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끼고 사는 당신, 급속 퇴화 중입니다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동아일보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우리나라에서 한 부부는 온라인 게임에서 가상 아이를 키우느라 실제 아이를 굶어죽게 내버려뒀다. 사람이 목숨을 끊는 현장을 봐도 저지하는 대신 촬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22년 뉴욕타임스(NYT)는 가상 캐릭터와 비공식적으로 결혼한 수천 명을 다룬 기사를 썼다. 이들은 이런 관계가 만족스러우며 진짜 사람과의 관계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다.

낯선 곳에 갈 때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의 안내에 따르기에 자신이 어디 있고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능력은 빠르게 사라졌다. 사람을 직접 만나며 소통하는 일이 줄면서 표정, 손짓 등을 통해 의도를 파악하고 여러 감정을 느끼는 능력도 떨어지고 있다.
‘경험의 멸종’(크리스틴 로젠 지음·이영래 옮김·어크로스)은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일이 줄어들면서 신체 활용 능력을 비롯해 인지 기능, 공감 능력, 인내심이 감소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현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극단적인 사례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에서 차가 불타고 있다. 즉각 연결되는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분노한다.  도로에서 신경전을 벌이다 살인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에서 차가 불타고 있다. 즉각 연결되는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분노한다. 도로에서 신경전을 벌이다 살인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이 책은 올해 5월 출간된 후 6개월 만에 5만 권 넘게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책을 만든 강민영 어크로스 편집자(31)를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어크로스 출판사에서 만났다. 강 편집자는 “인문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상황이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다”고 했다.

역사학 박사인 저자는 미국 버지니아대 고등문화연구소 연구원이자 과학 저널 ‘뉴 아틀란티스’의 자문을 맡고 있는 선임 편집자다. 미국에선 책을 낸 적이 있지만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경험의 멸종’을 통해 국내 독자들을 처음 만난 것. 이 책은 지난해 미국 현지에서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 편집자는 추천을 통해 이 책을 접했다고 한다.

“북클럽 오리진을 운영하시는 전병근 작가님이 좋은 책이라고 지난해 추천하셨어요. 저희 출판사와 결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어크로스는 지난해 10월 출간을 검토하는 회의를 집중적으로 했다.

“저를 포함해 모두 제목 ‘The Extinction of Experience‘부터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저자는 한국에서 인지도가 없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어요. 논픽션 저자 중 유명인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저자가 역사학 박사에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관록 있는 칼럼니스트여서 신뢰가 갔습니다.”

‘경험의 멸종’ 책표지.                                어크로스 제공
‘경험의 멸종’ 책표지. 어크로스 제공


판권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은 있었다. 다만 그리 치열하지 않아 높지 않은 가격을 제시했고 판권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을 다룬 내용이어서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고 봤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곧바로 사용하기 때문에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잖아요. 저도 챗GPT, 제미나이 같은 인공지능(AI)을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책에는 구체적인 사례가 아주 많이 나온다. 다만 주제가 철학적이어서 독자들이 추상적으로 여겨질 것 같아 고민했다.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보니 뻔해 보일 수 있겠다는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각 장마다 핵심 문장을 뽑아 별도 페이지에 넣어 눈에 띄게 배치했어요. 독자들이 그 문장만 봐도 관심을 갖거나 궁금해 할 수 있게요.”

해당 문장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집단으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감정이라는 괴팍한 야수를 길들이는 것은 현대 기술이 극복할 수 없는 또는 극복해서는 안 되는 도전이다 등이다.

우리말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컸다.

“후보 제목이 ‘경험 멸종 사회’, ‘경험 소멸 사회’ 등이었어요. 멸종, 종말, 소멸 중 어떤 단어를 쓸지 치열하게 논의했어요. 최종적으로 ‘멸종’을 선택했죠. ‘사회’라는 단어를 넣을지 여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회’가 들어가면 책 내용에 확신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반대로 ‘사회’를 빼면 여운이 느껴질지 생각했고요.”

고민 끝에 ‘경험의 멸종’으로 정했다.

영화 ‘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 인디아나 존스 일행이 정글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이용으로 사람들은 길 찾는 능력이 급속히 퇴화하고 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제공
영화 ‘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 인디아나 존스 일행이 정글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이용으로 사람들은 길 찾는 능력이 급속히 퇴화하고 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제공


책을 알리기 위해 마케팅팀은 카드 뉴스를 여럿 만들었다. 콘서트장에서 동영상을 찍느라 정작 무대에 선 가수에게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현상, 휴가지에서 소셜 미디어에 게시물을 올리느라 제대로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경우 등 사람들이 실제 겪는 사례를 다뤘다.

책을 구입하면 ‘독서의 놀라운 효능’을 적은 티셔츠를 증정하는 행사도 예스24와 함께 열었다. 결과는 ‘완판’. 당초 티셔츠는 이 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독서의 효능으로 △벽돌책 독서를 통한 전완근 강화 △아침 독서는 면역력 증진에 탁월 △앞표지만 읽어도 자기 효능감 상승 △단 세 쪽이면 깊은 수면 가능 같은 익살스러운 문구를 담았다.

