 문화의 보고라면, 흑산도 남쪽 권역은 조선 시대 유배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1801년) 당시 천주교도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정약전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도록 처벌하는 ‘절도안치’라는 종신형으로 흑산도에 오게 됐다. 이후 정약전은 흑산도 남동쪽 사리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촌서당’을 꾸렸고, 섬 주민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것. 현재 사리마을에는 1998년에 복원한 사촌서당 건물이 있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 먼바다를 바라보는 정약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안군은 아예 이 일대를 유배문화공원으로 꾸몄다. 고려 시대부터 흑산도로 유배된 이들을 추모하는 비석과 유배인 안내 비문, 유배문화체험장(유배인 안치 가옥) 등이 조성돼 있다. 한편 사리마을 인근의 천촌마을 입구에는 최익현 유적이 있다. 조선 고종대의 문신이자 항일의병장인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됐다. 그는 “흑산도를 거쳐 간 명사들은 많은데, 이를 기억할 만한 유적이 하나 없다”고 한탄하면서 천촌마을 바위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기자가 봉한 강산이요,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여)’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흑산도 여행을 마친 후 뱃길로 30분 남짓한 거리의 홍도로 가볼 일이다. 흑산도가 여성적인 섬이라면 그 짝꿍인 홍도는 남성적인 섬으로 비교된다. 경치를 우선시한다면 흑산도를 거쳐 홍도로 가는 게 감흥이 훨씬 크다. 다양하고도 기이한 형상을 한 홍도의 기암괴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장관이다.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는 땅에서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섬을 돌아봐야 그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독립문바위, 부부탑 등 홍도 10경 외에도 33경 등 섬 전체가 황홀한 비경을 이룬다. 글·사진/흑산도·홍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4-16 03:00
봄내음에 꽃힌 남도마을… 섬진강 물살따라 ‘꽃캉스’ 유혹《봄꽃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지리산까지 행진하고 있다. 전남 광양 매화마을에서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 매화는 섬진강변을 울긋불긋 수놓더니 전남 구례 지리산까지 파고든다. 매화에 뒤질세라 지리산 자락 구례군 산동면에서는 산수유가 또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광양과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이어지는 봄꽃 길은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의 길’이기도 하다. 1597년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궤멸되다시피 한다. 이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섬진강변을 따라 북상하며 수군 재건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때 그 육로는 이순신의 희생과 고뇌로 얼룩진 길이었지만, 4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화사한 꽃길로 변신했다.》 ○ ‘노오란 열꽃’이 핀 산수유마을 전남 구례는 이순신이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곳이다. 이순신이 육지에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군량미를 처음으로 확보했던 곳이 바로 곡창지대 구례다. 백의종군으로 남하했을 때도 구례 현감과 백성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구례의 이순신 백의종군 길목은 지금은 산수유마을로 변신했다. 역사를 밟고 가는 길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봄날 봄꽃길만큼은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노란색 꽃이 봄의 합창을 하고 있는 구례 산수유마을은 산동면 상위마을, 반곡마을, 계척마을 등 산수유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을 가리킨다. 산수유마을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상위마을은 아래로 굽어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정자 ‘산유정’에 올라서면 산수유꽃을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으로 묘사한 오세영의 시가 떠오른다. 상위마을은 지리산 만복대 자락을 따라 형성된 다랑논과 계곡 사이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시내가 정취를 더해준다. 산수유는 노란 꽃잎 때문에 흔히 개나리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두 꽃은 빛깔 분위기가 다르다. 개나리의 샛노란 빛이 해맑은 어린아이와 같다면 산수유의 ‘노오란’ 파스텔톤 빛은 고아한 여성 같은 느낌을 준다. 상위마을 아래로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 유명해진 반곡마을의 산수유 꽃담길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꽃담길을 따라 더 아래로는 산수유문화관과 산수유사랑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배기에 조성된 사랑공원에는 산수유를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과 함께 산수유 정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여러 군데 있다. 평일임에도 빨간 산수유즙을 파는 좌판들이 들어섰고, 이곳에서 맛보는 산수유 막걸리 한잔은 봄꽃 향연의 흥취를 더욱 돋워준다. 한편 전북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계척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있는 곳이다. 중국 산둥반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산수유나무는 1000년 전 산둥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산수유나무의 약 65%(10여만 그루)가 이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에는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라는 푯말도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이 구례를 오갈 때도 이 산수유나무를 보았을 게다. ○구례 매화엔 스토리가 있다 꽃나무는 임자를 만났을 때 그 향기가 더욱 진해진다. 꽃나무가 사람을 만나 ‘스토리’라는 보이지 않는 물감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구례 매화들이 그렇다. 구례의 매화나무는 저마다 스토리 빛깔이 다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암향(暗香)도 독특하다. 먼저 구례 화엄사엔 홍매화와 들매화가 있다. 홍매화는 1702년 계파선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매화나무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 귀퉁이에 서 있는 이 홍매화는 금강송처럼 꽃송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형태다. 해마다 봄만 되면 장엄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이 매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화엄사로 몰려든다. 화엄사 측은 아예 ‘화엄 천년의 공간, 향기에 취하다’는 주제로 2022년 ‘홍매화·들매화 전문 사진 및 휴대전화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홍매화 주변은 전문 사진작가들과 일반인들의 사진 촬영으로 야단법석이다. 홍매화는 꽃색이 매우 고혹적이다. 햇살 방향과 날씨에 따라서도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은 분홍빛, 약간 밝게 흐린 날은 선홍빛, 아주 쾌청한 날 역광을 받았을 때는 검붉은 빛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사 홍매화는 ‘흑매’로도 불린다. 홍매화와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또 다른 매화나무는 화엄사 뒤편 구층암 근처(길상암 입구)에 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저절로 자란 야생 매화인 들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다. 원래 4그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그마저도 노쇠해 절정의 개화기인데도 활짝 핀 꽃송이를 보기가 어렵지만 올곧게 수행한 노승(老僧)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뿐이랴. 산사에서 벗어나 속세로 내려오면 매천사(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의 매화를 빼놓을 수 없다. 매천사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1855∼1910)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 이곳저곳에 심어놓은 매화나무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듯, 맑고도 서늘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다. 그 향기에는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하는 매천의 절규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매천의 발자취는 그 이웃인 운조루(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도 나타난다. 경부 최부잣집과 곧잘 비교되는 호남의 대부호 집이 운조루다. 이곳 류씨 주인들은 매천과 가까이 교류했다. 매천은 칠언시로 운조루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했을 정도로 이 집을 좋아했다. 또 운조루의 주인 류형업(1886∼1944)은 매천의 자결 소식을 듣고서는 “이것은 가히 의로운 죽음이라 할 것이니 유방백세(流芳百世·향기가 100대에 걸쳐 흐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글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운조루 사랑채와 연결되는 정자는 매천 등 구례의 선비들이 즐겨 모여 담소를 나누던 현장이다. 이 정자에서는 마당 쪽으로 오래된 매화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운조매’라고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1776년 운조루를 지을 당시 이식했던 나무가 고사한 뒤 뿌리 부근의 가지 하나가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의 역사와 함께해 온 운조매는 부자이면서도 나눔을 적극 실천해온 집주인들을 닮은 듯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내는 게 인상적이다. 운조루 바로 인근에는 또 다른 부자 명당인 곡전재가 있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의미로 금환낙지(金環落地) 명당터로 불리는 이곳은 금가락지처럼 둥글게 돌담을 두른 형태가 특징적이다. 2.5m 정도의 돌담장 사이로 홍매화, 백매화, 산수유꽃이 동시에 피어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현재 한옥 체험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에서 봄꽃을 감상하면서 부자 터 기운을 덤으로 쐬어보는 것도 좋다. 구례 산수유마을처럼 온 동네가 매화로 치장한 곳을 보고 싶다면 광양 매화마을로 가볼 일이다. 매천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해마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다압면 매화마을이 유명한데, 특히 16만5000m²(약 5만 평) 이상의 산자락에 10만 그루의 매화나무들이 들어선 홍쌍리 청매실농원의 풍경이 빼어나다. 아득한 구름숲처럼 보이는 매화꽃밭 사이로는 평일임에도 인파가 넘쳐나고 주차장은 차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화사한 홍매화와 맑고도 깨끗한 백매화 숲 너머로 펼쳐지는 섬진강변 풍경을 즐기기 위해 봄이면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봄꽃 나들이에는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나는 벚굴이 제철이다.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엄청난 크기에 오동통하면서도 쫄깃쫄깃한 굴 속살이 일품이다. 바다에서 나는 굴과 달리 담백한 맛도 난다. 글·사진/구례·광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4-02 03:00
