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무예 이야기]조선시대 화약 제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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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밑-화장실앞 흙 모아 화약원료 추출 ‘중노동’

혹자는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만큼 전쟁은 쉼 없이 일어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잔혹한 투쟁이 진행 중이다. 인류의 전쟁사는 여러 가지 신무기의 개발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도 획기적이었던 것이 바로 화약무기의 탄생이다. 화약무기 이전에는 칼, 창 등 금속으로 만든 무기가 주로 쓰였다. 이런 차가운 금속성 무기들을 폭발을 이용하는 화약무기(Fire Arms)와 대비해 냉병기(Cold Weapon)라 부르기도 한다.

금속무기는 얼핏 잔인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화약무기보다 훨씬 더 ‘정직한’ 전쟁 수단이었다. 금속무기 시대에는 병사들이 주로 상대방과 직접 맞닥뜨려 전투를 벌였다. 게다가 화력을 이용한 대량 살상이란 개념이 없었다. 화약의 탄생과 발달은 전쟁을 좀더 흉포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작고 미약했다.

귀약통(龜藥桶)은 조선시대 조총의 점화용 화약을 보관했던 거북이 모양의 화약통이다. 거북이 머리의 뚜껑을 이용해 화약의 양을 측정했다.
귀약통(龜藥桶)은 조선시대 조총의 점화용 화약을 보관했던 거북이 모양의 화약통이다. 거북이 머리의 뚜껑을 이용해 화약의 양을 측정했다.
막대한 노동력의 산물 ‘화약’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조총의 제조와 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후기 무관을 뽑는 무예시험에서 조총의 방포술(放砲術)이 핵심 과목 중 하나일 정도였다. 당시에는 총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 총기의 성능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사수의 능력이 더 중요시됐다. 조총은 숙련도에 따라 사격 속도가 달라지는 무기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사격술 훈련이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허수아비나 표적을 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군영에서는 일정 거리에 있는 참새를 쏘아 맞추는 고난도의 훈련을 실시했다. 그만큼 실제 사격 능력을 중시했다는 뜻이다.

그런 조총의 위력을 좌우하는 것은 화약이었다. 양질의 화약이 있어야만 충분한 살상력과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화약 제조는 조선의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焰硝)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지금은 초석(硝石·질산칼륨)이라 불리는 물질이다. 당시에는 흙에서 염초를 얻었다. 이를 취토법(取土法)이라고 불렀다.

흙에도 맛이 있다. 여러 종류의 흙 가운데 화약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맹맹한 일반 흙이 아닌, 일정한 ‘숙성 과정’을 거친 짠 흙(일명 함토)과 매운 흙(일명 엄토)이었다. 문제는 이런 흙이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애매한 곳에 많았다는 점이다. 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의 마루 아래나 화장실 근처의 흙이 최고의 화약재료로 각광을 받았다.

화약 원료 구하기가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면, 당시 염초의 재료인 흙을 수집하는 취토군(取土軍)이란 병과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취토군은 흙을 파는 도구와 수레를 갖고 이 집 저 집을 가리지 않고 들어가 할당량을 채웠다. 그러다 보니 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토군을 꺼렸다. 아무런 약속 없이 문만 두드리고 들어와 처마 밑과 화장실 주변의 흙을 몽땅 퍼가니 굳게 다져졌던 마당이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기 일쑤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래서 취토군이 돌아다닐 즈음에 미리 마당 가득 모래를 깔아 버리거나, 권문세가의 경우 사전 답사를 나온 취토군 병사를 잡아 흠씬 두들겨 패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빈발하자 국왕까지 나섰다. 화약을 만드는 일은 국가방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구(烏口)는 조총에 탄환을 한 발씩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된 조선시대의 탄입장비다. 까마귀의 주둥이처럼 생긴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동아일보DB
오구(烏口)는 조총에 탄환을 한 발씩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된 조선시대의 탄입장비다. 까마귀의 주둥이처럼 생긴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동아일보DB
궁궐 화장실 근처 흙도 화약 제조 위해 제공

화약 제조의 진흥을 위해 국왕의 명령으로 ‘특별 취토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광해군 재위기간(1608∼1623년)에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있던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도성 안의 각 지역을 무작위로 나눠 집주인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흙을 파오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군령으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내용이 덧붙여졌다.

당시에는 집의 크기에 비례해서 파낼 흙 또는 염초의 양을 결정하고 취토군들이 작업을 했다. 그런데 비가 올 때도 있고, 흙의 성질이 안 좋은 곳도 많아 할당량을 채우기가 늘 어려웠다. 그래서 비상시에는 국왕이 살고 있는 궁궐의 처마 밑이나 화장실 근처 흙도 죄다 퍼내 화약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한 흙은 곱게 태운 재를 섞어 물에 녹이는 ‘사수’라는 과정을 거쳤다. 이를 가마솥에 넣고 끓였다가 채에 걸러 고운 침전물을 모은 후 끈적끈적한 아교로 뭉친다.

그런데 흙의 양과 비교해 보면 사수 과정을 거쳐 나온 초석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적었다. 지금으로 치면 덤프트럭 한 대의 흙을 정제해 밥공기 하나 정도의 초석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니 수백 근의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흙이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어렵게 모아진 초석을 ‘정초’라고 했는데, 정초에 유황과 재를 적당히 섞고 쌀뜨물을 부어 절구에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오랜 시간 찧는 ‘도침’이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문제는 힘을 조금만 잘못 가하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나무로 만든 절구에 조금씩 넣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런 작업을 거쳐 절구 속의 물질이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러워지면 그것이 바로 화약이 됐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조총 한 발을 발사하기 위해 들어가는 적은 양의 화약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갔다.

화약을 모두 만들고 나서는 사각형으로 낱개 포장을 해서 반드시 만든 장인의 이름을 쓰게 했다. 만든 지 5년 안쪽의 화약이 맹렬하게 터지지 않을 경우 해당 장인을 붙잡아 곤장세례를 하고 다시 만들도록 했다.

요즘에도 군사훈련 도중 불량이 나오는 전차, 미사일 등 최신 무기가 많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조선시대에도 군수물자에는 실명제가 적용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부디 오늘날의 군수회사들도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군의 전투력 및 사기와 직결되는 무기 제작에 정성을 기울여주었으면 한다.

최형국 역사학 박사·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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