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구독 50

추천

안녕하세요. 안영배 기자입니다.

oj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3-24~2024-04-23
여행67%
문화 일반17%
사회일반10%
경제일반3%
미술3%
  • 미륵불의 현신이 꿈꾼 이상향… 억겁의 협곡에 묻은 미완의 혁명

    《평지에서 아래로 푹 꺼진 화강암 벼랑 밑바닥으로는 청록빛 강물이 아득하게 흐르고 있다. 50대 남짓한 나이, 애꾸눈의 한 사내가 가마솥 물 끓는 소리를 내는 한탄강 여울을 하염없이 굽어다본다. 밀려드는 회한과 배신에 대한 분노! 그의 마음 역시 물소리처럼 들끓는다. 이곳은 철원군 한탄강 주상절리길의 드르니 쉼터, 그리고 사내는 1100여 년 전 한반도를 격동시켰던 후고구려 건국의 주인공 궁예(?∼918)다. 그는 스스로 현세에 내려온 미륵불임을 자처하며 철원에서 ‘미륵의 나라’를 꿈꾸다가 918년 왕건의 반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 와중에 잠시 들른 곳이 이곳 드르니 쉼터가 있는 드르니 마을이다. ‘들르다’의 순우리말 ‘드르니’가 의미하듯, 궁예가 들렀다 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탄강이 남북축으로 관통하는 철원은 궁예가 905년 천도한 후 13년간 화려한 전성기와 처참한 몰락을 겪은 곳이다. 따라서 철원 한탄강 물길을 따라가는 여행은 궁예의 흔적을 쫓는 역사 탐방길이기도 하다. 》○한탄강 하늘길에서 만나는 1억 년의 지질 여행 한탄강 물길(주상절리길) 여행은 주상절리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린 잔도를 걷는 ‘한탄강 하늘길’과 한탄강 물 위를 직접 걸어가보는 ‘한탄강 물윗길’로 크게 나뉜다. 하늘길 트레킹은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순담계곡까지 가는 코스와 거꾸로 순담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따라 드르니마을 매표소까지 내려오는 코스 두 가지가 있다. 물길 여행은 가급적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트레킹 코스가 물 기운을 온전히 느껴보는 데 유리하다.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입장료 1만 원(5000원은 철원사랑상품권으로 되돌려줌)을 낸 뒤 트레킹을 시작했다. 철원군이 지난해 11월 개방한 하늘길 잔도는 깎아지른 벼랑에 선반처럼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가 무려 3.6km나 이어지는 길이다. 공중에 떠 있는 길이라고 해서 하늘길로 불린다. 절벽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을 따라 유네스코가 인증한 국가지질공원(주상절리 협곡)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1억여 년 전 화산 폭발로 지하의 화강암이 땅 밖으로 드러난 이후 약 54만∼12만 년 전에 현무암 용암류가 그 위로 흐르게 되면서 생겨난 침식 지형이다. 평지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현무암 협곡이다. 한탄강 하늘길에는 풍광이 빼어난 3개의 스카이전망대, 각기 다른 주제와 디자인으로 건설된 13개의 출렁다리(잔교), 그리고 10개의 쉼터가 있다. 특히 다리 이름을 통해 한탄강 지질을 눈으로 확인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주상절리 틈으로 피어난 돌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돌단풍교, 화강암이 용솟음치면서 가로로 깨진 수평절리가 인상적인 수평절리교, 화강암과 현무암이 공존하는 현화교, 화산 활동으로 흘러나온 마그마가 빠르게 식으면서 생긴 회색 혹은 검은색의 현무암 기공을 관찰할 수 있는 현무암교 등이다. 길 중간중간에 배치된 안내 요원들을 통해서도 한탄강 지질과 관련 설화 등에 대한 구수한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구멍이 숭숭 난 철원의 현무암은 ‘울음돌’이라고도 불린단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게 되자 돌들도 눈물을 흘려 구멍이 나게 됐다는 거다. 전설을 전하는 철원 출신 안내요원의 말에서 역사적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는 궁예에 대한 애틋한 정마저 느끼게 된다. 드르니마을 매표소에서 순담매표소까지는 2시간 정도면 풍광을 충분히 즐기며 여유롭게 사진 촬영까지 할 수 있다. ○물 위를 걸으며 즐기는 물기운 세례 순담매표소가 있는 순담계곡에서부터는 한탄강을 따라 더 북상하는 트레킹인 물윗길 코스가 이어진다. 말 그대로 한탄강 물 위를 걷는 코스다. 순담계곡-고석정-마당바위-송대소(은하수교)-태봉대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탄강 위에 띄워놓은 부교를 걷는 순수 물윗길 2.4km와 강변길을 이용하는 5.6km 등 총 8km 구간인데 따로 입장료(1만 원)를 내야 한다. 이 물윗길은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탄강 수위가 낮아지는 10월부터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3월까지만 운영한다. 물 위를 걸어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다. 흘러오는 물길을 맞받아치면서 걸어가다 보면 온몸이 물로 정화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물의 풍요로운 기운을 받아들이는 상징적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또 물윗길은 잔도보다 걷기가 더 쉽지만 물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풍광은 또 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고석정에서 만나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우뚝 서 있는 고석바위, 거대한 마당바위, 남북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승일교와 비대칭 현수교인 은하수교, 강물이 깊은 소(沼)를 이룬 송대소 등이 물윗길에서 만나는 장관들이다. 물윗길 코스가 끝나는 태봉대교는 번지점프로 유명한데, 궁예의 태봉국에서 다리 이름을 따왔다. 하늘길의 첫 쉼터인 드르니 쉼터와 물윗길의 마지막 코스인 태봉대교가 모두 궁예와 연결되는 것도 인상적이다.○궁예가 민통선 내에 도성을 세운 까닭은? 한탄강 주상절리길(하늘길+물윗길)에서 빠져나와 더 북쪽으로 철원 노동당사(철원읍 관전리)까지 이어지는 길목에서는 궁예 관련 얘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먼저 철원읍과 동송읍의 주산인 금학산은 도선국사(827∼898)가 궁예에게 도읍 터로 천거하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300년 동안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25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궁예는 이 예언을 무시했다. 현재의 민통선 내 고암산(780m·김일성고지)을 주산으로 삼아 왕궁을 조성했고 결국 예언대로 짧은 통치 끝에 무너졌다. 아마도 이는 왕건의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거나 짧게 끝난 태봉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지어낸 말인 듯하다. 궁예가 도선국사의 말대로 서쪽의 금학산을 주산 즉, 배산(背山)으로 삼으면 동쪽으로는 땅 밑으로 흐르는 한탄강이 임수(臨水)가 된다. 한탄강은 양수 시설이 없으면 절벽 밑의 물을 이용할 수 없고 물살이 거칠어 물류 이동로로 삼기에도 부적절하다. 한 나라의 도읍지 물길로는 맞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궁예는 금학산 일대가 비범한 기운을 지닌 땅임을 알아차렸던 듯하다. 금학산 자락 아래 화지4리는 과거 하늘이 낸 황제의 터라는 의미로 천황지(天皇地)로 불렸다. 철원에서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던 시절 왕건이 살았다는 집터도 바로 인근에 있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철원향교지(철원읍 월하리)가 바로 그곳이다. 현재 잡초만 무성한 철원향교지는 풍수적으로 보기 드문 명당 터라는 점에서 거물급 지도자의 집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철원항교 터 건너편 산쪽으로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도피안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담한 산사 마당에는 보물 제223호인 삼층석탑이 있고 본당에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 또한 강원도의 숨겨진 명당 사찰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궁예가 꿈꾸었던 미륵의 세상은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도피안사의 절 이름과도 썩 어울린다. 역사탐방 여정은 북한 철원군 노동당사에서 끝내기로 한다. 북한이 6·25전쟁 직전까지 사용한 노동당사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안보교육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바로 이 너머 북쪽으로는 철원평화전망대가 있고, 거기서 궁예가 건설한 왕궁터 흔적을 망원경을 통해 구경할 수 있다. 글·사진 철원=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3-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왕기 누른 국토중앙 석탑, 민심까지 다독이는 마음중심이 되다

    국토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충북 충주는 예부터 왕업(王業) 또는 왕도(王都)와 관련한 얘기가 무성한 도시였다. 신라 때는 오소경(五小京) 중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으로 국토의 중앙임을 자부한 부(副)수도였고, 고려 때는 한양 평양과 함께 새 도읍지 후보로 어깨를 겨루던 곳이다. 지금도 충주시를 휘감아 돌아가는 남한강변에는 왕기(王氣)와 관련한 비밀스러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왕기를 진압하라” 국보 제6호 탑평리칠층석탑(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건립 당시 국토 중앙에 서 있다고 해서 중앙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형도 범상치 않다. 강원도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오다가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과 합수(合水)한 뒤 S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면서 수태극(水太極)을 이루고 있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로와 수량이 더욱 풍성해졌을 뿐, 지형은 지금이나 천년 전이나 명당 길지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때는 불교가 흥성했던 통일신라. 어느 날 송림사 주지가 중원경(충주)을 지나다가 강물에서 보라색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신비롭고도 장엄한 기운은 탑평리 고을 쪽으로 뻗어나갔다. 보라색(혹은 자주색)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기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는 경주로 급히 돌아가 왕에게 “중원경에 왕기가 있으니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탑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탑평리칠층석탑 건립 배경에 얽힌 전설이다. 남한강변(탄금호) 야트막한 언덕에 조성된 이 탑(높이 14.5m)은 현전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이 일대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됐지만 지금까지도 사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탑은 사찰용 불탑(佛塔)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혹은 기원을 염두에 둔 원탑(願塔) 성격이 짙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국토 중앙에다 이런 탑을 세웠다는 해석이다. 중앙탑의 이 같은 상징성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중앙탑에서 탑돌이를 하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거나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공원 내에는 국내 조각가들의 작품 26점, 야경이 멋진 탄금호 무지개길, 충주박물관, 조정경기장 등 즐길거리도 많아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는 명소가 됐다. ○남한강에 제사 지낸 탄금대 충주는 고려 시대에 들어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국원경(國原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새 도읍지로도 자주 거론됐다. 고려 후기 바다를 통한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인 충주가 천도지로 부상한 것이다.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충주에 이궁(離宮)을 세운 뒤 주기적으로 충주에서 머물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고려 때 신돈, 이인임 등이 주장한 ‘충주 천도론’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충주가 한 국가의 서울이 될 수 있는 기운을 머금고 있는 터였음을 말해준다. 그런 흔적들은 중앙탑에서 물길을 따라 충주댐이 있는 충주호로 가는 남한강변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중앙탑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약 6km)에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시대 가야 출신의 악성 우륵이 충주를 찾은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륵의 애절한 가야금 연주가 들리는 듯한 ‘탄금정’ 정자와 기암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 도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열두대’ 바위가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다. 그런데 이곳이 고려 이후 국가 차원에서 대천(大川·한강)에 제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양진명소(楊津溟所)가 바로 탄금대였다. 탄금대 아래 깊은 소(沼·연못)를 가리키는 양진명소는 한강 상류를 관할하는 수신(水神)인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용추(龍湫) 혹은 용당(龍堂)으로 불렸다. 그리고 수신을 모신 사당인 양진명소사에서는 관 주도로 정례적인 제사가 이뤄졌다. 왕실에 변고가 생겼을 때 기원하는 기고제(祈告祭), 새로 부임한 충주목사가 찾아와 인사하는 고유제(告由祭)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간 양진명소와 그 사당인 양진명소사는 기록만 전해질 뿐, 그 위치와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20년 충주 역사 문화를 연구하는 민간단체(예성문화연구회)가 양진명소사의 위치와 모습을 담은 100년 전 사진을 찾아냈다. 연구회 측에 의하면 탄금대 신립장군순절비가 있는 곳이 바로 양진명소사 터라고 한다. 신립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당시 조선 군사 수천 명도 이곳에서 희생됐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2년 양진명소사에서 전사한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열었다. 그러다 약 380년 지난 1981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양진명소사 바로 그 터에 신립장군순절비가 건립된 것이다.○3대 왕 배출하는 삼등산 탄금대에서 다시 충주댐 방향으로 10km 정도 이동하다 보면 조동근린공원(동량면 조동리)을 만나게 된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지만 조만간 ‘풍수와 낙조’를 테마로 하는 이색 체류형 관광지가 들어설 곳이다. 충주시는 이곳에다 2023년 완공을 목표로 ‘천지인 삼태극 풍수 휴양촌’을 건설하고 있다. 그럴싸한 건립 배경도 있다. 조선 세조 때 황규라는 풍수 지관이 있었다. 조선팔도의 명당을 찾아다닌 그는 충주에 이르러 명당을 찾게 해달라고 산신제를 올린 후 잠이 들었다. 이윽고 꿈에서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에 명혈이 있는데, 이 기운을 받아 3대의 왕이 날 것이라는 신선의 계시를 듣게 된다. 위성지도를 보면 박달재로 유명한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마치 삼태극 모양으로 물결을 이루듯 이어져 있다. 3대왕 배출 전설이 나올 만한 지세다. 삼등산 중 휴양촌이 들어서는 조동근린공원은 지등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동산으로 유명한 이곳은 호젓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지등산의 땅 기운을 덤으로 받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왕이 난다는 전설은 삼등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여행 여정인 충주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월악산 영봉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뒤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탄허 스님이 1975년 월악산 자락 덕주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월악산 주변에는 밤하늘의 달빛을 담을 만한 큰 강이 흐르지 않았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충주호가 생겨나면서 비로소 달빛이 비치는 큰물이 생겼다. 그 후 30년이 지나자 예언처럼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2022년이 됐어도 남북통일은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미완성의 예언인 셈이다. 충주댐을 건너 광활한 충주호로 들어서면 호수 저 멀리로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눈에 들어온다. 굳이 예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환상적인 경치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충주호와 영봉이 함께하는 경치는 충주나루의 충주호관광선을 이용하거나, 카페 ‘호수가 아름다운 전망대’(동량면 화암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카페 주인장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반과 월악산은 충주 최고의 비경”이라고 자랑한다. 한편 카페에서 호수 건너편으로는 체험형 테마파크인 활옥동굴과 심항산 숲길을 산책할 수 있는 ‘충주호 종댕이길’이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에 좋은 힐링 코스다. 글·사진 충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3-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호남 민심 잡고 조상의 뿌리 찾으리라”… 태종 이방원의 ‘고향행차’