학점은행제로 다양한 융합학문 도입동양학과 서양학, 인문학과 빅데이터 등 다양한 학문 분야 간 접합을 통해 창의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융합학문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운영되던 융합학문이 수도권 대학 4년제 학사 과정에서도 선보였다. 한양대 에리카(ERICA)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교양 과목으로 개설한 학점은행제다. 한양대는 2022학년도부터 일정 기준 학점을 이수할 경우 한양대 총장 명의의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학점은행제를 대폭 확대 개편하면서 일부 융합학문 과정을 도입했다. 심리학 전공 코스에 9개의 동양문화학을 교양과목으로 편성한 것이다. 교양과목은 순수 인문학 4과목(동양문화사, 동양사상의 전개, 유교문화의 이해, 동서문화교류사), 한국학 3과목(한국민속문화사, 한국민중생활사, 한국의 유학사상), 동양의 인문응용학 2과목(생활풍수, 생활역학)으로 구성돼 있다. 한양대 사회교육원 관계자는 “기존 심리학 과목(전공필수 8과목+전공선택 12과목)에 동양문화학을 교양 과목으로 배치한 것은 동양 인문학을 습득함으로써 21세기 미래사회를 선도해 나갈 지혜와 능력을 갖춘 실용인을 배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를테면 동양의 역학이나 풍수학에서 수천년간 쌓아온 빅데이터는 현대 심리학에서도 응용이 가능하며, 나아가 동양인의 정서와 사유체계를 다루는 동양 인문학은 심리학 연구 및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9개 동양문화학 교양 과목은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경우 심리학 전공뿐만 아니라 경영학·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체육학·평생교육사 전공 등으로 확대 적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명리학과 풍수학 등 동양문화학은 수도권 일부 사이버대학에서 교과 과정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최초로 학위를 인정하는 학점은행제로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제도권 편입이 기대되고 있다. 한양대 융합산업대학원 박정해 교수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심리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장학금 혜택 등을 부여해 본교 융합산업대학원의 동양학 석사 과정까지 이수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융합산업대학원에서는 풍수학과 명리학 등 동양학 석사 과정이 운영되고 있으며 융합학문 체계로 교과목을 편성해 놓았다고 말했다. 풍수학과 IT기술을 접목시킨 ‘IT기반풍수연구’, 풍수학과 미학이 결합된 ‘풍수미학연구’, 명리학과 사회학 혹은 심리학이 연결된 ‘명리학과 인간관계론’과 ‘명리학과 직무특성’ 등은 기존 교과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코스다. 특히 풍수학은 최근 건축, 부동산, 조경, 도시공학,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용되면서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 만학의 꿈을 키우거나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학점은행제는 토요일과 일요일, 에리카 캠퍼스에서 수업이 이루어진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2022-03-24 03:00
미륵불의 현신이 꿈꾼 이상향… 억겁의 협곡에 묻은 미완의 혁명《평지에서 아래로 푹 꺼진 화강암 벼랑 밑바닥으로는 청록빛 강물이 아득하게 흐르고 있다. 50대 남짓한 나이, 애꾸눈의 한 사내가 가마솥 물 끓는 소리를 내는 한탄강 여울을 하염없이 굽어다본다. 밀려드는 회한과 배신에 대한 분노! 그의 마음 역시 물소리처럼 들끓는다. 이곳은 철원군 한탄강 주상절리길의 드르니 쉼터, 그리고 사내는 1100여 년 전 한반도를 격동시켰던 후고구려 건국의 주인공 궁예(?∼918)다. 그는 스스로 현세에 내려온 미륵불임을 자처하며 철원에서 ‘미륵의 나라’를 꿈꾸다가 918년 왕건의 반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 와중에 잠시 들른 곳이 이곳 드르니 쉼터가 있는 드르니 마을이다. ‘들르다’의 순우리말 ‘드르니’가 의미하듯, 궁예가 들렀다 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탄강이 남북축으로 관통하는 철원은 궁예가 905년 천도한 후 13년간 화려한 전성기와 처참한 몰락을 겪은 곳이다. 따라서 철원 한탄강 물길을 따라가는 여행은 궁예의 흔적을 쫓는 역사 탐방길이기도 하다. 》○한탄강 하늘길에서 만나는 1억 년의 지질 여행 한탄강 물길(주상절리길) 여행은 주상절리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린 잔도를 걷는 ‘한탄강 하늘길’과 한탄강 물 위를 직접 걸어가보는 ‘한탄강 물윗길’로 크게 나뉜다. 하늘길 트레킹은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순담계곡까지 가는 코스와 거꾸로 순담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따라 드르니마을 매표소까지 내려오는 코스 두 가지가 있다. 물길 여행은 가급적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트레킹 코스가 물 기운을 온전히 느껴보는 데 유리하다.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입장료 1만 원(5000원은 철원사랑상품권으로 되돌려줌)을 낸 뒤 트레킹을 시작했다. 철원군이 지난해 11월 개방한 하늘길 잔도는 깎아지른 벼랑에 선반처럼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가 무려 3.6km나 이어지는 길이다. 공중에 떠 있는 길이라고 해서 하늘길로 불린다. 절벽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을 따라 유네스코가 인증한 국가지질공원(주상절리 협곡)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1억여 년 전 화산 폭발로 지하의 화강암이 땅 밖으로 드러난 이후 약 54만∼12만 년 전에 현무암 용암류가 그 위로 흐르게 되면서 생겨난 침식 지형이다. 평지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현무암 협곡이다. 한탄강 하늘길에는 풍광이 빼어난 3개의 스카이전망대, 각기 다른 주제와 디자인으로 건설된 13개의 출렁다리(잔교), 그리고 10개의 쉼터가 있다. 특히 다리 이름을 통해 한탄강 지질을 눈으로 확인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주상절리 틈으로 피어난 돌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돌단풍교, 화강암이 용솟음치면서 가로로 깨진 수평절리가 인상적인 수평절리교, 화강암과 현무암이 공존하는 현화교, 화산 활동으로 흘러나온 마그마가 빠르게 식으면서 생긴 회색 혹은 검은색의 현무암 기공을 관찰할 수 있는 현무암교 등이다. 길 중간중간에 배치된 안내 요원들을 통해서도 한탄강 지질과 관련 설화 등에 대한 구수한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구멍이 숭숭 난 철원의 현무암은 ‘울음돌’이라고도 불린단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게 되자 돌들도 눈물을 흘려 구멍이 나게 됐다는 거다. 전설을 전하는 철원 출신 안내요원의 말에서 역사적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는 궁예에 대한 애틋한 정마저 느끼게 된다.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순담매표소까지는 2시간 정도면 풍광을 충분히 즐기며 여유롭게 사진 촬영까지 할 수 있다. ○물 위를 걸으며 즐기는 물기운 세례 순담매표소가 있는 순담계곡에서부터는 한탄강을 따라 더 북상하는 트레킹인 물윗길 코스가 이어진다. 말 그대로 한탄강 물 위를 걷는 코스다. 순담계곡-고석정-마당바위-송대소(은하수교)-태봉대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탄강 위에 띄워놓은 부교를 걷는 순수 물윗길 2.4km와 강변길을 이용하는 5.6km 등 총 8km 구간인데 따로 입장료(1만 원)를 내야 한다. 이 물윗길은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탄강 수위가 낮아지는 10월부터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3월까지만 운영한다. 물 위를 걸어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다. 흘러오는 물길을 맞받아치면서 걸어가다 보면 온몸이 물로 정화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물의 풍요로운 기운을 받아들이는 상징적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또 물윗길은 잔도보다 걷기가 더 쉽지만 물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풍광은 또 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고석정에서 만나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우뚝 서 있는 고석바위, 거대한 마당바위, 남북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승일교와 비대칭 현수교인 은하수교, 강물이 깊은 소(沼)를 이룬 송대소 등이 물윗길에서 만나는 장관들이다. 물윗길 코스가 끝나는 태봉대교는 번지점프로 유명한데, 궁예의 태봉국에서 다리 이름을 따왔다. 하늘길의 첫 쉼터인 드르니 쉼터와 물윗길의 마지막 코스인 태봉대교가 모두 궁예와 연결되는 것도 인상적이다.○궁예가 민통선 내에 도성을 세운 까닭은? 한탄강 주상절리길(하늘길+물윗길)에서 빠져나와 더 북쪽으로 철원 노동당사(철원읍 관전리)까지 이어지는 길목에서는 궁예 관련 얘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먼저 철원읍과 동송읍의 주산인 금학산은 도선국사(827∼898)가 궁예에게 도읍 터로 천거하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300년 동안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25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궁예는 이 예언을 무시했다. 현재의 민통선 내 고암산(780m·김일성고지)을 주산으로 삼아 왕궁을 조성했고 결국 예언대로 짧은 통치 끝에 무너졌다. 아마도 이는 왕건의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거나 짧게 끝난 태봉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지어낸 말인 듯하다. 궁예가 도선국사의 말대로 서쪽의 금학산을 주산 즉, 배산(背山)으로 삼으면 동쪽으로는 땅 밑으로 흐르는 한탄강이 임수(臨水)가 된다. 한탄강은 양수 시설이 없으면 절벽 밑의 물을 이용할 수 없고 물살이 거칠어 물류 이동로로 삼기에도 부적절하다. 한 나라의 도읍지 물길로는 맞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궁예는 금학산 일대가 비범한 기운을 지닌 땅임을 알아차렸던 듯하다. 금학산 자락 아래 화지4리는 과거 하늘이 낸 황제의 터라는 의미로 천황지(天皇地)로 불렸다. 철원에서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던 시절 왕건이 살았다는 집터도 바로 인근에 있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철원향교지(철원읍 월하리)가 바로 그곳이다. 현재 잡초만 무성한 철원향교지는 풍수적으로 보기 드문 명당 터라는 점에서 거물급 지도자의 집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철원항교 터 건너편 산쪽으로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도피안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담한 산사 마당에는 보물 제223호인 삼층석탑이 있고 본당에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 또한 강원도의 숨겨진 명당 사찰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궁예가 꿈꾸었던 미륵의 세상은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도피안사의 절 이름과도 썩 어울린다. 역사탐방 여정은 북한 철원군 노동당사에서 끝내기로 한다. 북한이 6·25전쟁 직전까지 사용한 노동당사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안보교육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바로 이 너머 북쪽으로는 철원평화전망대가 있고, 거기서 궁예가 건설한 왕궁터 흔적을 망원경을 통해 구경할 수 있다. 글·사진 철원=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3-19 03:00