“올해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어크로스 직원들이 유니폼처럼 이 티셔츠를 입었어요. 그런데 ‘어디서 살 수 있나요?’라고 문의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판매용이 아니라고 계속 설명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경험의 멸종’ 굿즈로 티셔츠를 활용했는데 반응이 엄청났습니다.(웃음) 제주의 한 고등학교 독서 동아리 선생님이 ‘동아리 셔츠의 문구로 사용해도 되느냐’고 문의하셔서 사용하시라고 말씀드렸어요.”

‘독서의 놀라운 효능’을 유머러스하게 쓴 티셔츠.  ‘경험의 멸종’의 굿즈로 판매해 완판됐다.        어크로스 제공
‘독서의 놀라운 효능’을 유머러스하게 쓴 티셔츠. ‘경험의 멸종’의 굿즈로 판매해 완판됐다. 어크로스 제공


독자층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40, 50대로 예상했다. 판매를 시작하자 이들 뿐 아니라 20, 30대에서도 호응이 컸다. 독자들은 “철저히 공감하게 되는 시대 포착”, “지금 시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통찰하게 한다”는 리뷰를 올렸다.

“인간이 지닌 것을 기술이 대체하는 현상은 젊은층이 피부로 더 많이 느끼고 있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로 여기는 것 같아요.”

독자들의 반응을 보며 마케팅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었다.

“저자는 손글씨 쓰기는 단어 인식, 읽기, 기억력, 표현력을 키우지만 손글씨를 쓰는 일이 빠르게 줄어드는 현상도 언급해요. 해당 문장에 밑줄을 그은 사진을 올리는 독자들이 많았어요. 그걸 보고 필사 열풍이 계속 되는 현상과 연결시켜 카드 뉴스로 만들었죠.”

경험의 멸종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다는 저자의 당부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인간이 지닌 여러 능력을 왜 계속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자고 손을 내미는 게 인문학의 역할이잖아요. 그런 역할을 하는 책을 만들게 돼 뿌듯합니다.”

대학에서 역사학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학보사 활동을 한 그는 2021년부터 편집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제가 만든 책 중 이렇게 반응이 좋은 경우는 처음이어서 즐거워요. 사람들이 인지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관심을 가질 사안을 포착해 지적으로 끌어당기는 책이 있잖아요. ‘경험의 종말’이 딱 그랬어요. 이렇게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어떤 건지 편집자는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편집자가 됐다는 그는 업무를 해보니 보다 깊이 있게 책을 읽게 된 걸 장점으로 꼽았다.

“책을 만들 때 최소 4번 이상 샅샅이 읽거든요. 특별한 독서 경험이에요. 독자들이 동료처럼 느껴져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도 힘이 됩니다.”

그는 독자가 편하게 집어 들면서도 사유하게 만드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담론 제기하는 책을 선보이고 싶어요. 독자에게 ‘이 책은 나를 위한 거야’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경험의 멸종’(어크로스·2025년)은….

미국 칼럼니스트인 역사학 박사 크리스틴 로젠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직접 경험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각종 폐해를 조목조목 짚었다.

아이들은 만지고 뛰어다니며 노는 대신 영상을 보며 노는 시간이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제력, 집중력, 기억력을 키우기가 어려워졌다. 교육전문가 에리카 크리스타키스는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이해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경고한다.

기다리는 시간도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 메일이나 소셜 미디어, 영상을 보는 등 공백 시간을 두지 않는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면서 사람들은 감정을 조절하는데 서툴고 쉽게 분노하게 됐다.

미국에서는 도로 위에서 신경전을 벌이다 상대방을 쏘아 죽이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디애나주에서는 61세 운전자가 자신이 달리던 차선에 끼어든 23세 운전자와 실랑이를 하다 그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워싱턴D.C.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전 중 다른 운전자에게 느끼는 분노에 대해 조사한 결과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사람의 수는 2005년 이후 10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즉각적인 연결을 원하는 충동도 커졌다.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으로 사고가 나는 일이 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캠페인을 벌여도 소용 없다. 저자는 “안전은 즉각적인 연결을 거부할 만큼의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효율을 중요시하면서 사람들은 뭐든 빨리 끝내려 한다. 식사 시간조차 효율을 중시하면서 아동 비만도 늘고 있다. 컬럼비아대 국립약물남용센터에 따르면 미국 가정의 32%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데 20분 이하의 시간을 보낸다. 한 조사에 따르면 식사 시간이 평균 16.4분에 불과한 가정의 아이들이 평균 20분에 가까운 가정의 아이들보다 비만 위험이 더 컸다.

기다릴 줄 알고 지루함을 다루려면 자신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딴생각을 할 시간이 있어야 창의력, 숙고, 기억 강화가 가능하다. 알베트르 아인슈타인은 전차를 타고 가면서 베른 탑을 보던 중 특수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냈다. 니콜라 테슬라는 숲을 산책하다가 교류 전류를 고안해냈다.

저자는 아이가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스마트폰 사용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찬성한다. 기술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술, 담배, 총기, 도박과 마찬가지로 사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는 건 그것을 되찾는 과정의 시작이다. 인간의 미덕을 다시 찾고 온 몸을 사용해 경험하는 일이 사라지는 걸 막으려면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한계를 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혁신을 억압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성을 위해 일정 부분 한계를 두자는 것이다.

기술은 편리함을 선사했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퇴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에 따른 파장은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인간이 지닌 능력이 더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꼽아보게 만든다. 원제는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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