    《조선 27대 왕들 중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점 외에는, 전주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진 왕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들은 전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함흥 출생의 태종과 한양 출생의 세종은 공개석상에서 전주가 고향임을 애써 밝혔다. 최근 TV 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왕의 신분으로 전주를 방문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다. 태종의 자취를 좇아 풍패지향(제왕의 고향)인 전주를 찾았다.》 ○사냥 핑계 대고 전주 찾은 이방원 1413년 10월 1일, 한양에서 출발한 태종의 어가는 마침내 완산성(전주성)에 도착했다. 그가 임금에 오른 지 13년 만의 일이자, 조선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500리(약 20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임금이 순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거리다. 게다가 전주는 태종으로서는 정치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곳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전주의 유력 가문들을 제거했다. 호남 출신 개국공신인 심효생(부유 심씨), 오몽을(보성 오씨), 이백유(완산 이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당시 죽임을 당했다. 태종은 이후 정권이 안정되자 전주의 민심을 달랠 필요를 느꼈다. 전주는 전국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호남의 수부(首府)다. 전남북과 제주도까지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태종은 이런 전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족 세력과의 화해가 정국 운영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은 “태종은 전주 사족과 정적(政敵) 관계인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전주를 전격 방문했다”며 “호남 민심을 수습하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에서의 태종은 매우 인자한 군왕이었다. 임금을 맞이하는 예법과 절차에 하자가 발생했어도 관련자들을 꾸짖거나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일을 잘해도 상을 내리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주에서 벗어나자마자 엄격한 군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귀향 도중 임금이 사용하는 말인 내구마가 경기도 탄천교에서 물에 떨어져 즉사한 사건이 생기자, 책임자(광주판관)에게 80대 장형(杖刑) 및 파면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전주에서 대권 꿈 키운 이성계 강력한 카리스마의 절대군주 태종마저 겸허하게 만든 전주는 사실상 조선의 원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건국주 태조 이성계와 그 직계 선조들의 자취가 이곳에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기(王氣)를 느껴보는 여행 시작점으로는 이목대(전북도기념물 제16호)가 의미가 있다. 이목대는 자만벽화마을로 유명한 교동 초입에 세워진 작은 비각을 가리킨다. 이 일대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도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관원과의 불화를 겪어 강원도, 함경도 등지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이목대 비석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라는 고종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고종은 외세의 침탈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900년에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해 조선의 뿌리인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전주 이씨들의 근거지였던 자만벽화마을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새겨진 다양한 벽화를 구경하는 즐거움과 함께 조선 왕실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바로 ‘자만동 금표(禁標)’다. 고종은 이목대를 설치하면서 이곳을 성역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자만동 금표가 있는 담장에는 고종의 손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피우지 못한 오얏꽃’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조선 왕가를 상징하는 오얏꽃(자두꽃)이 결실을 맺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벽화마을의 이목대에서 도로(기린대로) 건너편을 바라보면 오목대가 보인다. 배나무가 많았다는 이목대와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오목대는 원래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30년대 일제가 산허리를 잘라 철로를 깔면서 두 곳을 분리시켜 버렸다. 현재 도로로 차단된 두 곳은 길 위에 설치된 높은 구름다리로 오갈 수 있다. 오목대 역시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는 유적지다. 태조가 잠시 머문 곳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필 비문 등 역사적 기록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 전하는 내용은 대강 이렇다.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전북 남원 황산벌에서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에 들렀다. 그는 이곳에 남아 있던 친지들을 불러 모은 뒤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건국주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豊邑)에서 천하 패권을 꿈꾸며 불렀다는 노래다. 그러니 이성계가 이 노래를 부른 건 자신 역시 고향에서 대권의 꿈을 노골적으로 밝혔다는 의미다. 그가 고려를 전복하려는 위화도 회군을 하기 8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주에는 한나라 황제 유방과 관련된 글자들이 유독 많다.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의 풍(豊), 서문이었던 패서문의 패(沛) 등이 그러하다. ○백제의 궁성지와 전주한옥마을 전주 이씨들의 자취가 밴 이목대와 오목대를 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전주한옥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전주한옥마을은 오목대에서 풍남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태조로’를 중심으로 600여 동의 한옥이 들어선 형태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한 해 1000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명소였다. 한옥마을의 구심점은 경기전이다. 1410년 태종이 자기 손으로 지었으면서도 끝내 참배하지 못했던 경기전은 입구의 하마비부터 눈길을 끈다. 사자 두 마리가 비석을 좌우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전국 각지의 하마비 중 유일한 지정문화재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마비로 꼽힌다. 경기전 내부에는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317호)를 모신 정전을 비롯해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들의 어진과 의장물을 전시한 어진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태를 묻은 태실 등 여러 유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있는 이곳에 한옥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제가 도로를 넓히기 위해 전주성 성벽을 허물어뜨리면서 일본 상인들이 이 일대 상권까지 장악하게 됐다. 이에 전주의 뜻있는 유지들이 조선의 뿌리까지 침범해 오는 일본인들을 막고자 한옥을 짓고 마을을 건설했다고 한다. 경기전을 나서면 그 맞은편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 순교 성지로 유명한 전동성당을 비롯해 풍남문,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 전라감영 등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들러볼 만하다. 한편 기린봉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위치한 오목대와 전주한옥마을 등 주변 지역은 후백제 도읍지와 중첩되는 곳이기도 하다. 900년 견훤이 전주에 세웠던 후백제 왕도의 진산은 기린봉이었고, 견훤 시기에 쌓은 산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견훤이 머물렀던 왕궁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다. 분명한 건 전주가 한 왕조를 창업해낼 정도로 지기가 왕성한 도시라는 점이다.글·사진 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2-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Food&Dining]디저트 초콜릿 ‘가나 앙상블’ 큰 호응

    롯데제과가 최장수 초콜릿 제품인 가나초콜릿에 디저트 콘셉트를 적용한 ‘가나 앙상블’로 최근 초콜릿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한입 크기의 사이즈로 선보인 이 제품은 지난해 말부터 방영한 ‘전지현 광고’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우 전지현이 출연한 초콜릿 광고가 주요 고객인 20, 30대 여성층뿐만 아니라 남성들부터도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는 게 롯데제과 측 분석이다. 현재 ‘가나 앙상블’은 커피나 와인 등 음료를 마실 때 같이 먹을 수 있는 디저트 브랜드로 3종류가 출시돼 있다. 먼저 ‘다크쇼콜라’는 다크 초콜릿으로 제품 겉면을 감싸고 속 부분은 생크림을 함유한 다크 크림이 들어간 형태인데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초콜릿 맛으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평이다. 나머지 2종류는 밀크 초콜릿에 과자를 씹는 재미를 살린 ‘휘앙티누’와 ‘티라미수’다. ‘휘앙티누’는 밀크 초콜릿 속 부분이 밀크 크림 및 크레페 조각을 잘게 부순 과자 푀유틴(휘앙티누) 칩이 들어가 있고, ‘티라미수’는 속 부분에 티라미수 크림 및 바삭한 치즈 쿠키칩이 함유돼 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2-02-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황금빛 사원-운하공원 야경 둘러본 후 카오산 노점서 맥주 한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해외여행 문화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아름다운 자연, 관광 명소로 떼 지어 가는 단체여행은 대폭 축소됐다. 대신 친환경(Environment), 지역 상생(Social), 정책 및 제도 개선(Governance)을 지향하는 ‘ESG 관광’이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18%를 차지하는 태국은 ESG 관광 선도국 중 하나다. 태국은 코로나19 창궐이 지구 생태계 파괴와 무관치 않다는 인식 아래 친환경적 관광 문화 확대, 지역 맞춤형 관광지 개발, 정부의 적극적 관광 지원책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는 한국 관광업계에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 배낭객들의 집결지 카오산로드에 가보니 한국인들이 동남아에서 즐겨 찾는 태국의 방콕은 과연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태국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고 싶었던 곳은 방콕 시내 카오산로드였다. 전 세계 배낭 여행자들의 아지트인 카오산로드는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젊음의 해방구였다. 그런 카오산로드의 이미지는 출입구의 바리케이드를 만나면서부터 허물어졌다. 카오산로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고 백신접종증명서를 제시해야 했다. 네온사인이 환하게 밝혀주던 카오산 거리는 어둑하기만 했다. 음식점, 숙박업소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몇몇 펍에서 음악을 즐기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부 서양인들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대신 카오산로드 주변 작은 골목에 들어선 노점상들이 다소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한 노점상에서 꼬치구이를 안주 삼아 로컬 맥주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용객 대부분이 현지인들이었다. 원래 이 거리는 방콕 쌀 무역의 중심지였다. ‘카오산’이라는 단어가 ‘가공된 쌀’을 뜻한다. 방콕 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이용해 쌀과 야채 등 곡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태국인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강’으로 통하는 짜오프라야강은 서울의 한강과도 비슷하다. 방콕 시내에서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한강처럼 동서 방향으로 바꾸어 놓고 위성지도를 보면, 카오산로드가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과 청담동에 해당한다. 그만큼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기(地氣)가 풍성한 곳이란 뜻이다. ○배산임수 명당에 자리 잡은 왕궁 ‘물의 도시’ 방콕답게 주요 관광 명소들도 대부분 짜오프라야강을 끼고 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의 왕실을 상징하는 방콕 대궁전,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왓아룬 사원과 왓포 사원, 태국 왕실 선박박물관 등이 강변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5년간의 보수공사 끝에 2018년에 공개한 왓아룬 사원은 태국 왕실 전용 사찰인 에메랄드 사원과 함께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782년 라마 1세가 짜오프라야강 동쪽으로 왕궁을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서쪽의 왓아룬 사원이 직전 왕조(톤부리 왕조)를 대표하는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탑 표면과 사원 외벽이 다양한 색상의 자기 타일로 꾸며져 있다. 동틀 무렵이면 신비롭게 빛난다고 해서 ‘새벽사원’이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거대한 와불(臥佛)로 유명한 왓포 사원이나 새벽사원 등이 풍수적으로 모두 명당 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든 방콕에서 풍수적 자취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짜오프라야강을 바라보며 세워진 방콕 대궁전 뒤편 1.5km 떨어진 곳에는 80m 높이로 쌓아올린 인공 언덕이 있다. ‘푸카오통’(황금산)이라 불리는 이곳에 세워진 황금빛 체디(스투파를 포함한 불탑 양식)는 산이라는 상징성이 부여된 탑이라고 한다. 짜오프라야강 하구에 위치한 방콕은 지형이 대부분 평평하기 때문에 왕궁의 뒤를 받쳐주는 인공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방콕의 올드타운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로 태국의 배산임수(背山臨水) 풍수 현장이다. ○청계천 복원에 영감받은 방콕 운하공원 태국 관광청은 짜오프라야 강변 일대의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딸랏노이. 방콕 차이나타운 인근에 있는 이곳은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에 기름 냄새 풀씬 풍기는 기계부품 가게들과 200년 가까이 된 중국풍 가옥이 밀집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처럼 오래된 도시 뒷골목에서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최고 명물은 담벼락 아래 방치된 오렌지색 피아트500 폐차. 중고차 부품상들이 밀집해 한때 번성했던 곳임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서낭당처럼 알록달록한 천을 걸어둔 마을의 당산나무, 자동차 폐부품이 어지럽게 쌓인 창고에 차려진 커피숍, 명당 기운이 가득한 터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도교 사원과 중국계 전통 부자 가옥 등은 인생샷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의 청계천을 본뜬 도심 운하공원도 개장됐다. 총논시 운하공원의 1단계 사업 중 200m 구간이 먼저 개장됐는데, 공원에서 짜오프라야강까지 이어지는 수로(총 9km)에 산책로도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방콕 시내 고질적인 수질 오염 문제를 개선하고 녹지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관광 자원화한다는 운하공원 프로젝트는 서울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운하공원의 야경은 벌써부터 방콕 시민들로부터 주목을 끌고 있다. 방콕의 초고층 건물이나 대규모 쇼핑몰 등은 여전히 여행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태국의 랜드마크인 마하나콘 빌딩(78층)의 루프톱 전망대 및 스카이워크와 짜오프라야 강변의 복합쇼핑몰 ‘아이콘시암’은 젊은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태국여행 필수품 ‘방역 여권’ 국내 출발전 영문 PCR검사… 입국뒤에도 2차례 더 받아‘검사+격리’ 패키지 활용할만… 동선체크 앱도 설치해야태국 관광청은 최근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 사태로 멈추었던 ‘TEST & GO’(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 관광객의 입국 및 여행 허가 프로그램) 정책을 재개하고, 2월 1일부터 샌드박스 여행 지역도 확대한다고 밝혔다. 샌드박스는 태국 내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한 곳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방콕에서 머물다 푸껫, 끄라비, 파타야, 시창 등 다른 지역으로 가더라도 격리 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태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태국 입국 허가 공식 사이트(tp.consular.go.th)에서 TEST & GO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승인이 되면 이메일로 ‘태국 입국 허가서(타일랜드 패스)’를 받을 수 있다. 일종의 ‘방역 여권’인 셈이다. 이를 태국 입국 시 공항에서 제시하면 된다. 국내에서는 별도로 코로나19 예방접종증명서와 비행기 출발 전 72시간 이내에 영문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예방접종증명서는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발급받을 수 있지만, 영문 PCR 검사 음성 확인서는 10만 원 내외의 발급 수수료가 든다. 태국 입국 뒤엔 두 차례에 걸쳐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태국 공항에 입국한 뒤 바로 받는 1차 검사, 5일차가 되는 날에 받는 2차 검사다. PCR 검사와 격리시설 자격을 갖춘 호텔을 패키지로 묶은 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호텔 측이 마련한 차량에 탑승해 병원으로 바로 가서 PCR 검사를 받은 후 호텔로 돌아와 검사 결과(6∼12시간 정도 걸림)가 나올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한 상품이다. 또 여행 5일차에 한 번 더 검사를 받아야 한다. 태국 입국 즉시 모차나(MorChana) 앱도 내려받아 설치해야 한다. 여행자의 동선을 체크하는 앱이다. 태국 내 여행 시 각종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예방접종증명서를 지참하고 휴대전화에 모차나 앱을 깔아놓는 게 좋다. 귀국했을 때는 또다시 PCR 검사 및 7일간 자가 격리가 필수다. 글·사진 태국 방콕=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2-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능선에 잠든 가야왕국의 신비… 열두줄 우륵 선율에 담겨있을까