왕기 누른 국토중앙 석탑, 민심까지 다독이는 마음중심이 되다국토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충북 충주는 예부터 왕업(王業) 또는 왕도(王都)와 관련한 얘기가 무성한 도시였다. 신라 때는 오소경(五小京) 중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으로 국토의 중앙임을 자부한 부(副)수도였고, 고려 때는 한양 평양과 함께 새 도읍지 후보로 어깨를 겨루던 곳이다. 지금도 충주시를 휘감아 돌아가는 남한강변에는 왕기(王氣)와 관련한 비밀스러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왕기를 진압하라” 국보 제6호 탑평리칠층석탑(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건립 당시 국토 중앙에 서 있다고 해서 중앙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형도 범상치 않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오다가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과 합수(合水)한 뒤 S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면서 수태극(水太極)을 이루고 있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로와 수량이 더욱 풍성해졌을 뿐, 지형은 지금이나 천년 전이나 명당 길지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때는 불교가 흥성했던 통일신라. 어느 날 송림사 주지가 중원경(충주)을 지나다가 강물에서 보라색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신비롭고도 장엄한 기운은 탑평리 고을 쪽으로 뻗어나갔다. 보라색(혹은 자주색)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기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는 경주로 급히 돌아가 왕에게 “중원경에 왕기가 있으니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탑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탑평리칠층석탑 건립 배경에 얽힌 전설이다. 남한강변(탄금호) 야트막한 언덕에 조성된 이 탑(높이 14.5m)은 현전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이 일대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됐지만 지금까지도 사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탑은 사찰용 불탑(佛塔)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혹은 기원을 염두에 둔 원탑(願塔) 성격이 짙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국토 중앙에다 이런 탑을 세웠다는 해석이다. 중앙탑의 이 같은 상징성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중앙탑에서 탑돌이를 하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거나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공원 내에는 국내 조각가들의 작품 26점, 야경이 멋진 탄금호 무지개길, 충주박물관, 조정경기장 등 즐길거리도 많아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는 명소가 됐다. ○남한강에 제사 지낸 탄금대 충주는 고려 시대에 들어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국원경(國原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새 도읍지로도 자주 거론됐다. 고려 후기 바다를 통한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인 충주가 천도지로 부상한 것이다.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충주에 이궁(離宮)을 세운 뒤 주기적으로 충주에서 머물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고려 때 신돈, 이인임 등이 주장한 ‘충주 천도론’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충주가 한 국가의 서울이 될 수 있는 기운을 머금고 있는 터였음을 말해준다. 그런 흔적들은 중앙탑에서 물길을 따라 충주댐이 있는 충주호로 가는 남한강변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중앙탑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약 6km)에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시대 가야 출신의 악성 우륵이 충주를 찾은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륵의 애절한 가야금 연주가 들리는 듯한 ‘탄금정’ 정자와 기암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열두대’ 바위가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다. 그런데 이곳이 고려 이후 국가 차원에서 대천(大川·한강)에 제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양진명소(楊津溟所)가 바로 탄금대였다. 탄금대 아래 깊은 소(沼·연못)를 가리키는 양진명소는 한강 상류를 관할하는 수신(水神)인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용추(龍湫) 혹은 용당(龍堂)으로 불렸다. 그리고 수신을 모신 사당인 양진명소사에서는 관 주도로 정례적인 제사가 이뤄졌다. 왕실에 변고가 생겼을 때 기원하는 기고제(祈告祭), 새로 부임한 충주목사가 찾아와 인사하는 고유제(告由祭)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간 양진명소와 그 사당인 양진명소사는 기록만 전해질 뿐, 그 위치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20년 충주 역사 문화를 연구하는 민간단체(예성문화연구회)가 양진명소사의 위치와 모습을 담은 100년 전 사진을 찾아냈다. 연구회 측에 의하면 탄금대 신립장군순절비가 있는 곳이 바로 양진명소사 터라고 한다. 신립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당시 조선 군사 수천 명도 이곳에서 희생됐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2년 양진명소사에서 전사한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열었다. 그러다 약 380년 지난 1981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양진명소사 바로 그 터에 신립장군순절비가 건립된 것이다.○3대 왕 배출하는 삼등산 탄금대에서 다시 충주댐 방향으로 10km 정도 이동하다 보면 조동근린공원(동량면 조동리)을 만나게 된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지만 조만간 ‘풍수와 낙조’를 테마로 하는 이색 체류형 관광지가 들어설 곳이다. 충주시는 이곳에다 2023년 완공을 목표로 ‘천지인 삼태극 풍수 휴양촌’을 건설하고 있다. 그럴싸한 건립 배경도 있다. 조선 세조 때 황규라는 풍수 지관이 있었다. 조선팔도의 명당을 찾아다닌 그는 충주에 이르러 명당을 찾게 해달라고 산신제를 올린 후 잠이 들었다. 이윽고 꿈에서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에 명혈이 있는데, 이 기운을 받아 3대의 왕이 날 것이라는 신선의 계시를 듣게 된다. 위성지도를 보면 박달재로 유명한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마치 삼태극 모양으로 물결을 이루듯 이어져 있다. 3대왕 배출 전설이 나올 만한 지세다. 삼등산 중 휴양촌이 들어서는 조동근린공원은 지등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동산으로 유명한 이곳은 호젓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지등산의 땅 기운을 덤으로 받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왕이 난다는 전설은 삼등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여행 여정인 충주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월악산 영봉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뒤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탄허 스님이 1975년 월악산 자락 덕주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월악산 주변에는 밤하늘의 달빛을 담을 만한 큰 강이 흐르지 않았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충주호가 생겨나면서 비로소 달빛이 비치는 큰물이 생겼다. 그 후 30년이 지나자 예언처럼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2022년이 됐어도 남북통일은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미완성의 예언인 셈이다. 충주댐을 건너 광활한 충주호로 들어서면 호수 저 멀리로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눈에 들어온다. 굳이 예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환상적인 경치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충주호와 영봉이 함께하는 경치는 충주나루의 충주호관광선을 이용하거나, 카페 ‘호수가 아름다운 전망대’(동량면 화암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카페 주인장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반과 월악산은 충주 최고의 비경”이라고 자랑한다. 한편 카페에서 호수 건너편으로는 체험형 테마파크인 활옥동굴과 심항산 숲길을 산책할 수 있는 ‘충주호 종댕이길’이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에 좋은 힐링 코스다. 글·사진 충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3-05 03:00
“호남 민심 잡고 조상의 뿌리 찾으리라”… 태종 이방원의 ‘고향행차’《조선 27대 왕들 중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점 외에는, 전주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진 왕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들은 전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함흥 출생의 태종과 한양 출생의 세종은 공개석상에서 전주가 고향임을 애써 밝혔다. 최근 TV 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왕의 신분으로 전주를 방문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다. 태종의 자취를 좇아 풍패지향(제왕의 고향)인 전주를 찾았다.》 ○사냥 핑계 대고 전주 찾은 이방원 1413년 10월 1일, 한양에서 출발한 태종의 어가는 마침내 완산성(전주성)에 도착했다. 그가 임금에 오른 지 13년 만의 일이자, 조선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500리(약 20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임금이 순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거리다. 게다가 전주는 태종으로서는 정치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곳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전주의 유력 가문들을 제거했다. 호남 출신 개국공신인 심효생(부유 심씨), 오몽을(보성 오씨), 이백유(완산 이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당시 죽임을 당했다. 태종은 이후 정권이 안정되자 전주의 민심을 달랠 필요를 느꼈다. 전주는 전국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호남의 수부(首府)다. 전남북과 제주도까지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태종은 이런 전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족 세력과의 화해가 정국 운영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은 “태종은 전주 사족과 정적(政敵) 관계인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전주를 전격 방문했다”며 “호남 민심을 수습하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에서의 태종은 매우 인자한 군왕이었다. 임금을 맞이하는 예법과 절차에 하자가 발생했어도 관련자들을 꾸짖거나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일을 잘해도 상을 내리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주에서 벗어나자마자 엄격한 군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귀향 도중 임금이 사용하는 말인 내구마가 경기도 탄천교에서 물에 떨어져 즉사한 사건이 생기자, 책임자(광주판관)에게 80대 장형(杖刑) 및 파면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전주에서 대권 꿈 키운 이성계 강력한 카리스마의 절대군주 태종마저 겸허하게 만든 전주는 사실상 조선의 원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건국주 태조 이성계와 그 직계 선조들의 자취가 이곳에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기(王氣)를 느껴보는 여행 시작점으로는 이목대(전북도기념물 제16호)가 의미가 있다. 이목대는 자만벽화마을로 유명한 교동 초입에 세워진 작은 비각을 가리킨다. 이 일대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도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관원과의 불화를 겪어 강원도, 함경도 등지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이목대 비석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라는 고종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고종은 외세의 침탈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900년에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해 조선의 뿌리인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전주 이씨들의 근거지였던 자만벽화마을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새겨진 다양한 벽화를 구경하는 즐거움과 함께 조선 왕실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바로 ‘자만동 금표(禁標)’다. 고종은 이목대를 설치하면서 이곳을 성역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자만동 금표가 있는 담장에는 고종의 손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피우지 못한 오얏꽃’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조선 왕가를 상징하는 오얏꽃(자두꽃)이 결실을 맺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벽화마을의 이목대에서 도로(기린대로) 건너편을 바라보면 오목대가 보인다. 