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잃은 어민 가정의 처절한 삶 덤덤히 그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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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신작 연극 ‘산허구리’ 월북 작가 함세덕의 작품 초연
결말에 새 해석 가미 반전미 더해

국립극단 신작 ‘산허구리’의 한 장면. 오목하게 들어간 해안가의 산동네를 뜻하는 산허구리를 배경으로 바다에서 살고 죽어가는 어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신작 ‘산허구리’의 한 장면. 오목하게 들어간 해안가의 산동네를 뜻하는 산허구리를 배경으로 바다에서 살고 죽어가는 어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국립극단 제공
 극장 객석에 앉자마자 마주한 무대세트에 압도당한다. 단출한 초가집 한 채와 너른 마당, 집터와 골목길을 연결하는 돌계단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사람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마당 한편에 켜켜이 쌓인 조개더미는 실제 서해바다에서 구해온 조개들로 사실성을 더한다. 헌데, 그 공간을 지키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는 배경과 달리 처절하고 애잔하다.

 연극 ‘산허구리’는 월북 작가 함세덕의 초기작이다. 월북 작가란 한계 탓에 그동안 제대로 공연조차 되지 못한 그의 작품이 국립극단 무대에 올랐다. 연출을 맡은 고선웅은 원작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극의 결말에 새로운 해석을 더해 반전미를 준다.

 산허구리는 바다를 품에 끼고 살아가는 한 가난한 어민 가족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큰아들 복조가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지면서 평화롭던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 주요 인물은 아들을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지내는 어머니, 상어에게 물려 외다리가 된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바다에 빼앗긴 아버지, 조개를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는 막내아들 석이와 딸 복실이 등이다.

 극의 70∼80% 분량은 대부분 큰아들 복조를 잃은 이 가족의 평범하면서도 평범치 않은 일상을 덤덤하게 그린다. 아들이 배를 타러 나가던 날의 기억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어머니와 마당 한쪽에 앉아 숟가락으로 조개 입을 따는 복실이, 조개를 한껏 잡아와 다시 장으로 팔러 나가는 석이, 술에 취해 가족들에게 행패 부리는 아버지의 일상까지 대부분 ‘기승전결’에 의한 이야기 구조가 아닌 한 가정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래서일까. 복조를 잃은 가족의 슬픔을 관객에게 강요하기보단 리트머스 종이가 물을 머금듯 서서히 가족 잃은 구성원들의 애잔한 감성을 느끼게 한다.

 연출가 고선웅의 힘은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러닝타임 가운데 마지막 5∼10분에 그의 역량이 집중된 모양새다. 어머니와 막내 석이에게만 보이는 죽은 복조가 짚으로 엮은 배 위에 올라 죽은 이들과 함께 ‘어기야디야’를 외치며 배를 모는 모습에서 슬픔과 한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특히 노어부의 처, 즉 복조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김용선의 연기가 일품이다. 진이 다 빠진 듯 미친 사람 같다가도 아들에 대한 믿음을 분출하는 연기에선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31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3만 원. 1644-2003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연극#산허구리#연출가 고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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