    《영남의 가야산은 가야 건국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꽃이 가장 무성하게 핀 곳 중 하나다. 하늘의 천신(天神) 이비가지와 땅의 여신(女神) 정견모주가 사랑에 빠져 2명의 가야국 창건주를 낳았다는 ‘상아덤’ 바위, 금관가야 수로왕과 허왕후가 낳은 7왕자들이 출가했다는 칠불봉 등 가야 관련 설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 가야산 지맥이 뻗어나간 합천, 고령의 산 능선에도 가야연맹체 소속의 고분들이 저마다 독특한 신비감을 뽐내고 있다. 올해 6월 가야산과 낙동강 일대 7곳의 가야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인류 문화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가야산자락 가야고분군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본다.》 ○해인사 지키는 국사대신 가야산자락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 경내. 일주문과 봉황문을 거쳐 해탈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쪽 협소한 공간에는 국사단(局司壇)이란 이름의 작은 전각이 있다. 경내의 웅장한 전각에 눈길을 주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전각 안내판은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자 토지신인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국사단 내부에는 우아하면서 기품 있는 한 여성과 두 아들을 묘사한 탱화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가야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형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두 명의 왕을 배출한 여성 산신이다 보니 대우도 남다른 듯하다. 보통 산신각이 뒤편에 배치되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이곳 국사단은 앞쪽에 세워졌다. 해인사 측은 국사대신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리는 등 가람을 수호하는 신이기 때문에 사찰 입구에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국사단 앞의 한 그루 ‘소원나무’도 범상치 않다. 가야산 산신이 깃든 이 소원나무에서 소원을 적고 국사단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국사단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당 혈(穴)에 자리 잡고 있다. 좋은 기운이 밴 터에서 기도하면 영험함이 크다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인사 경내에 이미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인 802년 해인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이곳이 가야산신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고령 지산동고분, 가야 풍수를 보다 해인사에 깃든 가야 신화를 음미한 뒤, 가야산의 지맥과 정기가 이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대가야의 터전으로 알려진 고령군 지산동고분군(대가야읍 지산리). 가야산의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미숭산을 지나 고령읍의 진산인 주산(이산·310m)까지 이어진 곳이다. 1500여 년 전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지산리의 주산은 대가야 왕과 귀족들의 무덤터였다. 무려 700여 기의 고분이 주산 능선 2.4km를 따라 정상부에서 아래까지 포도송이처럼 들어선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유명하다. 능선과 봉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고분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지산동고분군은 특이하게도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봉분의 크기가 커진다. 권력자일수록 높은 곳에 무덤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마치 산 위의 산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산 중턱이나 평지에 조성한 백제나 신라의 고분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9분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지맥(地脈)은 명당 기운인 혈(穴)이 맺기 어려운 과맥처(過脈處)라고 하여 기존 풍수학에서 매우 꺼린다. 그런데 가야의 고분 입지를 한국 고유의 천문지리관으로 보면 달리 보인다. 한반도 사람들은 청동기시대부터 북두칠성과 여러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놓을 정도로 하늘의 기운을 중시했다. 하늘의 기운인 천기(天氣)가 내려오는 명당 터 곳곳에 규모가 큰 왕릉급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천기형 봉분에서는 권력을 지향했던 대가야 사람들의 기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즉, 지산동고분군은 하늘 에너지를 중요시한 우리 식 자생풍수 현장인 셈이다. 지산동고분군은 무덤떼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연 공원 같다. 야자나무 매트로 깔아놓은 고분 길은 마치 둘레길을 걷는 듯한 편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평화롭고도 운치 있는 외관과 달리 이곳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물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44호분(지름 25×27m, 높이 6m)에서는 순장자만 무려 40여 명이 나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순장무덤으로 기록됐다. 지산동고분 입구에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는 발굴 당시 44호분 내부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관람객들은 고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도시답게 대가야 관련 시설물이 대거 들어서 있다. 대가야국 출신의 악성 우륵이 예술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알려진 대가야읍 쾌빈리 정정골에는 우륵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또 지산동고분군 근처에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와 대가야생활촌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역사테마관광지에서는 관광객들이 고대 문화를 첨단시설로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도록 고대가옥촌, 가마터 체험관, 토기방과 철기방 등 각종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합천 옥전고분군의 따스한 명당 기운 가야산의 정기는 고령군 바로 옆의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야트막한 언덕으로도 이어진다. 구슬밭(玉田)으로 불리는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이 있는 곳이다. 지산동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인 이 고분군 역시 50m 높이의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수십 기의 봉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마치 낙타의 혹처럼 보인다. 이 고분들은 옛 가야연맹체인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당시 금보다 비싸게 거래된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제국 시기에 제작된 유리그릇)가 출토돼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다. M1호분에서 발굴된 투명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는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건너온 것으로서, 가야와 서역 간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였다. 이뿐만 아니다. 지름 21m를 자랑하는 거대 봉분인 M3호분에서는 정교하게 장식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을 비롯해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등 다라국의 화려한 금속공예 기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현재 옥전고분군 입구에 있는 합천박물관 전시실 중앙에는 M3호분의 출토 유물을 실물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역사 속 다라국의 활발했던 대외교역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합천박물관에서 전시물을 살펴본 후 뒤쪽의 옥전고분군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들의 집터 분위기라기보다는 아담한 크기의 봉분들이 마치 자연물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곳곳에 산재한 명당 혈 기운 덕분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기운이 몸을 감싸주는 듯했다. 옥전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혈(穴)이 맺힌 명당에 고분을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지산동고분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지산동고분이 권력과 명예에 도움이 되는 천기 명당이라면, 옥전고분은 풍요와 재복에 도움 되는 지기(地氣) 명당에 해당한다. 실제로 옥전고분군의 주인공들은 황강과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한 대외 교역 중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합천에서 가야고분에 대한 역사산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면 서울 청와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청와대세트장, 합천 허굴산 자락의 천불천탑을 추천한다. 눈요깃거리도 되려니와 설날을 맞아 소원을 비는 기념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글·사진 고령·합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1-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깨어진 석탑의 러브스토리… 우리 선화공주 어디로 갔나

    《서울 공주 부여 익산. 백제의 고도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 도시 중 가장 이색적인 곳이 전북 익산이다. 해상 교류를 중시하던 백제는 도읍을 어디로 옮기든 항상 바다로 통하는 큰 강을 옆에 끼고 왕궁과 도시를 건설했다. 한강 변의 풍납토성, 금강 변의 공주 공산성과 부여 사비성이 그러했다. 반면 익산은 왕궁으로 지목된 왕궁리 유적 주변에 큰 강이 보이지 않는다. 평야지대에 건설한 왕궁 구조도 낯설다. 그럼에도 백제 제30대 무왕과 얽힌 구수한 얘기가 무성하고, 후삼국 시대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영웅들이 몰려든 성소(聖所)가 바로 익산이다.》 고속도로로 익산으로 진입하기 직전 인근의 견훤왕릉(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을 먼저 들렀다. 신라 말기인 900년 견훤(?∼936)은 완산(전북 전주 권역)에서 후백제의 왕임을 선포했다. 혼란스럽기만 한 후삼국 시대, 견훤은 마한과 백제 강역이던 완산에서 후백제의 정통성을 찾았다. 특히 전주 바로 위 익산(금마)을 건국의 정신적 토대로 삼았다. 마한의 중심 권역이자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근거지였고,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려는 그의 의지를 받쳐주는 미륵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신동엽이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익산을 ‘마한과 백제의 꽃밭’이라고 묘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의 꿈은 고려 창업주 왕건에게 패함으로써 좌절됐다. 그러나 그의 무덤만큼은 지금도 완산을 바라보고 있다. 무덤 입구에는 “완산이 그립다”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이곳에다 무덤을 조성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날씨가 아주 맑은 날 익산 미륵산 너머 저 멀리 전주 모악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 금 간 서동의 러브스토리 견훤의 행적을 여행의 등불로 삼아 먼저 미륵사지(익산시 금마면 기양리)를 찾았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륵사지는 신라 황룡사, 고구려 금강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호국사찰이었다. 사찰 규모로 따지자면 경주의 황룡사보다 2배 넓은 16만5000m²(약 5만 평)에 달한다. 견훤은 미륵산 자락 미륵삼존불의 출현 설화를 갖고 있는 미륵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922년 혜거국사를 시켜 미륵사 개탑(開塔) 불사를 통해 백제인의 민심을 하나로 모았고, 미륵신앙의 힘을 빌려 신라를 정벌하는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견훤 이전엔 백제 무왕이 미륵사에 큰 공을 들였다. 미륵사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639년 무왕대에 이르러 대규모 가람으로 완성됐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진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서 만든 이 사찰은 가운데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2개의 석탑이 배치됐고, 각각의 탑 바로 뒤로는 3개의 금당(불상을 모신 법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는 구조였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대로 탑 3개에 미륵불상 3기인 ‘3탑3금당’ 양식이다. 국내 다른 고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다. 미륵사의 가장 중심이었던 목탑은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고, 미륵사지 발굴 당시 2기의 석탑 역시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1990년대에 먼저 동탑이 복원됐다. 그러나 문헌적 근거 없이 추정만으로 2년 반 만에 졸속 복원됐다고 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성형미인’으로 취급받는 동탑은 탑의 내부 구조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채워준다. 서탑(국보 제11호)은 동탑의 사례를 본보기 삼았다. 2001년 해체·보수 작업을 시작한 이후 무려 18년 만인 2019년에 이르러 복원을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선을 보였다. 서탑 복원 과정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선물도 발견됐다. 탑의 1층 심주석 아래 봉안된 금제사리봉영기에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얘기’를 허물어뜨리는 문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보관된 봉영기에서는 사찰 창건의 주역이 무왕의 왕후이자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무왕)이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천년의 설화가 무너지고, 서동이 무왕인가를 두고서도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만한 자료였다. ○무왕과 견훤의 동병상련 분명한 건 익산에서 ‘서동’은 역사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마면의 마룡연못(연동제). 서동의 어머니가 이곳에 살던 용과 정을 통해 서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은은한 연꽃 향기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연동제 도로변에는 서동이 태어난 생가 터(금마면 서고도리 383-12)임을 알리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다. 서동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인 것이다. 한편으로 금마저수지 인근의 서동공원은 서동 스토리를 유등과 발광다이오드(LED)로 꾸며 관광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서동 생가 터에서 불과 1.5km 거리엔 백제 무왕의 무덤이 있다. 규모가 다른 고분 2기가 있다고 해서 ‘익산쌍릉’(사적 제87호)이라고 불리는 고분이다. 큰 고분은 대왕릉, 작은 고분은 소왕릉이라고 불린다. 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이라는 게 정설이다. 소왕릉의 주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왕릉에 서 있다 보니 북쪽으로 미륵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견훤왕릉이 떠오른다. 무왕과 견훤왕은 여러모로 닮았다. 두 왕은 백제의 영광과 부흥을 위해 신라를 상대로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인물들이다. 배경도 비슷하다. 무왕은 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지방 출신이었다.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무왕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이다. 신라 출신 견훤왕이 백제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신라를 몰아치던 것처럼 말이다. ○수세식 화장실 갖춘 백제왕궁 무왕의 주 무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도 생가 터에서 멀지 않다. 왕궁면 왕궁리의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이다. 백제의 이궁(離宮) 혹은 무왕의 집무처로 사용되다가 백제 멸망 후 이곳에 사찰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유적이다. 풍수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백제 본궁보다는 별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르는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금 유리 동 등을 제작했던 공방 터,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등이 발굴됐다. 특히 완만한 지형의 경사면을 따라 지은 인공 수로와 저수시설, 전각마다 물을 활용한 치수시설 등은 당시로서는 첨단을 달리는 공법이다. 공동 수세식 화장실도 갖추고 있었다. 궁의 아래 사면에 마련된 화장실은 분뇨가 일정 자정 작용을 거친 뒤 수로로 배출되도록 한 것이다. 1400여 년 전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 세워졌을 이 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이 탑과 관련한 흥미로운 얘기도 있다. 익산군 읍지인 ‘금마지’(1756년)는 “견훤의 도읍인 완산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다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전한다. 신비한 설화가 켜켜이 묻어 있는 익산은 그 자체가 스토리텔링 여행지다. 최근 익산시는 코레일과 연계해 열차, 렌터카·관광택시, 숙박 등을 한데 묶은 관광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익산의 역사관광 자원에 더해 숨겨진 또 다른 여행지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가옥과 도정 공장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춘포리 마을, 웅장한 메타세쿼이아 500그루에 ‘거룩한 사랑’을 담고 있는 아가페 정원(전북 제4호 민간정원), 탁 트인 비경을 갖춘 금강변 용안생태습지공원 등이 새로운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글·사진 익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2-01-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왜선 깨부순 세계 첫 철갑선 데뷔… ‘무적함대’ 거북선의 함성 들리는 듯