배나무가 많았다는 이목대와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오목대는 원래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30년대 일제가 산허리를 잘라 철로를 깔면서 두 곳을 분리시켜 버렸다. 현재 도로로 차단된 두 곳은 길 위에 설치된 높은 구름다리로 오갈 수 있다. 오목대 역시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는 유적지다. 태조가 잠시 머문 곳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필 비문 등 역사적 기록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 전하는 내용은 대강 이렇다.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전북 남원 황산벌에서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에 들렀다. 그는 이곳에 남아 있던 친지들을 불러 모은 뒤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건국주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豊邑)에서 천하 패권을 꿈꾸며 불렀다는 노래다. 그러니 이성계가 이 노래를 부른 건 자신 역시 고향에서 대권의 꿈을 노골적으로 밝혔다는 의미다. 그가 고려를 전복하려는 위화도 회군을 하기 8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주에는 한나라 황제 유방과 관련된 글자들이 유독 많다.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의 풍(豊), 서문이었던 패서문의 패(沛) 등이 그러하다. ○백제의 궁성지와 전주한옥마을 전주 이씨들의 자취가 밴 이목대와 오목대를 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전주한옥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전주한옥마을은 오목대에서 풍남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태조로’를 중심으로 600여 동의 한옥이 들어선 형태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한 해 1000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명소였다. 한옥마을의 구심점은 경기전이다. 1410년 태종이 자기 손으로 지었으면서도 끝내 참배하지 못했던 경기전은 입구의 하마비부터 눈길을 끈다. 사자 두 마리가 비석을 좌우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전국 각지의 하마비 중 유일한 지정문화재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마비로 꼽힌다. 경기전 내부에는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317호)를 모신 정전을 비롯해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들의 어진과 의장물을 전시한 어진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태를 묻은 태실 등 여러 유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있는 이곳에 한옥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제가 도로를 넓히기 위해 전주성 성벽을 허물어뜨리면서 일본 상인들이 이 일대 상권까지 장악하게 됐다. 이에 전주의 뜻있는 유지들이 조선의 뿌리까지 침범해 오는 일본인들을 막고자 한옥을 짓고 마을을 건설했다고 한다. 경기전을 나서면 그 맞은편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 순교 성지로 유명한 전동성당을 비롯해 풍남문,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 전라감영 등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들러볼 만하다. 한편 기린봉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위치한 오목대와 전주한옥마을 등 주변 지역은 후백제 도읍지와 중첩되는 곳이기도 하다. 900년 견훤이 전주에 세웠던 후백제 왕도의 진산은 기린봉이었고, 견훤 시기에 쌓은 산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견훤이 머물렀던 왕궁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다. 분명한 건 전주가 한 왕조를 창업해낼 정도로 지기가 왕성한 도시라는 점이다.글·사진 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2-19 03:00
황금빛 사원-운하공원 야경 둘러본 후 카오산 노점서 맥주 한잔《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해외여행 문화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아름다운 자연, 관광 명소로 떼 지어 가는 단체여행은 대폭 축소됐다. 대신 친환경(Environment), 지역 상생(Social), 정책 및 제도 개선(Governance)을 지향하는 ‘ESG 관광’이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18%를 차지하는 태국은 ESG 관광 선도국 중 하나다. 태국은 코로나19 창궐이 지구 생태계 파괴와 무관치 않다는 인식 아래 친환경적 관광 문화 확대, 지역 맞춤형 관광지 개발, 정부의 적극적 관광 지원책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는 한국 관광업계에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 배낭객들의 집결지 카오산로드에 가보니 한국인들이 동남아에서 즐겨 찾는 태국의 방콕은 과연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태국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고 싶었던 곳은 방콕 시내 카오산로드였다. 전 세계 배낭 여행자들의 아지트인 카오산로드는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젊음의 해방구였다. 그런 카오산로드의 이미지는 출입구의 바리케이드를 만나면서부터 허물어졌다. 카오산로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고 백신접종증명서를 제시해야 했다. 네온사인이 환하게 밝혀주던 카오산 거리는 어둑하기만 했다. 음식점, 숙박업소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몇몇 펍에서 음악을 즐기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부 서양인들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대신 카오산로드 주변 작은 골목에 들어선 노점상들이 다소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한 노점상에서 꼬치구이를 안주 삼아 로컬 맥주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용객 대부분이 현지인들이었다. 원래 이 거리는 방콕 쌀 무역의 중심지였다. ‘카오산’이라는 단어가 ‘가공된 쌀’을 뜻한다. 방콕 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이용해 쌀과 야채 등 곡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태국인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강’으로 통하는 짜오프라야강은 서울의 한강과도 비슷하다. 방콕 시내에서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한강처럼 동서 방향으로 바꾸어 놓고 위성지도를 보면, 카오산로드가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과 청담동에 해당한다. 그만큼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기(地氣)가 풍성한 곳이란 뜻이다. ○배산임수 명당에 자리 잡은 왕궁 ‘물의 도시’ 방콕답게 주요 관광 명소들도 대부분 짜오프라야강을 끼고 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의 왕실을 상징하는 방콕 대궁전,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왓아룬 사원과 왓포 사원, 태국 왕실 선박박물관 등이 강변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5년간의 보수공사 끝에 2018년에 공개한 왓아룬 사원은 태국 왕실 전용 사찰인 에메랄드 사원과 함께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782년 라마 1세가 짜오프라야강 동쪽으로 왕궁을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서쪽의 왓아룬 사원이 직전 왕조(톤부리 왕조)를 대표하는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탑 표면과 사원 외벽이 다양한 색상의 자기 타일로 꾸며져 있다. 동틀 무렵이면 신비롭게 빛난다고 해서 ‘새벽사원’이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거대한 와불(臥佛)로 유명한 왓포 사원이나 새벽사원 등이 풍수적으로 모두 명당 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든 방콕에서 풍수적 자취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짜오프라야강을 바라보며 세워진 방콕 대궁전 뒤편 1.5km 떨어진 곳에는 80m 높이로 쌓아올린 인공 언덕이 있다. ‘푸카오통’(황금산)이라 불리는 이곳에 세워진 황금빛 체디(스투파를 포함한 불탑 양식)는 산이라는 상징성이 부여된 탑이라고 한다. 짜오프라야강 하구에 위치한 방콕은 지형이 대부분 평평하기 때문에 왕궁의 뒤를 받쳐주는 인공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방콕의 올드타운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로 태국의 배산임수(背山臨水) 풍수 현장이다. ○청계천 복원에 영감받은 방콕 운하공원 태국 관광청은 짜오프라야 강변 일대의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딸랏노이. 방콕 차이나타운 인근에 있는 이곳은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에 기름 냄새 풀씬 풍기는 기계부품 가게들과 200년 가까이 된 중국풍 가옥이 밀집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처럼 오래된 도시 뒷골목에서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최고 명물은 담벼락 아래 방치된 오렌지색 피아트500 폐차. 중고차 부품상들이 밀집해 한때 번성했던 곳임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서낭당처럼 알록달록한 천을 걸어둔 마을의 당산나무, 자동차 폐부품이 어지럽게 쌓인 창고에 차려진 커피숍, 명당 기운이 가득한 터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도교 사원과 중국계 전통 부자 가옥 등은 인생샷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의 청계천을 본뜬 도심 운하공원도 개장됐다. 총논시 운하공원의 1단계 사업 중 200m 구간이 먼저 개장됐는데, 공원에서 짜오프라야강까지 이어지는 수로(총 9km)에 산책로도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방콕 시내 고질적인 수질 오염 문제를 개선하고 녹지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관광 자원화한다는 운하공원 프로젝트는 서울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운하공원의 야경은 벌써부터 방콕 시민들로부터 주목을 끌고 있다. 방콕의 초고층 건물이나 대규모 쇼핑몰 등은 여전히 여행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태국의 랜드마크인 마하나콘 빌딩(78층)의 루프톱 전망대 및 스카이워크와 짜오프라야 강변의 복합쇼핑몰 ‘아이콘시암’은 젊은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태국여행 필수품 ‘방역 여권’ 국내 출발전 영문 PCR검사… 입국뒤에도 2차례 더 받아‘검사+격리’ 패키지 활용할만… 동선체크 앱도 설치해야태국 관광청은 최근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 사태로 멈추었던 ‘TEST & GO’(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 관광객의 입국 및 여행 허가 프로그램) 정책을 재개하고, 2월 1일부터 샌드박스 여행 지역도 확대한다고 밝혔다. 샌드박스는 태국 내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한 곳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방콕에서 머물다 푸껫, 끄라비, 파타야, 시창 등 다른 지역으로 가더라도 격리 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태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태국 입국 허가 공식 사이트(tp.consular.go.th)에서 TEST & GO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승인이 되면 이메일로 ‘태국 입국 허가서(타일랜드 패스)’를 받을 수 있다. 일종의 ‘방역 여권’인 셈이다. 이를 태국 입국 시 공항에서 제시하면 된다. 국내에서는 별도로 코로나19 예방접종증명서와 비행기 출발 전 72시간 이내에 영문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예방접종증명서는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발급받을 수 있지만, 영문 PCR 검사 음성 확인서는 10만 원 내외의 발급 수수료가 든다. 태국 입국 뒤엔 두 차례에 걸쳐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태국 공항에 입국한 뒤 바로 받는 1차 검사, 5일차가 되는 날에 받는 2차 검사다. PCR 검사와 격리시설 자격을 갖춘 호텔을 패키지로 묶은 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호텔 측이 마련한 차량에 탑승해 병원으로 바로 가서 PCR 검사를 받은 후 호텔로 돌아와 검사 결과(6∼12시간 정도 걸림)가 나올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한 상품이다. 또 여행 5일차에 한 번 더 검사를 받아야 한다. 태국 입국 즉시 모차나(MorChana) 앱도 내려받아 설치해야 한다. 여행자의 동선을 체크하는 앱이다. 태국 내 여행 시 각종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예방접종증명서를 지참하고 휴대전화에 모차나 앱을 깔아놓는 게 좋다. 귀국했을 때는 또다시 PCR 검사 및 7일간 자가 격리가 필수다. 글·사진 태국 방콕=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2-05 03:00