    《12월의 겨울은 과거를 교훈 삼아 미래를 설계하라는 시령(時令)이 내려진 시기다. 옛사람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지혜를 배우는 역사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때다. 남쪽의 따스한 겨울 햇살을 쐬면서 역사 탐방을 즐길 수 있는 남해 한려수도의 중심 사천시를 찾았다. 오미크론 변이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철 비대면 안심관광지(25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사천해전의 현장 무지갯빛 해안도로 사천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을 테마로 삼은 ‘이순신바닷길’이 있다. 총 60km 거리의 해안 도보 여행길이다. 이 중 사천해전이 코앞에서 벌어진 사천시 용현면 선진 앞바다의 해안도로를 특별히 ‘최초 거북선길’로 명명해 기념하고 있다. 남쪽 모충공원에서 북쪽 선진리성까지 12km 거리인데,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전남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사천 앞바다에 왜선 13척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듣고 출전을 결정한다. 거제도 옥포해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후 두 번째 출전하는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은 처음으로 거북선 2척을 실전 투입했다. 돌격용 거북선은 조선 수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군 쪽으로 곧장 쳐들어가 화포를 쏘아대며 세키부네(왜군 함선)를 하나둘씩 깨부수어 나갔다. 대장선의 이순신 장군 역시 선두에 나서 20여 척의 판옥선을 지휘하며 왜선들을 격파했다. 왜선과의 근접 전투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왜선 모두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들은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비밀병기 거북선을 보고 처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떤 반면, 조선 수군은 비로소 이순신 장군에 대한 무한 신뢰와 함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16세기 최첨단 전투선인 거북선이 등장했던 사천 바닷가는 지금 무지갯빛으로 변신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도로변 6.2km 구간의 방호벽 연석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칠해 놓은 무지갯빛 해안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여성의 옆얼굴을 윤곽선으로 표현한 ‘그리움이 물들면’ 조형물(사천대포항 부두), 하트 모양의 포토존 입구에서 갯벌 쪽으로 길쭉하게 뻗어나간 부잔교갯벌탐방로(용현면 금문리), 노란 초승달 모양의 포토존 ‘노품달’(노을 품은 달, 용현면 종포방파제) 등이 차례대로 나타나 피곤한 발품을 넉넉히 보상해준다. 최근에는 남녀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와 인생샷 명소로도 부상하고 있다.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걸어가며 맑은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닷물처럼 청량한 하늘에서는 비행기 한 대가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사천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첨단항공우주과학관 등이 들어선 첨단 항공산업의 메카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6세기 조선의 바다를 지키던 거북선처럼 21세기 우주를 누비는 최첨단 비행체가 사천에서 출현하기를 해와 달에게 빌어 보았다. ○포르투갈 특전사-타타르 거인까지 참여한 국제전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따라 더 북상하면 마침내 ‘최초 거북선길’의 종착지인 선진리성(용현면 선진리 770)이 나타난다. 1597년 임진왜란에 이어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 발발 당시 왜군들이 주둔했다 하여 사천왜성으로도 불리는 성이다. 성벽 둘레가 1km 남짓한 이 성은 해발 30m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에서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 벌어졌다. 1598년 10월 3만 명 규모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여 왜군이 주둔 중인 사천왜성을 공격한다. 이 사천왜성 전투는 다국적 특수군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명 연합군은 공성(攻城)용 대포인 불랑기포를 쏘아대고 포르투갈계 특수군인 해귀(海鬼), 키와 몸뚱이가 보통사람의 10배나 된다는 타타르계 거인(巨人) 등 다국적 출신 용병들까지 동원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명나라 진영 내 불랑기포 화약궤가 폭발하는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명군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탄 왜군들의 기습 공격으로 조명 연합군 7000∼8000명이 어이없게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포함한 7년 전쟁에서 왜군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표방하는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은 1918년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하고 벚나무 1000여 그루를 심는 등 시마즈 가문을 위한 현창 장소로 활용했다. 그러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을 기념한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지고, 6·25전쟁 당시 전사한 대한민국 공군 위령탑도 조성됐다. 역사적 장소가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후대에 재해석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선진리성은 일제강점기 조성된 벚나무로 벚꽃 축제로 유명하다. 또 일본식 경사진 성벽, 일본 히지메성을 본떠 복원한 성문 등이 당시의 왜성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선진리성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는 사천 조명군총과 이총(耳塚)이 있다. 조명군총은 사천왜성 전투에서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집단 무덤이다. 당시 왜군은 전사자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후 일본에 보냈고 부패한 시신들을 한데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다. 이총은 1992년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자 일본 교토 대불전 앞의 코무덤 흙 일부를 가지고 와서 조성한 후,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코보다는 귀를 베어 간 것으로 하는 게 덜 잔혹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에도막부 시대(1603∼1868)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은 코무덤 즉 비총(鼻塚)을 이총으로 둔갑시켰다. 사천의 이총은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윤색하는 일본의 행태를 고발하는 현장이다.○산·바다·섬을 아우르는 사천 명물 케이블카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 선진리성에서 떠나 창선·삼천포대교가 지척에 보이는 대방진굴항(대방동 251)을 찾았다. 이곳도 이순신 장군과 인연이 닿은 장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진영이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거북선을 숨겨두고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을 채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조선 순조 때 돌로 둑을 쌓아서 활처럼 굽은 만을 만들고 인조항구인 굴항을 설치했다. 복원된 지금의 대방진굴항은 아담하고 한적한 공원 같다. 바닷물이 얕게 들어찬 굴항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수령 200년의 팽나무가 초록빛 물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삼천포항과 창선·삼천포대교를 감상하며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다. 창선·삼천포대교 바로 위로는 사천바다케이블카가 연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2018년 4월에 개통한 이 케이블카는 바다와 섬과 산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방정류장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는 초양정류장(초양도)에서 한 번 정차한 후 다시 대방정류장을 곧장 지나쳐 각산전망대가 있는 각산정류장으로 향한다. 각산전망대에서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사천 8경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한편 각산에는 편백나무 향기가 가득한 ‘사천케이블카 자연휴양림’이 올 8월 문을 열어 운영되고 있다. 숙박동과 캠핑이 가능한 야영 덱, 숲 탐방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별주부전’ 전설을 테마로 한 비토섬도 둘러볼 만하다. 비토해양낚시공원, 별주부전 테마파크,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월등도 신비의 길’(이순신바닷길 제3코스) 등 사천의 또 다른 비경이 기다리고 있다.글·사진 사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2-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꽃보다 붉은 충절의 물결따라 巨富의 황금빛 전설이 흐른다

    《경남 진주시를 흠뻑 적시며 흘러가는 남강은 물길의 방향이 예사롭지 않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반면 남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 물길이다. 동양 인문지리학에서는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에서 서출동류를 귀하게 여긴다. 산과 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뤄 땅에서 좋은 기운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강 오백리 물길을 따라 삼성가, LG가, 효성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 탄생했다는 풍수적 진단의 근거이기도 하다. 풍요의 상징인 남강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우리 역사와 신비한 전설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불야성 이룬 진주성과 남강의 논개 12월 초 남강으로의 겨울 여행은 1960년대 남강다목적댐으로 조성된 호수인 진양호 전망대(진주시 판문동)에서 시작된다. 지리산 동쪽 자락에서 흘러온 덕천강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경호강이 만나 넓디넓은 호수를 이룬 장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양호는 새벽녘의 물안개와 해질녘의 노을이 일품이다. 물길은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남강이라는 이름을 얻어 진주시로 흘러들어간다. 붉게 물든 진양호의 노을을 뒤로하고 물길을 따라 형성된 도로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다 보니 진주성이 곧장 나타났다. 밤의 진주성은 낮과는 다른 화려한 야경으로 맞이했다. 진주성 촉석루를 감싸고 유유히 굽이치는 남강의 물결이 불빛으로 일렁거렸다. 용, 봉황, 거북, 연꽃 등 61개의 대형 수상 등(燈)이 물에 두둥실 떠 있다. 불야성을 이루는 진주남강유등축제(12월 4∼31일)가 펼쳐지고 있었다. 매년 개최되는 남강유등축제(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중단)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기원을 둔다. 왜군이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조선군이 강물에 유등(기름으로 켜는 등불)을 띄워 저지하는 한편으로 성 밖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진주성 절벽의 누대 촉석루도 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바위 의암(義巖)도 바로 그 아래로 보였다. 강물 위로 비치는 붉은 불빛이 어느새 핏빛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력 1592년 10월 3800여 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은 진주성에서 약 3만 왜병에 맞서 장쾌한 승리를 거뒀다(제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사에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이다. 이곳에서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9만여 명의 왜군 주력부대가 총결집해 진주성을 재침공했다. 이에 단 6000여 명의 병력으로 9일간 결사항전한 조선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3만8000여 명의 정예군을 잃은 왜군의 기세 역시 상당히 꺾였다. 대신 왜군은 그 보복으로 진주성내 6만여 명의 민간인까지 모두 학살했다. 남강은 물 위에 가득한 시신들로 인해 피바다를 이뤘다. 논개는 바로 이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는 변영로의 시 ‘논개’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3명의 국부(國富) 배출한 솥바위 애국충절의 상징인 진주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남강을 따라 더 동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마을 멀찌감치 남강이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있고, 바로 앞으로는 자그마한 지수천이 또 한번 감싸 돌아주는 명당 마을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여러 겹으로 마을을 감싸줄수록 좋다고 본다. 마을의 내력은 화려했다. 예부터 만석꾼과 천석꾼 부자가 많이 나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부유했던 마을이다.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오늘날의 LG와 GS 그룹을 탄생시킨 산실이기도 하다. 마을 한가운데에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의 생가와 GS그룹의 시조인 효주 허만정의 본가가 두 그룹의 상징처럼 자리잡고 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한 겹사돈과 공동 사업으로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1921년 구인회는 이웃인 허만식(허만정의 6촌)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해 장남 구자경(2019년 작고·LG그룹 명예회장)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만석꾼이던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업 자금을 투자하면서 셋째아들 허준구(구인회의 조카사위·2002년 작고·GS건설 명예회장)에 대한 경영 수업을 부탁했다. 구씨와 허씨의 ‘아름다운 동거’는 이렇게 시작해 손자 대까지 이어져왔던 것이다. 승산마을은 남쪽에는 구씨가가, 북쪽에는 허씨가가 밀집해 살았다고 한다. 구씨가의 대표격인 구인회 생가 바로 옆으로는 구자원(LIG그룹 창업주) 생가, 또 바로 옆으로는 구자신(쿠쿠전자 회장) 생가가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북쪽으로는 허만정 본가와 그 부친인 허선구 고가(지방문화재)를 중심으로 허창수(GS그룹 명예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생가, 허승효(알토 회장) 생가, 허정구(1999년 작고·삼양통상 명예회장) 생가 등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도 인연이 깊다. 이병철은 당시 신식 학교이던 지수보통학교(지수초등학교)로 유학을 와 허씨 가문으로 시집온 누이 집(허순구 가)에서 생활했다. 현재 빈터가 된 이 집에는 그 시절 이병철이 먹고 자란 우물도 보였다. 한편 승산마을 길 건너편에 있는 옛 지수초등학교는 재벌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1980년대까지 지수초등학교 출신 중 30명이 한국의 100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교정에는 의령 출신 이병철,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주), 이곳 출신 구인회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부자 소나무’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현재 폐교된 이곳에는 기업가 정신 교육센터와 대한민국 기업역사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승산마을이 부자 터가 된 결정적인 이유 또한 물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주 남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과정에서 상류에서 싣고 내려온 유기질 풍부한 토사가 하류 부근에 비옥한 땅을 만들어내면 수확물 역시 풍성해진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볍씨 한 말을 심으면 60두를 수확하는 기름진 곳”으로 남강이 굽이치는 진주 땅을 꼽았다. 땅이 비옥하니 이 지역에서 만석꾼, 천석꾼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병철과 조홍제도 남강 물길의 기운을 받는 터에 자리잡은 부잣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에 뛰어들었고,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승산마을에서 빠져나와 다시 남강 물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10km 남짓한 거리의 솥바위(의령군 정암리)를 마지막 여행지로 삼았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의 경계 지점에서 솟아 있는 바위다. 물속에서 4m 높이로 솟아 있는 바위가 솥을 닮았다고 해서 ‘솥바위(鼎巖)’라고 불린다. 이 바위에는 부자 탄생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솥바위 기운을 받아 머지않아 국부(國富) 3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했다. 남강 물 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은 부를 상징하는 솥뚜껑을 닮았고, 물 아래로는 세 개의 발이 남쪽, 북쪽, 동남쪽을 받치고 있는데 그 방향으로 반경 20리(약 8km) 이내에서 부자가 난다는 부연 설명도 뒤따랐다. 그래서 그럴까. 북쪽으로는 이병철 생가(의령군 정곡면)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조홍제 생가(함안군 군북면), 남쪽으로는 구인회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재벌 창업주들도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철의 호인 호암(湖巖)에 바위 암(巖)자가 들어가 있는 게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글·사진 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2-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Food&Dining]떠먹는 프로바이오틱스 국내 첫선… hy, 장 건강에 좋은 ‘프로닉’ 내놔

    유산균 전문기업 hy가 국내 최초로 떠먹는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인 ‘프로닉’을 내놓았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체내에 들어가 건강에 좋은 효과를 주는 살아 있는 균을 가리킨다. 장내 유산균 증식과 유해균 억제 등을 통해 배변 활동과 장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간 액상 형태로 소비자들에게 공급돼 왔다. hy 측은 간편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마시는 프로바이오틱스 3종을 선보인 데 이어 떠먹는 제품을 개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일곤 hy 유제품팀장은 “제품 1개(90g)당 100억 프로바이오틱스가 함유된 프로닉은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기능성을 인정받았다”며 “샐러드 드레싱이나 디저트, 견과류를 더한 아침 대용식 등 여러 가지 레시피로 활용하면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hy 측은 안전하고도 신선한 제품 생산을 위한 시스템을 갖춰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365일 새로운 원유로 배양액을 만들고, 전국 1만1000명의 프레시 매니저와 냉장 카트 ‘코코’를 통한 콜드체인 시스템으로 소비자의 손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11-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Food&Dining]간편하면서 제대로 된 식사 초점… 청정원, 추어탕 등 ‘호밍스’ 출시

    대상㈜ 청정원이 간편식 제품인 ‘호밍스’를 내놨다. ‘홈(HOME)’에 현재진행형을 뜻하는 ‘아이엔지(ing)’를 결합한 브랜드인 호밍스는 가정에서 간편하면서도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는 데 초점을 둔 제품이다. 대상 측은 특히 ‘남도추어탕’ ‘사골김치찌개’ ‘사골우거지들깨탕’ ‘버섯들깨미역국’ ‘소머리곰탕’ 등 호밍스 국탕찌개류의 경우 국물 요리를 기본으로 한식 상차림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호밍스 국탕찌개류의 대표 제품으로 내세운 ‘남도추어탕’은 국산 미꾸라지의 굵은 뼈를 제거하고 발라낸 살만을 통째로 갈아 진한 된장에 끓인 보양식이라고 한다. 미꾸라지를 직접 손질해 만드는 만큼 미꾸라지 함량이 높으며, 굵은 뼈를 제거해 뼈가 씹히는 이물감 없이 부드러운 추어의 식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직접 만든 고추기름을 사용해 비린 맛을 잡았고 국산 무청 시래기와 들깻가루를 넣어 담백한 맛을 살려냈다. 회사 관계자는 “청정원 호밍스 하나만으로 한식 상차림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맛과 영양을 골고루 갖추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11-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두보의 후손 두사충, 하루 천냥 재물운 깃든 경상감영에 둥지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임진·정유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 두사충(작전참모장)은 귀화를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진지와 병영 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한 풍수 전략가였다.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순신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 주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고,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오랑캐(청)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두사충이 정착지로 선택한 곳은 한양이 아닌 대구였다. 현재 대구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 터다. 그가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두사충은 왜군과의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을 누비면서 대구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대구의 남쪽 산인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치달아온 지맥(地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맥은 대구 시내 연구산(현 대구제일중학교)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처형 장소이자 천주교 순교 성지인 관덕정(대구읍성의 남문 쪽)이 자리한 아미산으로 이어지고, 이 기운은 다시 더 북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경상감영공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천보(千步) 정도 거리다. 두사충식 ‘재물 풍수법’에 의하면 한 걸음을 한 냥씩 계산해 천보는 천 냥이 된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뜻이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두사충이 원래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 때인 1601년 이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청한 뒤 1965년 이전할 때까지 ‘영남의 수도’ 역할을 했다. 영남 물자와 세금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 냥이 나오는 길지였던 셈이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경상감영공원에는 선화당(관찰사 집무처)과 징청각(관찰사 처소) 정도가 남아 있다. 1970년 이곳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중수된 건물들이다. 두사충은 선화당과 징청각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명당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취기처(取氣處)로도 좋아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이다. ○ 대구 부자들의 집결처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감영 바로 아래쪽, 계산동(계산성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사충은 이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식솔들의 경제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후 이 일대는 중국 시인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두릉 두씨 세거지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현재 계산성당 출구 쪽 담장에는 뽕나무 골목을 상징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현재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인근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대구시에서 근대문화골목(1.64km 구간)으로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이 일대가 대구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이자 개화 문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 분위기와도 비슷한 근대문화골목은 ‘명당 골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특히 달성 서씨 집성촌이던 진골목은 대구 부자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공간이다. 1900년대 초반 진골목 최고의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대구로 몰려드는 전국 약재상들을 상대로 한 객주 사업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m²가 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의 화교협회(중구 종로 34)가 그가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이고 화교소학교 부지 역시 그의 소유였다. 같은 달성 서씨인 서상돈(1850∼1913) 역시 이곳에서 배출된 부자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면서 3만석꾼 거부로 성장한 그는 후세를 위한 민족교육 사업 등에 매진했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제에 진 1300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애국자였다. 진골목은 달성 서씨 부인 등 7명의 여성이 주도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대구 소주인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부자들도 이 일대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한편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고택(중구 인교동 오토바이골목)과 오늘의 삼성을 키워낸 삼성상회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상회 옛터에는 생전에 이병철이 놓아둔 금고 자리도 재현돼 있는데,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즐겨 쉬어가곤 한다. ○ 100년 전 양옥은 어떤 모습일까?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100여 년 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비싼 붉은 벽돌 가옥이 부자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진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벽돌조 2층 양옥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풍이라고 한다. 당시 양옥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뽕나무 골목 인근에는 서상돈이 살던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집인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거부(巨富)의 기운을 담고 있는 명당이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과 함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천주교 신도였던 서상돈이 기증한 종(아우구스티노)으로도 유명한 계산성당도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다.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풍이 가미된 로마네스크식 성당(사적 제290호)이다. 초기 계산성당은 불이 나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풍수적 조언에 따라 원래 예정지인 언덕배기가 아닌 평지 위에 세워진 점도 특이하다. 6·25전쟁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1919년 만세운동을 했던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청라언덕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이다. 녹색 정원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 대구 시내는 곳곳에 작은 시내가 발달해 장마철만 되면 물에 잠기는 ‘물의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 개발과 더불어 여러 하천이 복개되면서 점차 뜨거워진 도시로 변모했다. 지형의 변화는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바꾸면서 부의 지도도 달라지게 한다. 번성했던 골목이 쇠락하거나, 침체돼 있던 곳이 발전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대구 골목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글·사진 대구=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1-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하루 천냥이 나오는 터’…부자들 집결지 진골목 가보니 [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경북 대구 시내는 곳곳에 작은 하천이 발달해 장마철만 되면 물이 잠기는 ‘물의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 개발과 더불어 여러 하천이 복개되면서 점차 뜨거워진 도시로 변모했다. 지형의 변화는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바꾸게 한다. 이때 번성했던 골목이 쇠락하거나, 침체돼 있던 곳이 발전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100여년 전 근대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대구 시내 골목길 여행을 하다 보면 땅 기운의 변화를 체험해보는 묘미가 있다.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터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임진·정유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 두사충(작전참모장)은 귀화를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진지와 병영 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한 풍수 전략가였다.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순신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 주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고,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직접 선정해 주기도 했다. 오랑캐(청)에 의해 명나라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고 조선에 귀화한 그가 정착지로 선택한 곳은 한양이 아닌 대구였다. 바로 대구시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 터다. 그가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두사충은 왜군과의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을 누비면서 대구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대구의 남쪽 산인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치달아온 지맥(地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맥은 대구 시내 연구산(連龜山; 현 대구제일중학교)으로 흘러와 잠시 숨을 고루었다. 월견산, 오포산이라고도 불리는 연구산이 대구의 진산(鎭山)이 되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연구산, 즉 대구제일중학교 교정에는 돌거북이 조성돼 있다. 거북의 머리는 남쪽의 대덕산을 바라보고 있고,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배치돼 있다. 현지에서는 돌거북을 산등성이에 묻어 남쪽 산과북쪽 대구 중심가가 지맥이 통하도록 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돌거북은 일제강점기와 개발 과정에서 머리와 꼬리 방향이 바뀌는 수난도 겪었는데, 2003년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지금과 같이 위치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아무튼 대덕산의 지맥을 이어받은 연구산의 돌거북 꼬리가 향하는 방향은 북쪽의 반월당역(대구 지하철역) 근처 작은 언덕배기다. 지금은 흔적이 희미하지만 아미산으로 불린 이곳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처형 장소이자 천주교 순교 성지인 관덕정이 자리한 곳이다. 두사충은 아미산을 기준으로 다시 더 북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경상감영공원까지 그 기운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천보(千步) 정도 거리다. 두사충식 ‘재물 풍수법’에 의하면 한 걸음을 한냥씩 계산해 천보는 천냥이 된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뜻이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두사충이 원래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때인 1601년 이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청한 뒤 1965년 이전할 때까지 ‘영남의 수도’ 역할을 했다. 영남 물자와 세금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냥이 나는 길지’였던 셈이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경상감영공원은 당시를 기억하는 상징물로 선화당(관찰사 집무처)과 징청각(관찰사 처소) 정도가 남아 있다. 1970년 이곳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중수된 건물들이다. 두사충은 선화당과 징청각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명당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취기처(取氣處)로서도 좋아 쉬어갈 만한 곳이다. ◆대구 부자들의 집결지 진골목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감영 바로 아래쪽, 계산동(계산성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사충은 이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식솔들의 경제 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두사충의 풍수적 안목으로는 다른 뜻도 숨어 있었던 듯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아미산이 바라보였다. ‘대구읍지’에서 “누에나방의 눈썹 모양”으로 묘사한 아미산을 보고 두사충은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제공함으로써 아미산의 기운을 끌어당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마치 서울의 남산이 누에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실에 뽕나무를 심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이후 이 일대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대구 두릉두씨 세거지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현재 계산성당 출구쪽 담장에는 뽕나무 골목임을 상징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현재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인근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대구시에서 근대문화골목(1.64km)으로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이 일대가 대구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이자 개화 문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 분위기와도 비슷한 근대문화골목은 ‘명당 골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달성 서씨 집성촌이던 진골목은 대구 부자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공간이다. 1900년대 초반 진골목 최고의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대구로 몰려드는 전국 약제상들을 상대로 한 객주 사업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가 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의 화교협회(중구 종로 34)가 그가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이고 인근 화교소학교 부지 역시 그의 소유였다. 같은 달성 서씨인 서상돈(1850~1913) 역시 이곳에서 배출된 부자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면서 3만석지기 거부로 성장한 그는 후세를 위한 민족교육 사업 등에 매진했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정부가 일제에 진 130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애국자였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진골목의 여성들도 앞장섰다. 달성 서씨 부인 등 7명의 여성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은반지 모으기 등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고종의 동참과 여성들이 가세한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진골목에 여성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임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진 배경이다. 이외에도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부자들도 진골목 일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원만이 살던 집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는데, 현재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진골목의 부자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있던 고택들은 대개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시개발과정에서 재물 기운의 상징인 수로와 도로가 바뀌는 등 변화가 생긴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편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800m 남진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고택(중구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부근)과 오늘의 삼성을 키워낸 삼성상회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상회 옛터에는 생전에 이병철이 놓아둔 금고 자리도 재현해놓았는데,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여서 사람들이 즐겨 쉬어 가곤 한다. ◆ 100년 전 양옥은 어떤 모습일까?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시내에 있으면서도 100년 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근대 건축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비싼 붉은 벽돌 가옥이 부자들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진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벽돌조 2층 양옥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풍이라고 한다. 당시 양옥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뽕나무 골목 인근에는 서상돈이 살던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집인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거부의 기운을 담고 있는 명당이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과 함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한편 천주교 신도였던 서상돈이 기증한 종(아우그스티노)으로도 유명한 계산성당은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풍의 로마네스크식 성당(대한민국 사적 제290호)이다. 초기 계산성당은 한옥식 목조 건물이었지만 불에 타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적벽돌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풍수적 조언에 따라 언덕배기가 아닌 평지 위에 성당이 세워진 점도 특이하다. 계산성당은 6·25전쟁 중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성당 옆 한 카페 명당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계산성당의 건축미와 명당 기운을 즐기는 감흥을 누릴 수 있다.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1919년 만세운동을 했던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작은 언덕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인데, 녹색 정원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당시 대구는 외국인들의 눈에도 이상적인 주거공간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명나라 출신 두사충 뿐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러 왔다가 오히려 귀화한 사야가(김충선) 역시 대구시 달성군 우록리에 정착했다. 또 일제강점기 대구 시내는 중국계 화교, 프랑스계 신부, 미국계 선교사 등이 모여 살던 국제적 도시였다. 대한민국 산업화시대 성장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구가 다시 일어서길 기대해본다. 땅의 운세가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1-19
    • 좋아요
    • 코멘트
  • 벼랑길 도는 ‘원주율’ 363m… 아찔한 가을에 간담 서늘