능선에 잠든 가야왕국의 신비… 열두줄 우륵 선율에 담겨있을까《영남의 가야산은 가야 건국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꽃이 가장 무성하게 핀 곳 중 하나다. 하늘의 천신(天神) 이비가지와 땅의 여신(女神) 정견모주가 사랑에 빠져 2명의 가야국 창건주를 낳았다는 ‘상아덤’ 바위, 금관가야 수로왕과 허왕후가 낳은 7왕자들이 출가했다는 칠불봉 등 가야 관련 설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 가야산 지맥이 뻗어나간 합천, 고령의 산 능선에도 가야연맹체 소속의 고분들이 저마다 독특한 신비감을 뽐내고 있다. 올해 6월 가야산과 낙동강 일대 7곳의 가야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인류 문화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가야산자락 가야고분군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본다.》 ○해인사 지키는 국사대신 가야산자락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 경내. 일주문과 봉황문을 거쳐 해탈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쪽 협소한 공간에는 국사단(局司壇)이란 이름의 작은 전각이 있다. 경내의 웅장한 전각에 눈길을 주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전각 안내판은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자 토지신인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국사단 내부에는 우아하면서 기품 있는 한 여성과 두 아들을 묘사한 탱화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가야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형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두 명의 왕을 배출한 여성 산신이다 보니 대우도 남다른 듯하다. 보통 산신각이 뒤편에 배치되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이곳 국사단은 앞쪽에 세워졌다. 해인사 측은 국사대신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리는 등 가람을 수호하는 신이기 때문에 사찰 입구에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국사단 앞의 한 그루 ‘소원나무’도 범상치 않다. 가야산 산신이 깃든 이 소원나무에서 소원을 적고 국사단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국사단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당 혈(穴)에 자리 잡고 있다. 좋은 기운이 밴 터에서 기도하면 영험함이 크다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인사 경내에 이미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인 802년 해인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이곳이 가야산신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고령 지산동고분, 가야 풍수를 보다 해인사에 깃든 가야 신화를 음미한 뒤, 가야산의 지맥과 정기가 이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대가야의 터전으로 알려진 고령군 지산동고분군(대가야읍 지산리). 가야산의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미숭산을 지나 고령읍의 진산인 주산(이산·310m)까지 이어진 곳이다. 1500여 년 전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지산리의 주산은 대가야 왕과 귀족들의 무덤터였다. 무려 700여 기의 고분이 주산 능선 2.4km를 따라 정상부에서 아래까지 포도송이처럼 들어선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유명하다. 능선과 봉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고분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지산동고분군은 특이하게도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봉분의 크기가 커진다. 권력자일수록 높은 곳에 무덤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마치 산 위의 산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산 중턱이나 평지에 조성한 백제나 신라의 고분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9분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지맥(地脈)은 명당 기운인 혈(穴)이 맺기 어려운 과맥처(過脈處)라고 하여 기존 풍수학에서 매우 꺼린다. 그런데 가야의 고분 입지를 한국 고유의 천문지리관으로 보면 달리 보인다. 한반도 사람들은 청동기시대부터 북두칠성과 여러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놓을 정도로 하늘의 기운을 중시했다. 하늘의 기운인 천기(天氣)가 내려오는 명당 터 곳곳에 규모가 큰 왕릉급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천기형 봉분에서는 권력을 지향했던 대가야 사람들의 기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즉, 지산동고분군은 하늘 에너지를 중요시한 우리 식 자생풍수 현장인 셈이다. 지산동고분군은 무덤떼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연 공원 같다. 야자나무 매트로 깔아놓은 고분 길은 마치 둘레길을 걷는 듯한 편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평화롭고도 운치 있는 외관과 달리 이곳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물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44호분(지름 25×27m, 높이 6m)에서는 순장자만 무려 40여 명이 나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순장무덤으로 기록됐다. 지산동고분 입구에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는 발굴 당시 44호분 내부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관람객들은 고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도시답게 대가야 관련 시설물이 대거 들어서 있다. 대가야국 출신의 악성 우륵이 예술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알려진 대가야읍 쾌빈리 정정골에는 우륵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또 지산동고분군 근처에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와 대가야생활촌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역사테마관광지에서는 관광객들이 고대 문화를 첨단시설로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도록 고대가옥촌, 가마터 체험관, 토기방과 철기방 등 각종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합천 옥전고분군의 따스한 명당 기운 가야산의 정기는 고령군 바로 옆의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야트막한 언덕으로도 이어진다. 구슬밭(玉田)으로 불리는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이 있는 곳이다. 지산동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인 이 고분군 역시 50m 높이의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수십 기의 봉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마치 낙타의 혹처럼 보인다. 이 고분들은 옛 가야연맹체인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당시 금보다 비싸게 거래된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제국 시기에 제작된 유리그릇)가 출토돼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다. M1호분에서 발굴된 투명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는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건너온 것으로서, 가야와 서역 간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였다. 이뿐만 아니다. 지름 21m를 자랑하는 거대 봉분인 M3호분에서는 정교하게 장식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을 비롯해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등 다라국의 화려한 금속공예 기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현재 옥전고분군 입구에 있는 합천박물관 전시실 중앙에는 M3호분의 출토 유물을 실물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역사 속 다라국의 활발했던 대외교역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합천박물관에서 전시물을 살펴본 후 뒤쪽의 옥전고분군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들의 집터 분위기라기보다는 아담한 크기의 봉분들이 마치 자연물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곳곳에 산재한 명당 혈 기운 덕분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기운이 몸을 감싸주는 듯했다. 옥전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혈(穴)이 맺힌 명당에 고분을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지산동고분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지산동고분이 권력과 명예에 도움이 되는 천기 명당이라면, 옥전고분은 풍요와 재복에 도움 되는 지기(地氣) 명당에 해당한다. 실제로 옥전고분군의 주인공들은 황강과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한 대외 교역 중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합천에서 가야고분에 대한 역사산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면 서울 청와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청와대세트장, 합천 허굴산 자락의 천불천탑을 추천한다. 눈요깃거리도 되려니와 설날을 맞아 소원을 비는 기념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글·사진 고령·합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1-22 03:00