    《강원도 18개 시군 중 유일하게 두 자릿수 인구 증가율을 보이는 원주시는 성장하는 도시다. 춘천, 강릉과 함께 강원 3대 도시로 꼽히는 원주는 인구수도 35만6000여 명(2021년 9월 현재)으로 도내에서 제일 많다.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삶터의 환경이 그만큼 좋아짐을 뜻한다. 풍수설로는 땅의 기운(지기·地氣)이 살아남을 말한다. 단풍의 계절 가을의 푸근함과 함께 생동감을 체험하는 여행지로 원주를 선택한 이유다.》 ○반계리 은행나무에 웬 종유석?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원주로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문막읍의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를 권한다. 천연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 32m, 둘레 16.27m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로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와 어깨를 견준다. 샛노란 단풍이 뫼산(山)자 형태로 물든 모습은 마치 거대한 등불을 밝힌 듯 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경북 예천의 반송 석송령을 연상시킨다. 나무는 원 줄기가 고사한 뒤 새로 생긴 여섯 갈래 줄기가 마치 한 몸처럼 자라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전쟁 등 온갖 역사의 풍상을 거친 노거수가 피워내는 은행잎치고는 앙증맞은 크기다. 지금도 젊은 나무임을 의미한다. 가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처럼 땅을 향해 자라는 ‘유주(乳柱)’들이 곳곳에 나 있다. 은행나무 유주에 대해선 낙타의 혹처럼 생성된 ‘비상식량 주머니’, 뿌리 호흡만으로 모자란 숨을 보충하기 위해 허공에 드러낸 기근(氣根), 상처 난 곳을 자가 치유한 흔적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된다. 명당 터에 자리 잡은 데다 생명 창조와 양육의 이미지가 짙은 이 나무에는 전설도 따른다.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 물을 마신 후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됐다고도 하고, 나무에 거대한 백사(白蛇)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어서 이곳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했다고도 한다. 가을에 이 나무에 단풍이 일시에 들면 다음해는 반드시 풍년이 든다는 속설도 전해진다.○원주, 소금산 그랜드밸리로 대변신 반계리 은행나무에서 섬강 물줄기를 따라 북상해 ‘소금산 그랜드밸리’로 향한다.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원주 간현관광지가 새롭게 변신하고 있는 곳이다. 소금산 아래 섬강과 삼산천의 합수(合水) 지점에 자리한 이곳은 2018년 개장 당시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200m)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어서 12월이면 잔도(棧道)와 전망대, 울렁다리,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 글램핑장 등을 갖춘 대규모 레저단지로 또다시 탈바꿈하게 된다. 소금산 그랜드밸리 코스는 출렁다리부터 시작된다. 모두 578개의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두 개의 절벽 사이에 놓인 높이 100m의 출렁다리가 아찔하게 펼쳐진다. 격자형으로 꾸민 바닥으로 발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다리가 흔들거려 간담이 서늘해지지만, 기암 준봉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맑디맑은 심상천을 먼 거리로 감상하면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소금산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하늘정원’ 덱이 있고, 이어서 곧 개장되는 소금잔도와 전망대, 울렁다리가 차례로 나타난다. 소금산 정상부 바로 아래 200m 높이의 벼랑을 끼고 도는 소금잔도(363m)는 중국 장자제(張家界)의 유리잔도 못지않게 아슬아슬한 길이다. 현재 막바지 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소금잔도를 건너면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암벽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린 듯한 전망대 자체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데, 360도로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는 게 아찔해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울렁다리는 출렁다리보다 2배 더 긴 404m로 국내 최장 보행 현수교로 기록된다. 울렁다리를 건너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올 수 있다. 원주시 관계자는 “소금산 그랜드밸리 건설로 원주가 군사도시라는 옛 이미지를 탈색하고 완벽한 문화관광도시로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소금산 그랜드밸리에서는 특별한 밤을 보낼 수 있다. 출렁다리 아래 바위를 배경 삼아 조성된 미디어파사드 공연장에서는 밤마다 ‘나오라쇼(Night of Light Show)’가 펼쳐진다. 가로 250m, 세로 70m 크기의 자연 암벽에다 빔 프로젝트를 활용해 입체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이다. 현재 원주의 대표적인 보은 설화인 ‘은혜 갚은 꿩’을 소재로 한 영상물과 최대 60m까지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음악분수 쇼가 펼쳐지고 있다. ○절정으로 치닫는 치악산 단풍 원주에서 가을의 진미인 단풍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원주를 동서로 갈라놓은 섬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구룡사(소초면 학곡리) 단풍과 서쪽의 뮤지엄산(지정면 월송리) 단풍은 각기 색다른 특징이 있다. 먼저 치악산자락의 구룡사 단풍은 한창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구룡사 사천왕문 옆에 들어선 수령 200년인 은행나무가 노란 잎으로 가을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본격적인 단풍은 구룡사를 지나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즐길 수 있다. 특히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얽혀 있는 구룡소에서 2단 폭포로 유명한 세렴폭포까지는 경사가 거의 없어 산책을 하듯 단풍을 즐기기에 좋은 코스다. 구룡사지구의 단풍은 산 정상과 아래에서 동시에 단풍이 들기 시작해 산의 중턱에서 마지막을 치장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한편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구룡사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단풍과 대조돼 돋보인다. 사찰 건물 내 대부분이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구룡사 단풍이 인공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미가 있다면, 뮤지엄산의 단풍은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원주 오크밸리의 골프 빌리지 안쪽에 위치한 이곳은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미술관이다. 야외에 설치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조각품이 주변의 곱디고운 단풍나무와 어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산의 풍경과도 자연스럽게 조화돼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전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뮤지엄산은 휴식과 명상을 원하는 이들을 배려한 ‘명상관’과 ‘제임스터렐관’을 따로 갖추고 있다. 특히 빛과 공간을 이용하는 설치미술가이자 심리분석가인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을 자극하는 듯하다. 영성을 중시하는 퀘이커교도인 그의 작품 공간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인체의 백회(정수리 부분)와 인당(양 눈썹 사이), 그리고 내면의 자아가 깨어나는 듯한 자극을 받게 된다. 예술을 통한 명상 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한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치악산 자락의 단풍과 뮤지엄산의 단풍을 모두 즐기기를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원주의 상징인 치악산 산행도 해볼 만하다.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친다’고 소문난 치악산 산행을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산 아랫자락을 연결한 둘레길(전체 11개 코스 139.2km)이 올해 6월 개통됐다. 이 중에서도 마지막 제11코스(한가터길 9.4km)는 길이 평탄해 산책을 하듯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야자 매트를 깔아놓은 길을 걷다 보면 잣나무 숲과 화전민이 살던 터 등을 볼 수 있고, 저 멀리 원주가 성장하는 도시임을 알리는 원주혁신도시 등이 내려다보인다.글·사진 원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1-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단풍에 물들고 기암절벽에 빠져드는 원주의 가을[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강원도 18개 시·군 중 유일하게 두자릿수 인구 증가율을 보이는 원주시는 성장하는 도시다. 춘천, 강릉과 함께 강원 3대 도시로 꼽히는 원주는 인구수도 35만6000여 명(2021년 9월 현재)으로 도내에서 제일 많다.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삶터의 환경이 그만큼 좋아짐을 뜻한다. 풍수설로는 땅의 기운(지기·地氣)이 살아남을 말한다. 원주시는 풍수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을 잘 보여주는 도시다. 지기쇠왕설은 지기가 왕성할 때는 삶의 환경이 흥성해지지만, 지기가 쇠퇴할 때는 삶터가 침체에 빠진다는 논리다. 원주는 조선시대에 강원도 행정의 중심인 강원감영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을 누렸지만, 6·25전쟁 후 제1군사령부와 미군기지 등이 들어서면서 군사도시로 한동안 침체됐었다. 그러다 2000년대 이후 원주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들어서고, 대규모 관광시설들을 선보이면서 문화관광도시로 급부상중이다. 치악산 단풍으로 유명한 원주에서 가을의 푸근함과 함께 지기의 생동감을 체험해보자. ○ 반계리 은행나무에 웬 종유석?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원주로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문막읍의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를 권한다. 천연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 32m, 둘레 16.27m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로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와 어깨를 견준다. 샛노란 단풍이 뫼 산(山)자 형태를 물든 모습은 마치 거대한 등불을 밝힌 듯 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경북 예천의 반송 석송령을 연상시킨다. 나무는 원 줄기가 고사한 뒤 새로 생긴 여섯갈래 줄기가 마치 한 몸처럼 자라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전쟁 등 온갖 역사의 풍상을 거친 노거수가 피워내는 은행잎치고는 앙증맞은 크기다. 지금도 젊은 나무임을 의미한다. 가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처럼 땅을 향해 자라는 ‘유주(乳柱)’들이 곳곳에 나 있다. 은행나무 유주에 대해선 낙타의 혹처럼 생성된 ‘비상 식량 주머니’, 뿌리 호흡만으로 모자란 숨을 보충하기 위해 허공에 드러낸 기근(氣根), 상처난 곳을 자가 치유한 흔적 등 여러 견해들이 제기된다. 그런데 반계리 은행나무 유주는 이름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거나 남성의 생식기처럼 기이하게 생겼다. 이 때문에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산모가 이 나무에 정성을 들이면 젖이 잘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생식기처럼 생긴 모습을 보고 자식을 낳기는 원하는 이들이 기도하러 찾아온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보는 방향에 따라 색다른 모습이 펼쳐지는데, 주위를 찬찬히 한바퀴 돌다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바로 이 터의 풍요로운 지기 때문이다. 명당 터에 자리잡은 데다 생명 창조와 양육의 이미지가 짙은 이 나무에는 전설도 따른다.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물을 마신 후 지팡이를 꽃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됐다고도 하고, 나무에 거대한 백사(白蛇)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어서 이곳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했다고도 한다. 가을에 이 나무에 단풍이 일시에 들면 다음해는 반드시 풍년이 든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 소금산 그랜드밸리로 관광도시로 탈바꿈 반계리 은행나무에서 섬강 물줄기를 따라 북상해 ‘소금산 그랜드밸리’로 향한다.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원주 간현관광지가 새롭게 변신하고 있는 곳이다. 소금산 아래 섬강과 삼산천의 합수(合水) 지점인 명당 터에 자리한 이곳은 2018년 개장 당시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200m)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어서 12월이면 잔도(棧道)와 전망대, 울렁다리,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 글램핑장 등을 갖춘 대규모 레저단지로 또다시 탈바꿈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길이 합쳐지는 합수 지점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물은 재물을 불러들인다는 풍수 논리도 이런 환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금산 그랜드밸리 코스는 출렁다리부터 시작된다. 모두 578개의 나무 계단을 밝고 올라서면 두 개의 절벽 사이에 놓인 높이 100m의 출렁다리가 아찔하게 펼쳐진다. 격자형으로 꾸민 바닥으로 발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다리가 흔들거려 간담이 서늘해지지만, 기암 준봉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맑디맑은 심상천을 먼거리로 감상하면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소금산 정상쪽으로 이어지는 ‘하늘정원’ 덱이 있고, 이어서 곧 개장되는 소금잔도와 전망대, 울렁다리가 차례로 나타난다. 소금산 정상부 바로 아래 200m 높이의 벼랑을 끼고 도는 소금잔도(363m)는 중국 장자제(張家界)의 유리잔도 못지않게 아슬아슬한 길이다. 현재 막바지 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소금잔도를 건너면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암벽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린 듯한 전망대 자체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데, 360도로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는 게 아찔해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울렁다리는 출렁다리보다 2배 더 긴 404m로 국내 최장 보행 현수교로 기록된다. 울렁다리를 건너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올 수 있다. 입구의 관광안내센터에서 출렁다리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까지 마저 설치되면 간현관광지는 소금산 그랜드밸리로 완전히 변신하게 된다. 원주시청 관계자는 “소금산 그랜드밸리 건설로 원주가 군사도시라는 옛 이미지를 탈색하고 완벽한 관광도시로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소금산 그랜드밸리에서는 특별한 밤을 보낼 수 있다. 출렁다리 아래 바위를 배경 삼아 조성된 미디어파사드 공연장에서는 밤마다 ‘나오라쇼(Night of Light Show)’가 펼쳐진다. 가로 250m, 세로 70m 크기의 자연 암벽에다 빔 프로젝트를 활용해 입체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이다. 현재 원주의 대표적인 보은 설화인 ‘은혜 갚은 꿩’을 소재로 한 영상물과 최대 60m까지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음악분수 쇼가 펼쳐지고 있다. ○ 절정으로 치닫는 치악산 단풍 원주에서 가을의 진미인 단풍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원주를 동서로 갈라놓은 섬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구룡사(소초면 학곡리) 단풍과 서쪽의 뮤지엄산(지정면 월송리) 단풍은 각기 색다른 특징이 있다. 먼저 치악산자락의 구룡사 단풍은 한창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구룡사 사천왕문 옆에 들어선 수령 200년인 은행나무가 노란 잎으로 가을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 역시 좋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서 지기를 느끼면서 구룡사와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본격적인 단풍은 구룡사를 지나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즐길 수 있다. 특히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얽혀 있는 구룡소에서 2단 폭포로 유명한 세렴폭포까지는 경사가 거의 없어 산책을 하듯 단풍을 즐기기에 좋은 코스다. 구룡사지구의 단풍은 산 정상과 아래에서 동시에 단풍이 들기 시작해 산의 중턱에서 마지막을 치장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한편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구룡사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단풍과 대조돼 돋보인다. 사찰 건물 내 대부분이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구룡사 단풍이 인공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미가 있다면, 뮤지엄산의 단풍은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원주 오크밸리의 골프 빌리지 안쪽에 위치한 이곳은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미술관이다. 야외에 설치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조각품이 주변의 곱디고운 단풍나무와 어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산의 풍경과 도 자연스럽게 조화돼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전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뮤지엄산은 휴식과 명상을 원하는 이들을 배려한 ‘명상관’과 ‘제임스터렐관’을 따로 갖추고 있다. 특히 빛과 공간을 이용하는 설치미술가이자 심리분석가인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을 자극하는 듯하다. 영성(靈性)을 중시하는 퀘이커교도인 그의 작품 공간에 빨려 들어가다보면 인체의 백회(정수리 부분)와 인당(양 눈썹 사이), 그리고 내면의 자아가 깨어나는 듯한 자극을 받게 된다. 예술을 통한 명상 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머리 부분인 상단전(上丹田; 백회·인당 부위)이나 중단전(中丹田; 가슴 부위)이 활성화되면 숨어 있던 초월적 감각들이 각성된다고 본다. 그러고보니 제임스터렐관에서 작품 체험을 하고 나서보니 감각들이 더 활성화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뮤지엄산이 들어선 터가 보기 드문 명당 터임이 분명하게 각인됐다. 안영배 기자·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1-05
    • 좋아요
    • 코멘트
  •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韓-英 국제 전문가 심포지엄 개최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원장 김용호)은 11월 2일(화)과 3일(수)에 걸쳐 ‘코로나 시대 한·영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과제(New Agenda for South Korea-UK cooperation in the COVID-19)’를 주제로 한 윤보선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영국 에딘버러대와 함께 개최하는 이번 심포지엄은 양국의 오프라인 교류가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줌(ZOOM)과 유투브(YouTube)를 활용해 개최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학계의 전문가와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석해 코로나-19가 한국과 영국의 동맹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각국의 사회, 문화,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심도 깊게 논의한다. 심포지엄 1일차에는 사이먼 스미스 주한영국대사와 김건 주영한국대사의 축사와 함께 이태식 전 주영·주미대사의 민주주의의 방향성에 대한 기조 강연이 있다. 이어지는 제1세션에서는 김영미 교수(에든버러대)의 논찬과 함께 코로나-19 이후 새롭게 펼쳐지는 정치·경제 문제에 대해 조영호 교수(서강대)와 사라 리우 교수(에든버러대)가 각각 논의한다. 심포지엄 2일차인 제2세션에서는 박찬욱 교수(서울대)의 논찬과 함께 국제개발협력에 대해 임소진 교수(센트럴 랑카셔대)와 김태균 교수(서울대)가 논의를 이어간다. 마지막 세션인 제3세션에서는 박인휘 교수(이화여대)의 논찬과 함께 코로나-19 상황에서 나타나는 미중관계에 대한 한영 양국의 입장과 시각에 대해 각각 안인해 교수(고려대)와 올리버 터너 교수(에든버러대)가 논의한다.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은 해위 윤보선대통령의 모교인 영국 에든버러대학과 함께 9년간 시의성 있고 특별한 주제를 바탕으로 학술교류를 진행해오고 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11-01
    • 좋아요
    • 코멘트
  • 가슴 찡한 적송의 향기… 눈부신 노을은 네 붉은 상처 같구나