깨어진 석탑의 러브스토리… 우리 선화공주 어디로 갔나《서울 공주 부여 익산. 백제의 고도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 도시 중 가장 이색적인 곳이 전북 익산이다. 해상 교류를 중시하던 백제는 도읍을 어디로 옮기든 항상 바다로 통하는 큰 강을 옆에 끼고 왕궁과 도시를 건설했다. 한강 변의 풍납토성, 금강 변의 공주 공산성과 부여 사비성이 그러했다. 반면 익산은 왕궁으로 지목된 왕궁리 유적 주변에 큰 강이 보이지 않는다. 평야지대에 건설한 왕궁 구조도 낯설다. 그럼에도 백제 제30대 무왕과 얽힌 구수한 얘기가 무성하고, 후삼국 시대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영웅들이 몰려든 성소(聖所)가 바로 익산이다.》 고속도로로 익산으로 진입하기 직전 인근의 견훤왕릉(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을 먼저 들렀다. 신라 말기인 900년 견훤(?∼936)은 완산(전북 전주 권역)에서 후백제의 왕임을 선포했다. 혼란스럽기만 한 후삼국 시대, 견훤은 마한과 백제 강역이던 완산에서 후백제의 정통성을 찾았다. 특히 전주 바로 위 익산(금마)을 건국의 정신적 토대로 삼았다. 마한의 중심 권역이자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근거지였고,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려는 그의 의지를 받쳐주는 미륵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신동엽이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익산을 ‘마한과 백제의 꽃밭’이라고 묘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의 꿈은 고려 창업주 왕건에게 패함으로써 좌절됐다. 그러나 그의 무덤만큼은 지금도 완산을 바라보고 있다. 무덤 입구에는 “완산이 그립다”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이곳에다 무덤을 조성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날씨가 아주 맑은 날 익산 미륵산 너머 저 멀리 전주 모악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 금 간 서동의 러브스토리 견훤의 행적을 여행의 등불로 삼아 먼저 미륵사지(익산시 금마면 기양리)를 찾았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륵사지는 신라 황룡사, 고구려 금강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호국사찰이었다. 사찰 규모로 따지자면 경주의 황룡사보다 2배 넓은 16만5000m²(약 5만 평)에 달한다. 견훤은 미륵산 자락 미륵삼존불의 출현 설화를 갖고 있는 미륵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922년 혜거국사를 시켜 미륵사 개탑(開塔) 불사를 통해 백제인의 민심을 하나로 모았고, 미륵신앙의 힘을 빌려 신라를 정벌하는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견훤 이전엔 백제 무왕이 미륵사에 큰 공을 들였다. 미륵사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639년 무왕대에 이르러 대규모 가람으로 완성됐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진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서 만든 이 사찰은 가운데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2개의 석탑이 배치됐고, 각각의 탑 바로 뒤로는 3개의 금당(불상을 모신 법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는 구조였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대로 탑 3개에 미륵불상 3기인 ‘3탑3금당’ 양식이다. 국내 다른 고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다. 미륵사의 가장 중심이었던 목탑은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고, 미륵사지 발굴 당시 2기의 석탑 역시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1990년대에 먼저 동탑이 복원됐다. 그러나 문헌적 근거 없이 추정만으로 2년 반 만에 졸속 복원됐다고 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성형미인’으로 취급받는 동탑은 탑의 내부 구조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채워준다. 서탑(국보 제11호)은 동탑의 사례를 본보기 삼았다. 2001년 해체·보수 작업을 시작한 이후 무려 18년 만인 2019년에 이르러 복원을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선을 보였다. 서탑 복원 과정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선물도 발견됐다. 탑의 1층 심주석 아래 봉안된 금제사리봉영기에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얘기’를 허물어뜨리는 문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보관된 봉영기에서는 사찰 창건의 주역이 무왕의 왕후이자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무왕)이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천년의 설화가 무너지고, 서동이 무왕인가를 두고서도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만한 자료였다. ○무왕과 견훤의 동병상련 분명한 건 익산에서 ‘서동’은 역사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마면의 마룡연못(연동제). 서동의 어머니가 이곳에 살던 용과 정을 통해 서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은은한 연꽃 향기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연동제 도로변에는 서동이 태어난 생가 터(금마면 서고도리 383-12)임을 알리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다. 서동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인 것이다. 한편으로 금마저수지 인근의 서동공원은 서동 스토리를 유등과 발광다이오드(LED)로 꾸며 관광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서동 생가 터에서 불과 1.5km 거리엔 백제 무왕의 무덤이 있다. 규모가 다른 고분 2기가 있다고 해서 ‘익산쌍릉’(사적 제87호)이라고 불리는 고분이다. 큰 고분은 대왕릉, 작은 고분은 소왕릉이라고 불린다. 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이라는 게 정설이다. 소왕릉의 주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왕릉에 서 있다 보니 북쪽으로 미륵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견훤왕릉이 떠오른다. 무왕과 견훤왕은 여러모로 닮았다. 두 왕은 백제의 영광과 부흥을 위해 신라를 상대로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인물들이다. 배경도 비슷하다. 무왕은 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지방 출신이었다.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무왕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이다. 신라 출신 견훤왕이 백제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신라를 몰아치던 것처럼 말이다. ○수세식 화장실 갖춘 백제왕궁 무왕의 주 무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도 생가 터에서 멀지 않다. 왕궁면 왕궁리의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이다. 백제의 이궁(離宮) 혹은 무왕의 집무처로 사용되다가 백제 멸망 후 이곳에 사찰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유적이다. 풍수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백제 본궁보다는 별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르는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금 유리 동 등을 제작했던 공방 터,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등이 발굴됐다. 특히 완만한 지형의 경사면을 따라 지은 인공 수로와 저수시설, 전각마다 물을 활용한 치수시설 등은 당시로서는 첨단을 달리는 공법이다. 공동 수세식 화장실도 갖추고 있었다. 궁의 아래 사면에 마련된 화장실은 분뇨가 일정 자정 작용을 거친 뒤 수로로 배출되도록 한 것이다. 1400여 년 전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 세워졌을 이 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이 탑과 관련한 흥미로운 얘기도 있다. 익산군 읍지인 ‘금마지’(1756년)는 “견훤의 도읍인 완산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다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전한다. 신비한 설화가 켜켜이 묻어 있는 익산은 그 자체가 스토리텔링 여행지다. 최근 익산시는 코레일과 연계해 열차, 렌터카·관광택시, 숙박 등을 한데 묶은 관광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익산의 역사관광 자원에 더해 숨겨진 또 다른 여행지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가옥과 도정 공장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춘포리 마을, 웅장한 메타세쿼이아 500그루에 ‘거룩한 사랑’을 담고 있는 아가페 정원(전북 제4호 민간정원), 탁 트인 비경을 갖춘 금강변 용안생태습지공원 등이 새로운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글·사진 익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2-01-08 03:00
왜선 깨부순 세계 첫 철갑선 데뷔… ‘무적함대’ 거북선의 함성 들리는 듯《12월의 겨울은 과거를 교훈 삼아 미래를 설계하라는 시령(時令)이 내려진 시기다. 옛사람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지혜를 배우는 역사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때다. 남쪽의 따스한 겨울 햇살을 쐬면서 역사 탐방을 즐길 수 있는 남해 한려수도의 중심 사천시를 찾았다. 오미크론 변이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철 비대면 안심관광지(25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사천해전의 현장 무지갯빛 해안도로 사천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을 테마로 삼은 ‘이순신바닷길’이 있다. 총 60km 거리의 해안 도보 여행길이다. 이 중 사천해전이 코앞에서 벌어진 사천시 용현면 선진 앞바다의 해안도로를 특별히 ‘최초 거북선길’로 명명해 기념하고 있다. 남쪽 모충공원에서 북쪽 선진리성까지 12km 거리인데,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전남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사천 앞바다에 왜선 13척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듣고 출전을 결정한다. 거제도 옥포해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후 두 번째 출전하는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은 처음으로 거북선 2척을 실전 투입했다. 돌격용 거북선은 조선 수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군 쪽으로 곧장 쳐들어가 화포를 쏘아대며 세키부네(왜군 함선)를 하나둘씩 깨부수어 나갔다. 대장선의 이순신 장군 역시 선두에 나서 20여 척의 판옥선을 지휘하며 왜선들을 격파했다. 왜선과의 근접 전투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왜선 모두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들은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비밀병기 거북선을 보고 처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떤 반면, 조선 수군은 비로소 이순신 장군에 대한 무한 신뢰와 함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16세기 최첨단 전투선인 거북선이 등장했던 사천 바닷가는 지금 무지갯빛으로 변신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도로변 6.2km 구간의 방호벽 연석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칠해 놓은 무지갯빛 해안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여성의 옆얼굴을 윤곽선으로 표현한 ‘그리움이 물들면’ 조형물(사천대포항 부두), 하트 모양의 포토존 입구에서 갯벌 쪽으로 길쭉하게 뻗어나간 부잔교갯벌탐방로(용현면 금문리), 노란 초승달 모양의 포토존 ‘노품달’(노을 품은 달, 용현면 종포방파제) 등이 차례대로 나타나 피곤한 발품을 넉넉히 보상해준다. 최근에는 남녀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와 인생샷 명소로도 부상하고 있다.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걸어가며 맑은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닷물처럼 청량한 하늘에서는 비행기 한 대가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사천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첨단항공우주과학관 등이 들어선 첨단 항공산업의 메카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6세기 조선의 바다를 지키던 거북선처럼 21세기 우주를 누비는 최첨단 비행체가 사천에서 출현하기를 해와 달에게 빌어 보았다. ○포르투갈 특전사-타타르 거인까지 참여한 국제전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따라 더 북상하면 마침내 ‘최초 거북선길’의 종착지인 선진리성(용현면 선진리 770)이 나타난다. 1597년 임진왜란에 이어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 발발 당시 왜군들이 주둔했다 하여 사천왜성으로도 불리는 성이다. 성벽 둘레가 1km 남짓한 이 성은 해발 30m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에서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 벌어졌다. 1598년 10월 3만 명 규모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여 왜군이 주둔 중인 사천왜성을 공격한다. 이 사천왜성 전투는 다국적 특수군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명 연합군은 공성(攻城)용 대포인 불랑기포를 쏘아대고 포르투갈계 특수군인 해귀(海鬼), 키와 몸뚱이가 보통사람의 10배나 된다는 타타르계 거인(巨人) 등 다국적 출신 용병들까지 동원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명나라 진영 내 불랑기포 화약궤가 폭발하는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명군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탄 왜군들의 기습 공격으로 조명 연합군 7000∼8000명이 어이없게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포함한 7년 전쟁에서 왜군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표방하는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은 1918년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하고 벚나무 1000여 그루를 심는 등 시마즈 가문을 위한 현창 장소로 활용했다. 