    《조선시대에 건설된 운하로 육지가 섬이 된 충남 태안군 안면도는 변형된 지형만큼이나 굴절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안면송이라고 불리는 훌륭한 적송(赤松) 덕분에 고려와 조선 때는 섬 전체가 ‘왕실의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외국 침탈 시기에는 수탈의 대상이 됐다. 섬이 통째로 일본인에게 팔리는 일도 겪었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갖춘 안면도 가을 여행은 땅에 얽힌 역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태안 안면도자연휴양림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거닐다가 상처 난 적송 한 그루를 만났다. 수령 100년 남짓, 반달곰의 표식처럼 나무 한 가운데 V자형 상처를 안고 있는 적송은 송진으로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다. 소나무를 칼자국처럼 난도질한 이는 누구였으며,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927년 4월, 안면도는 단돈 82만3000원에 일본인에게 통째로 팔렸다. 당시 ‘신한민보’는 ‘8000명 사는 안면도 일인(日人) 부호에게 팔렸다’는 제목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안면도 국유림 매각 소식을 전하면서 “왜(일본)의 마생태길(麻生太吉·아소 다키치)이 이 섬의 왕이 됐다”고 개탄했다. 마생태길은 한국에 대한 망언을 일삼아온 일본 아소 다로 전 재무상의 증조부이고, 그가 운영한 마생상점(아소상점)은 강제징용으로 물의를 빚은 대표적인 전범기업 중 하나다. 아소 다키치는 안면도를 사들인 뒤 안면도임업소를 설치했다. 품질이 뛰어난 안면송을 자신이 운영하는 탄광의 갱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적송 벌목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안면도임업소 책임자 하야시 세이조(林省三)는 안면도를 자신의 왕국인 양 경영했다. 하야시 세이조는 특히 안면송에 톱날로 V자형 상처를 냄으로써 저렴하고도 손쉽게 송진을 다량으로 채취해내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90년 세월이 넘도록 안면송의 ‘고문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유다. 이렇게 채취된 송진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의 항공용 송탄유(松炭油)로 제공됐다. 일제 치하 35년간 학대받아온 안면송은 원래 귀한 대접을 받던 품종이다. 위는 불그스레하고 아래는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잔가지 없이 하늘로 곧게 뻗어나간 안면송은 고려시대 이후 궁궐 혹은 군선 자재용, 황장목(黃腸木·왕실의 관을 짤 때 쓰는 나무) 등 특별한 용도에만 쓰였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도, 13년 전 서울의 불 탄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도 안면송은 건축 자재로 빠지지 않았다. 안면송은 국가의 중대사와 함께하는 소나무였던 셈이다. 현재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안면송을 품고 있는 안면도자연휴양림은 수령 100년 내외의 소나무 천연림이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산자락에 배치한 숲속의 집(18동), 산림휴양관 등에서 묵어갈 수 있는데 예약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휴양림과 함께 그 건너편의 안면도수목원도 둘러볼 만하다. 이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소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기와 함께 서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몸과 마음이 맑아짐을 느끼게 된다.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사는 마을 조선시대에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던 ‘왕실의 숲’ 안면도는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살 수 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로웠다. 나무 하나만 잘 다루어도 먹고살 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스며들 듯 하나둘씩 찾아왔다. 안면도가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이라는 뚜렷한 증거도 있다. 바로 고남면 패총(조개무지)이다. 패총은 옛 사람들이 바닷가나 강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패총에서는 옛 사람들이 쓰던 토기와 석기 등 유물들이 많이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으로 간주된다. 거기에 더해 한반도의 선주민들이 땅을 고르는 안목도 살펴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역을 찾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판단한 터에 생활 근거지를 마련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움집, 고인돌 무덤 등이 거의 대부분 풍수적으로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면도 고남면 일대에서는 10여 개의 패총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에 사용한 패총 위에 청동기시대의 패총이 겹치는 곳도 있었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었다는 뜻이다. 현재 서해 갯벌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고남패총박물관(고남면 안면대로 4270-6)에서는 이곳 패총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체험전시실, 체험학습실 등에서 선사시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가을바다 여행의 백미, 안면도 바람길 소나무와 패총으로 이어지는 안면도 ‘땅의 역사’ 길목은 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해변길 코스로도 연결된다. 고남패총박물관 바로 남쪽에 있는 영목항(안면도 최남단)에서부터 해변을 따라 북상해 황포항까지 이어지는 16km 길은 ‘바람길(태안 해변길 7코스)’로 불린다. 걸어서는 5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체로 길이 평탄해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이곳에는 운여해변, 바람아래해변 등이 독특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낸다. ‘운여(雲礖)’는 앞바다가 넓게 트여 파도가 높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이 마치 구름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변길을 따라 해송이 내뿜는 솔향기를 맡으며 지극히 고운 규사로 구성된 백사장, 물고기를 잡는 독살, 해안사구 등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운여해변은 멋진 일몰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일몰 때가 되면 한적하던 해변이 다소 번잡스러워진다. 낙조를 촬영하기 위해 때맞춰 사진 동호인들이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바람아래해변은 마치 사막과 같은 모래언덕 아래로 바람도 비켜간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다양한 생물종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해루질로 유명하다.○가을꽃 명소로 꼽히는 태안 안면도국제꽃박람회 등 꽃동네로 널리 알려진 태안은 현재 가을꽃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 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해수욕장의 코리아플라워파크(안면읍 꽃지해안로 400)에서는 안젤로니아, 천일홍, 코키아 등 다양한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중 안젤로니아 꽃밭에는 명화 속 인물들이 조형물로 설치돼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안면도 북쪽 남면에 있는 청산수목원은 황금삼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낙우송길 등을 따라 다양한 꽃들과 나무, 수생식물종이 배치돼 있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산책하듯이 걷기에 좋다. 특히 황금삼나무길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현재 이곳 수목원에서는 가을을 맞아 팜파스그라스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나라 억새보다 키가 크고 흰 솜털처럼 생긴 꽃이 인상적인 팜파스그라스는 남미 초원지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인데, 이국적인 분위기로 인기몰이 중이다. 또 핑크뮬리도 만개해 주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들여온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몽환적인 색깔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태안은 지금 대하와 꽃게가 제철이다. 대하구이와 꽃게탕 등으로 가을의 또 다른 포만감을 맛볼 수 있다. 글·사진 태안=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1-10-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 사는 마을” 풍요로운 안면도 가을여행