그러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을 기념한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지고, 6·25전쟁 당시 전사한 대한민국 공군 위령탑도 조성됐다. 역사적 장소가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후대에 재해석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선진리성은 일제강점기 조성된 벚나무로 벚꽃 축제로 유명하다. 또 일본식 경사진 성벽, 일본 히지메성을 본떠 복원한 성문 등이 당시의 왜성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선진리성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는 사천 조명군총과 이총(耳塚)이 있다. 조명군총은 사천왜성 전투에서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집단 무덤이다. 당시 왜군은 전사자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후 일본에 보냈고 부패한 시신들을 한데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다. 이총은 1992년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자 일본 교토 대불전 앞의 코무덤 흙 일부를 가지고 와서 조성한 후,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코보다는 귀를 베어 간 것으로 하는 게 덜 잔혹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에도막부 시대(1603∼1868)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은 코무덤 즉 비총(鼻塚)을 이총으로 둔갑시켰다. 사천의 이총은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윤색하는 일본의 행태를 고발하는 현장이다.○산·바다·섬을 아우르는 사천 명물 케이블카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 선진리성에서 떠나 창선·삼천포대교가 지척에 보이는 대방진굴항(대방동 251)을 찾았다. 이곳도 이순신 장군과 인연이 닿은 장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진영이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거북선을 숨겨두고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을 채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조선 순조 때 돌로 둑을 쌓아서 활처럼 굽은 만을 만들고 인조항구인 굴항을 설치했다. 복원된 지금의 대방진굴항은 아담하고 한적한 공원 같다. 바닷물이 얕게 들어찬 굴항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수령 200년의 팽나무가 초록빛 물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삼천포항과 창선·삼천포대교를 감상하며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다. 창선·삼천포대교 바로 위로는 사천바다케이블카가 연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2018년 4월에 개통한 이 케이블카는 바다와 섬과 산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방정류장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는 초양정류장(초양도)에서 한 번 정차한 후 다시 대방정류장을 곧장 지나쳐 각산전망대가 있는 각산정류장으로 향한다. 각산전망대에서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사천 8경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한편 각산에는 편백나무 향기가 가득한 ‘사천케이블카 자연휴양림’이 올 8월 문을 열어 운영되고 있다. 숙박동과 캠핑이 가능한 야영 덱, 숲 탐방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별주부전’ 전설을 테마로 한 비토섬도 둘러볼 만하다. 비토해양낚시공원, 별주부전 테마파크,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월등도 신비의 길’(이순신바닷길 제3코스) 등 사천의 또 다른 비경이 기다리고 있다.글·사진 사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1-12-25 03:00
꽃보다 붉은 충절의 물결따라 巨富의 황금빛 전설이 흐른다《경남 진주시를 흠뻑 적시며 흘러가는 남강은 물길의 방향이 예사롭지 않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반면 남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 물길이다. 동양 인문지리학에서는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에서 서출동류를 귀하게 여긴다. 산과 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뤄 땅에서 좋은 기운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강 오백리 물길을 따라 삼성가, LG가, 효성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 탄생했다는 풍수적 진단의 근거이기도 하다. 풍요의 상징인 남강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우리 역사와 신비한 전설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불야성 이룬 진주성과 남강의 논개 12월 초 남강으로의 겨울 여행은 1960년대 남강다목적댐으로 조성된 호수인 진양호 전망대(진주시 판문동)에서 시작된다. 지리산 동쪽 자락에서 흘러온 덕천강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경호강이 만나 넓디넓은 호수를 이룬 장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양호는 새벽녘의 물안개와 해질녘의 노을이 일품이다. 물길은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남강이라는 이름을 얻어 진주시로 흘러들어간다. 붉게 물든 진양호의 노을을 뒤로하고 물길을 따라 형성된 도로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다 보니 진주성이 곧장 나타났다. 밤의 진주성은 낮과는 다른 화려한 야경으로 맞이했다. 진주성 촉석루를 감싸고 유유히 굽이치는 남강의 물결이 불빛으로 일렁거렸다. 용, 봉황, 거북, 연꽃 등 61개의 대형 수상 등(燈)이 물에 두둥실 떠 있다. 불야성을 이루는 진주남강유등축제(12월 4∼31일)가 펼쳐지고 있었다. 매년 개최되는 남강유등축제(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중단)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기원을 둔다. 왜군이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조선군이 강물에 유등(기름으로 켜는 등불)을 띄워 저지하는 한편으로 성 밖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진주성 절벽의 누대 촉석루도 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바위 의암(義巖)도 바로 그 아래로 보였다. 강물 위로 비치는 붉은 불빛이 어느새 핏빛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력 1592년 10월 3800여 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은 진주성에서 약 3만 왜병에 맞서 장쾌한 승리를 거뒀다(제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사에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이다. 이곳에서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9만여 명의 왜군 주력부대가 총결집해 진주성을 재침공했다. 이에 단 6000여 명의 병력으로 9일간 결사항전한 조선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3만8000여 명의 정예군을 잃은 왜군의 기세 역시 상당히 꺾였다. 대신 왜군은 그 보복으로 진주성내 6만여 명의 민간인까지 모두 학살했다. 남강은 물 위에 가득한 시신들로 인해 피바다를 이뤘다. 논개는 바로 이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는 변영로의 시 ‘논개’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3명의 국부(國富) 배출한 솥바위 애국충절의 상징인 진주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남강을 따라 더 동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마을 멀찌감치 남강이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있고, 바로 앞으로는 자그마한 지수천이 또 한번 감싸 돌아주는 명당 마을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여러 겹으로 마을을 감싸줄수록 좋다고 본다. 마을의 내력은 화려했다. 예부터 만석꾼과 천석꾼 부자가 많이 나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부유했던 마을이다.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오늘날의 LG와 GS 그룹을 탄생시킨 산실이기도 하다. 마을 한가운데에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의 생가와 GS그룹의 시조인 효주 허만정의 본가가 두 그룹의 상징처럼 자리잡고 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한 겹사돈과 공동 사업으로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1921년 구인회는 이웃인 허만식(허만정의 6촌)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해 장남 구자경(2019년 작고·LG그룹 명예회장)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만석꾼이던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업 자금을 투자하면서 셋째아들 허준구(구인회의 조카사위·2002년 작고·GS건설 명예회장)에 대한 경영 수업을 부탁했다. 구씨와 허씨의 ‘아름다운 동거’는 이렇게 시작해 손자 대까지 이어져왔던 것이다. 승산마을은 남쪽에는 구씨가가, 북쪽에는 허씨가가 밀집해 살았다고 한다. 구씨가의 대표격인 구인회 생가 바로 옆으로는 구자원(LIG그룹 창업주) 생가, 또 바로 옆으로는 구자신(쿠쿠전자 회장) 생가가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북쪽으로는 허만정 본가와 그 부친인 허선구 고가(지방문화재)를 중심으로 허창수(GS그룹 명예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생가, 허승효(알토 회장) 생가, 허정구(1999년 작고·삼양통상 명예회장) 생가 등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도 인연이 깊다. 이병철은 당시 신식 학교이던 지수보통학교(지수초등학교)로 유학을 와 허씨 가문으로 시집온 누이 집(허순구 가)에서 생활했다. 현재 빈터가 된 이 집에는 그 시절 이병철이 먹고 자란 우물도 보였다. 한편 승산마을 길 건너편에 있는 옛 지수초등학교는 재벌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1980년대까지 지수초등학교 출신 중 30명이 한국의 100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교정에는 의령 출신 이병철,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주), 이곳 출신 구인회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부자 소나무’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현재 폐교된 이곳에는 기업가 정신 교육센터와 대한민국 기업역사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승산마을이 부자 터가 된 결정적인 이유 또한 물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주 남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과정에서 상류에서 싣고 내려온 유기질 풍부한 토사가 하류 부근에 비옥한 땅을 만들어내면 수확물 역시 풍성해진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볍씨 한 말을 심으면 60두를 수확하는 기름진 곳”으로 남강이 굽이치는 진주 땅을 꼽았다. 땅이 비옥하니 이 지역에서 만석꾼, 천석꾼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병철과 조홍제도 남강 물길의 기운을 받는 터에 자리잡은 부잣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에 뛰어들었고,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승산마을에서 빠져나와 다시 남강 물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10km 남짓한 거리의 솥바위(의령군 정암리)를 마지막 여행지로 삼았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의 경계 지점에서 솟아 있는 바위다. 물속에서 4m 높이로 솟아 있는 바위가 솥을 닮았다고 해서 ‘솥바위(鼎巖)’라고 불린다. 이 바위에는 부자 탄생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솥바위 기운을 받아 머지않아 국부(國富) 3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했다. 남강 물 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은 부를 상징하는 솥뚜껑을 닮았고, 물 아래로는 세 개의 발이 남쪽, 북쪽, 동남쪽을 받치고 있는데 그 방향으로 반경 20리(약 8km) 이내에서 부자가 난다는 부연 설명도 뒤따랐다. 그래서 그럴까. 북쪽으로는 이병철 생가(의령군 정곡면)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조홍제 생가(함안군 군북면), 남쪽으로는 구인회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재벌 창업주들도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철의 호인 호암(湖巖)에 바위 암(巖)자가 들어가 있는 게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글·사진 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1-12-11 03:00