    《 운하 건설로 육지가 섬이 된 충남 태안군 안면도는 변형된 지형만큼이나 굴절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 안면송이라고 불리는 훌륭한 적송(赤松) 덕분에 고려와 조선 때는 섬 전체가 ‘왕실의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외국 침탈 시기에는 수탈의 대상이 됐다. 섬이 통째로 일본인에게 팔리는 일도 겪었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갖춘 안면도 가을 여행은 땅에 얽힌 역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 충남 태안 안면도자연휴양림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거닐다가 상처 난 적송 한 그루를 만났다. 수령 100년 남짓, 반달곰의 표식처럼 나무 한 가운데 V자형 상처를 안고 있는 적송은 송진으로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다. 소나무를 칼자국처럼 난도질한 이는 누구였으며,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인 1927년 4월, 안면도는 단돈 82만3000원에 일본인에게 통째로 팔렸다. 당시 ‘신한민보’는 ‘8000명 사는 안면도 일인(日人) 부호에게 팔렸다’는 제목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안면도 국유림 매각 소식을 전하면서 “왜(일본)의 마생태길(麻生太吉, 아소 다키치)이 이 섬의 왕이 됐다”고 개탄했다. 마생태길은 한국에 대한 망언을 일삼아온 일본 아소 다로 전재무상의 증조부이고, 그가 운영한 마생상점(아소상점)은 강제징용으로 물의를 빚은 대표적인 전범기업 중 하나다. 아소 다키치는 안면도를 사들인 뒤 안면도임업소를 설치했다. 품질이 뛰어난 안면송을 자신이 운영하는 탄광의 갱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적송 벌목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안면도임업소 책임자 하야시 세이조(林省三)는 안면도를 자신의 왕국인 양 경영했다. 그는 경계조사 및 침간지 정리사업, 목재 반출, 송진 채취, 안면도민에 대한 강제적 노동력 동원 등 일본 식민지 사업 확장의 선봉에 섰다. 그는 안면도에서 쌓은 경영 노하우를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통치에도 적용되도록 ‘안면도, 만주낙토건설의 지침’이라는 글까지 발표했다. 하야시 세이조는 특히 안면송에 톱날로 V자형 상처를 냄으로써 저렴하고도 손쉽게 송진을 다량 채취해내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90년 세월이 넘도록 안면송의 ‘고문당한’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다. 이렇게 채취된 송진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의 항공용 송탄유(松炭油)로 제공됐다. 일제 치하 36년간 학대받아온 안면송은 원래 귀한 대접을 받던 품종이다. 위는 불그스레하고 아래는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잔가지 없이 하늘로 곧게 뻗어나간 안면송은 고려 시대 이후 궁궐 혹은 군선 자재용, 황장목(黃腸木, 왕실의 관을 짤 때 쓰는 나무) 등 특별한 용도에만 쓰였다.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도, 13년 전 서울의 불탄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도 안면송은 건축 자재로 빠지지 않았다. 안면송은 국가의 중대사와 함께 하는 소나무였던 셈이다. 현재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안면송을 품고 있는 안면도자연휴양림은 수령 100년 내외의 소나무 천연림이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산자락에 배치한 숲속의 집(18동), 산림휴양관 등에서 묵어갈 수 있는데 예약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휴양림과 함께 그 건너편의 안면도수목원도 둘러볼 만하다. 이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소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기와 함께 서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몸과 마음이 맑아짐을 느끼게 된다.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 사는 마을조선시대에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던 ‘왕실의 숲’ 안면도는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로웠다. 숲이 울창하고 땅이 비옥해 나무 하나만 잘 다루어도 먹고 살 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스며들 듯 하나둘씩 찾아왔다. 안면도가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이라는 뚜렷한 증거도 있다. 바로 고남면 패총(조개무지)이다. 패총은 옛 사람들이 바닷가나 강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패총에서는 옛 사람들이 쓰던 토기와 석기 등 유물들이 많이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으로 간주된다. 거기에 더해 한반도의 선주민들이 땅을 고르는 안목도 살펴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역을 찾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판단한 터에 생활 근거지를 마련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움집, 고인돌 무덤 등이 거의 대부분 풍수적으로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면도 고남면 일대에서는 10여 개의 패총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에 사용한 패총 위에 청동기 시대의 패총이 겹치는 곳도 있었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었다는 뜻이다. 현재 서해 갯벌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고남패총박물관(고남면 안면대로 4270-6)에서는 이곳 패총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체험전시실, 체험학습실 등에서 선사시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 가을바다 여행의 백미, 안면도 바람길소나무와 패총으로 이어지는 안면도 ‘땅의 역사’ 길목은 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해변길 코스로도 연결된다. 고남패총박물관 바로 남쪽에 있는 영목항(안면도 최남단)에서부터 해변을 따라 북상해 황포항까지 이어지는 16km 길은 ‘바람길(태안 해변길7코스)’로 불린다. 걸어서는 약 5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체로 길이 평탄해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이곳에는 운여해변, 바람아래해변 등이 독특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낸다. ‘운여(雲礖)’는 앞바다가 넓게 트여 파도가 높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이 마치 구름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변길을 따라 해송에서 내뿜는 솔향기를 맡으며 지극히 고운 규사로 구성된 백사장, 물고기를 잡는 독살, 해안사구 등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운여 해변은 멋진 일몰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일몰 때가 되면 한적하던 해변이 다소 번잡스러워진다. 낙조를 촬영하기 위해 때맞춰 사진 동호인들이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바람아래 해변은 마치 사막과 같은 모래언덕 아래로 바람도 비켜간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다양한 생물종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해루질로 유명하다. 안전을 위해 야간에는 출입이 금지되며, 멸종위기종 2급인 ‘표범장지뱀’이 서식해 특별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해변마다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태안의 바람길 코스는 가을 바다여행의 최고 명소로 손꼽힌다. ◆가을꽃 명소로 꼽히는 태안안면도 가을 여행은 꽃구경도 놓칠 수 없다. 안면도국제꽃박람회 등 꽃동네로 널리 알려진 태안은 현재 가을꽃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 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해수욕장의 코리아플라워파크(안면읍 꽃지해안로 400)에서는 안젤로니아, 천일홍, 코키아 등 다양한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중 안젤로니아 꽃밭에는 명화 속 인물들이 조형물로 설치돼 있어서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청산수목원(남면 연꽃길 70)은 황금삼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낙우송길 등을 따라 다양한 꽃들과 나무, 수생식물종이 배치돼 있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산책하듯이 걷기에 좋다. 특히 황금삼나무길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현재 이곳 수목원에서는 가을을 맞아 팜파스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나라 억새보다 키가 크고 흰 솜털처럼 생긴 꽃이 인상적인 팜파스는 남미 초원지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인데, 이국적인 분위기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 핑크뮬리도 만개해 주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들여온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몽환적인 색깔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태안은 지금 대하와 꽃게가 제철이다. 대하구이와 꽃게탕 등으로 가을의 또다른 포만감을 맛볼 수 있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0-22
    • 좋아요
    • 코멘트
  • 국민스낵의 품격 있는 업그레이드… 트러플로 진한 풍미 더한 ‘새우깡 블랙’

    올해로 출시 50년을 맞은 스낵계의 대표 브랜드 ‘새우깡’이 또 한번 변신했다. 최근 농심은 생새우의 고소한 맛에다 트러플 특유의 진한 풍미를 더한 ‘새우깡 블랙’을 선보였다. 세계 3대 식재료 중 하나로 꼽히는 트러플은 인공 재배가 되지 않고 채취가 어려워 귀한 식재료로 주목받는 버섯류다. 농심은 트러플 중에서도 고급으로 손꼽히는 이탈리아산 블랙 트러플을 제품 원료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새우깡 블랙’은 새우 함량도 기존 새우깡보다 많다. 새우깡 한 봉지에는 5∼7cm 크기의 생새우 4∼5마리가 들어가지만 ‘새우깡 블랙’은 그 양이 2배로 늘어났다. 블랙 트러플 고유의 깊은 맛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새우 함량도 늘렸다는 것이다. 농심 관계자는 “생새우의 차별화된 고소한 맛이 새우깡의 정체성이자 50년 장수 비결인 만큼 새우 함량을 대폭 늘려 ‘새우깡 블랙’의 매력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새우깡 블랙’은 모양에도 차별성을 보인다. 기존 새우깡보다 면적이 1.5배 커지고 두께는 얇아져 더욱 가볍고 바삭한 식감을 구현했다. 새우깡 출시 50주년을 기념한 ‘특별 작품’답게 포장 디자인에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담아냈다고 한다. 블랙과 골드를 메인 컬러로 하며 새우깡 고유의 레드를 포인트로 사용해 프리미엄 스낵 이미지를 내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됐지만 가장 젊은 브랜드 대다수 과자류 수명이 길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반세기 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새우깡은 스낵계의 기록적인 제품으로 평가된다. 농심 관계자는 “새우깡이 국내 스낵 중 최고(最古)의 나이이면서도 늘 소비자와 소통하며 젊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이어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전국을 뒤덮은 ‘깡 열풍’을 들 수 있다. 소비자들은 깡과 함께 새우깡을 떠올렸고, 깡 열풍의 주인공인 가수 비를 모델로 선정할 것을 요청해 왔다. 농심은 자연스레 ‘깡 열풍’에 합류하면서 다양한 이벤트로 젊은 소비자들과 소통해 주목을 받았다. 농심은 ‘새우깡 블랙’을 선보이면서 이색 컬래버레이션도 진행했다. MZ세대 패션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바인드(BIND)’와 손잡고 새우깡을 콘셉트로 만든 다양한 기획 상품을 내놨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최근 캠핑족이 늘어나면서 캠핑용품도 함께 화제가 되고 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10-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쉼팡에 누워 ‘녹색샤워’… 바람에 춤추는 건 나뭇잎일까 내 마음일까

    《제주도 해안을 빙 둘러보는 올레길이 제주의 아름다운 겉옷이라면, 한라산 중산간 숲길은 제주의 감추어진 속살 같은 곳이다. 화산석과 원시림이 무성한 제주 숲길에는 조선시대의 말 목장과 잣성(방목용 돌담장), 도자기 굽던 가마터, 화전민들의 집터 등 제주인의 삶과 역사도 만나볼 수 있다. 그런 숲길을 걷다 보면 절로 몸과 마음이 힐링된다. 코로나19 시대에 제주 숲길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비대면 여행지이자 웰니스 관광지로 급격히 부상 중이다.》○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멍때리기 서귀포시 호근동 한라산 자락(시오름)에 자리한 ‘서귀포 치유의 숲’은 총 174ha(약 53만 평) 규모에 15km의 숲길이 조성돼 있다. 서귀포시가 2016년 6월에 개장한 이 숲은 수령 60년이 넘는 전국 최대 규모의 편백군락과 삼나무군락을 비롯해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 등 제주 고유의 자생식물을 품고 있다. 이 숲은 천연의 자원 덕분에 ‘201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고, 연이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웰니스(Wellness) 관광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웰니스는 웰빙(Well-being), 건강(Fitness)의 합성어로, 영양·휴식·치유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숲의 속살을 체험하도록 조성한 숲길은 총 10개의 테마 길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의 방문자센터부터 시작되는 1.9km의 길을 ‘가멍오멍 숲길’이라 부르는데, 이 숲길에서 나머지 9개의 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형태다. 사람들이 쾌적하다고 느끼는 320∼760m 지대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나무와 삼나무숲길을 걷다 보면 공기 맛이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상큼하다. 산책길은 야자수 껍데기로 엮어 만든 매트와 나무가 깔려 있어 걷기에도 편하다. 코스가 길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곳곳에 ‘쉼팡(쉬는 곳)’을 마련해 놓아 숲을 감상하며 충분히 쉴 수 있다. 아예 편안하게 누워서 쉴 수 있는 편백나무 매트와 해먹이 설치된 공간도 있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경쾌한 새소리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는 장애인 임산부 노약자 영유아 등 보행 약자를 배려한 숲길도 따로 마련돼 있다. 서귀포시 산림휴양관리소 양은영 산림치유지도사는 “관광취약계층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노고록 무장애나눔길’(1.5km)을 마련해 놓았는데 호응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 이 숲길은 지난해 문체부가 지정하는 ‘열린 관광지’로 선정됐다. 치유의 숲이란 이름답게 다양한 산림치유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가족들을 위한 ‘가족 산림치유’, 직무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 건강을 위한 ‘직장인 산림치유’, 몸의 이완과 면역력 증강을 위한 ‘일반인(성인) 산림치유’ 등 원하는 프로그램을 사전 예약하면 이용이 가능하다. 프로그램에는 ‘산림휴양해설사’라는 이름의 마을 주민이 동행해 숲 해설은 물론이고 제주의 구수한 문화와 역사를 덤으로 들려준다. 원래 이 숲은 조선시대에 말과 소 등을 키우던 국영목장이었고 이후에는 제주 화전민들의 삶터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화전민들을 쫓아내고 목재로 쓰기 위한 편백과 삼나무를 이 숲에 대량으로 심어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방목용 잣성과 화전민들이 살던 집터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치유의 숲은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며, 하루 방문 인원도 제한된다(주중 300명, 주말 600명).○원시의 비경, 고살리숲길과 이승이오름 좀 더 한적한 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고살리숲길(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과 이승이오름 산책로(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가 좋다.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동쪽으로 10여km(자동차로 20분 거리) 거리의 고살리숲길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나홀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비대면 안심여행지다. 한라산에서 흘러온 효돈천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길이가 2.1km로 길지 않지만 원시의 비경을 담고 있다. 숲길은 삼나무, 감탕나무 등 쭉쭉 하늘로 솟구친 나무들로 우거져 있고 바닥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듯 이끼 낀 돌들로 미끄럽기까지 하다. 조심조심 숲길을 걸어가면 나무숲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고살리숲길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속괴’라는 연못. 건천(乾川)인 효돈천이 흘러들어 생성된 속괴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지형이다. 깊이를 모를 깊고도 거무스레한 물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속괴 왼쪽으로는 누군가 촛불을 밝혀 놓은 기도 터가 있다. 제주사람들 사이에 이른바 기도발이 잘 듣는다고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속괴 주변으로는 명당 기운이 형성돼 있다. 속괴는 특히 비가 내릴 때의 폭포수가 장관이고, 폭포 절벽 위쪽 네모난 바위 옆의 적송(赤松)도 운치를 더해준다. 자연의 온갖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바위틈에서 꿋꿋하게 자란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고살리숲길에서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이승이오름 산책로(2.5km 순환코스) 또한 비대면 안심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승이오름은 인근의 ‘신례천 생태로’와 ‘한라산 둘레길’과도 연결돼 있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서편 능선 하단부에 흐르는 작은 하천이 빚어놓은 천혜의 비경이 압권이다. 특히 높이 20m 남짓한 하천 절벽 아래로 흘러내린 폭포가 3∼5m의 소(沼)를 이룬 ‘해그문이소’는 요정이 살았을 법한 영화 속 원시림 배경 같다. 검푸른 물 빛깔의 해그문이소는 소를 덮은 나무들이 빽빽하고 울창해 한낮에도 해를 볼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끼를 잔뜩 머금은 바위와 검푸른 물빛은 태곳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화산암 덩어리를 뿌리로 감싸 안은 나무들 또한 신비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이승이오름 산책로에서는 반지하식 석축요 형태의 숯가마 터와 일본군 진지 동굴,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 덩어리인 화산탄(火山彈) 등 제주 고유의 흔적도 살펴볼 수 있다. ○몸으로 체험하는 웰니스 여행, 취다선리조트 제주의 자연과 충분한 교감과 힐링의 시간을 가진 후 직접 몸으로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면 제주 취다선리조트의 명상과 요가, 다도(茶道)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취다선 리조트에 투숙한 이들은 누구나 이른 아침 지하 1층 명상룸에서 차를 마시며 명상에 들어가는 ‘차 명상’, 요가, 감정 치유 아로마세러피 등 여러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다도를 원하는 이들은 차실에서 ‘티 마스터(Tea Master)’로부터 차를 우리는 것에서부터 일상에서 즐기는 방법까지 모두 배울 수 있다. 제주 웰니스 관광 사업 시찰차 이곳에 들른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박호형 의원은 “제주도는 관광과 힐링을 함께할 수 있는 세계적인 웰니스 관광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제주에는 제주자연생태공원의 갈대밭 길, 수목원인 상효원의 곶자왈(나무숲+자갈) 원시림과 사시사철 꽃밭길 등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보면 분위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는 웰니스 관광 자원이 넘친다. 글·사진 제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10-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