[Food&Dining]떠먹는 프로바이오틱스 국내 첫선… hy, 장 건강에 좋은 ‘프로닉’ 내놔유산균 전문기업 hy가 국내 최초로 떠먹는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인 ‘프로닉’을 내놓았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체내에 들어가 건강에 좋은 효과를 주는 살아 있는 균을 가리킨다. 장내 유산균 증식과 유해균 억제 등을 통해 배변 활동과 장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간 액상 형태로 소비자들에게 공급돼 왔다. hy 측은 간편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마시는 프로바이오틱스 3종을 선보인 데 이어 떠먹는 제품을 개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일곤 hy 유제품팀장은 “제품 1개(90g)당 100억 프로바이오틱스가 함유된 프로닉은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기능성을 인정받았다”며 “샐러드 드레싱이나 디저트, 견과류를 더한 아침 대용식 등 여러 가지 레시피로 활용하면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hy 측은 안전하고도 신선한 제품 생산을 위한 시스템을 갖춰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365일 새로운 원유로 배양액을 만들고, 전국 1만1000명의 프레시 매니저와 냉장 카트 ‘코코’를 통한 콜드체인 시스템으로 소비자의 손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2021-11-25 03:00
[Food&Dining]간편하면서 제대로 된 식사 초점… 청정원, 추어탕 등 ‘호밍스’ 출시대상㈜ 청정원이 간편식 제품인 ‘호밍스’를 내놨다. ‘홈(HOME)’에 현재진행형을 뜻하는 ‘아이엔지(ing)’를 결합한 브랜드인 호밍스는 가정에서 간편하면서도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는 데 초점을 둔 제품이다. 대상 측은 특히 ‘남도추어탕’ ‘사골김치찌개’ ‘사골우거지들깨탕’ ‘버섯들깨미역국’ ‘소머리곰탕’ 등 호밍스 국탕찌개류의 경우 국물 요리를 기본으로 한식 상차림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호밍스 국탕찌개류의 대표 제품으로 내세운 ‘남도추어탕’은 국산 미꾸라지의 굵은 뼈를 제거하고 발라낸 살만을 통째로 갈아 진한 된장에 끓인 보양식이라고 한다. 미꾸라지를 직접 손질해 만드는 만큼 미꾸라지 함량이 높으며, 굵은 뼈를 제거해 뼈가 씹히는 이물감 없이 부드러운 추어의 식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직접 만든 고추기름을 사용해 비린 맛을 잡았고 국산 무청 시래기와 들깻가루를 넣어 담백한 맛을 살려냈다. 회사 관계자는 “청정원 호밍스 하나만으로 한식 상차림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맛과 영양을 골고루 갖추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2021-11-25 03:00
두보의 후손 두사충, 하루 천냥 재물운 깃든 경상감영에 둥지《16세기 말 한반도에서 임진·정유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 두사충(작전참모장)은 귀화를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진지와 병영 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한 풍수 전략가였다.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순신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 주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고,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오랑캐(청)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두사충이 정착지로 선택한 곳은 한양이 아닌 대구였다. 현재 대구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 터다. 그가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두사충은 왜군과의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을 누비면서 대구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대구의 남쪽 산인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치달아온 지맥(地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맥은 대구 시내 연구산(현 대구제일중학교)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처형 장소이자 천주교 순교 성지인 관덕정(대구읍성의 남문 쪽)이 자리한 아미산으로 이어지고, 이 기운은 다시 더 북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경상감영공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천보(千步) 정도 거리다. 두사충식 ‘재물 풍수법’에 의하면 한 걸음을 한 냥씩 계산해 천보는 천 냥이 된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뜻이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두사충이 원래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 때인 1601년 이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청한 뒤 1965년 이전할 때까지 ‘영남의 수도’ 역할을 했다. 영남 물자와 세금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 냥이 나오는 길지였던 셈이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경상감영공원에는 선화당(관찰사 집무처)과 징청각(관찰사 처소) 정도가 남아 있다. 1970년 이곳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중수된 건물들이다. 두사충은 선화당과 징청각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명당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취기처(取氣處)로도 좋아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이다. ○ 대구 부자들의 집결처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감영 바로 아래쪽, 계산동(계산성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사충은 이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식솔들의 경제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후 이 일대는 중국 시인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두릉 두씨 세거지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현재 계산성당 출구 쪽 담장에는 뽕나무 골목을 상징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현재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인근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대구시에서 근대문화골목(1.64km 구간)으로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이 일대가 대구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이자 개화 문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 분위기와도 비슷한 근대문화골목은 ‘명당 골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특히 달성 서씨 집성촌이던 진골목은 대구 부자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공간이다. 1900년대 초반 진골목 최고의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대구로 몰려드는 전국 약재상들을 상대로 한 객주 사업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m²가 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의 화교협회(중구 종로 34)가 그가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이고 화교소학교 부지 역시 그의 소유였다. 같은 달성 서씨인 서상돈(1850∼1913) 역시 이곳에서 배출된 부자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면서 3만석꾼 거부로 성장한 그는 후세를 위한 민족교육 사업 등에 매진했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제에 진 1300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애국자였다. 진골목은 달성 서씨 부인 등 7명의 여성이 주도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대구 소주인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부자들도 이 일대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한편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고택(중구 인교동 오토바이골목)과 오늘의 삼성을 키워낸 삼성상회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상회 옛터에는 생전에 이병철이 놓아둔 금고 자리도 재현돼 있는데,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즐겨 쉬어가곤 한다. ○ 100년 전 양옥은 어떤 모습일까?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100여 년 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비싼 붉은 벽돌 가옥이 부자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진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벽돌조 2층 양옥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풍이라고 한다. 당시 양옥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뽕나무 골목 인근에는 서상돈이 살던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집인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거부(巨富)의 기운을 담고 있는 명당이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과 함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천주교 신도였던 서상돈이 기증한 종(아우구스티노)으로도 유명한 계산성당도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다.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풍이 가미된 로마네스크식 성당(사적 제290호)이다. 초기 계산성당은 불이 나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풍수적 조언에 따라 원래 예정지인 언덕배기가 아닌 평지 위에 세워진 점도 특이하다. 6·25전쟁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1919년 만세운동을 했던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청라언덕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이다. 녹색 정원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 대구 시내는 곳곳에 작은 시내가 발달해 장마철만 되면 물에 잠기는 ‘물의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 개발과 더불어 여러 하천이 복개되면서 점차 뜨거워진 도시로 변모했다. 지형의 변화는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바꾸면서 부의 지도도 달라지게 한다. 번성했던 골목이 쇠락하거나, 침체돼 있던 곳이 발전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대구 골목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글·사진 대구=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2021-11-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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