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과 내일/손효림]한 치 앞 모르는 삶, 충만하게 몰입할 대상 있나요“인생에 확실한 건 없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러기에 오늘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 에세이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반복되어도 싱그럽다’를 최근 펴낸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석좌교수(69)에게 출간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책은 그가 30년 동안 찍은 사진과 오랜 기간 써 온 일기를 선별해 만들었다. 박 교수는 1만 장 넘는 사진과 함께 일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고 한다. 심장내과 명의(名醫)로 주중 매일 수술을 집도하는 그는 환자들을 보며 마음먹은 걸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장 질환은 갑작스레 찾아와 사람을 쓰러지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 역시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지자 지금 이 순간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을 늘 마주하는 그이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현재 고등학생인 늦둥이 셋째 딸은 그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특히 자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저도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의 전성기(?)를 못 봤거든요. 늦둥이 딸도 마찬가지겠죠. 30, 40대인 두 딸들에 비해 막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적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은 그의 몸과 마음을 채워 줬다. “같은 풍경을 여러 번 찍어도 카메라 각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사진을 보며 놀라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사진은 없어요. 그 사진은 오직 하나뿐이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긴 것처럼요.” 그의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아무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주는 힘, 그리고 사진 에세이 출간이라는 마음먹은 일을 해낸 데 따른 뿌듯함이 전해져 왔다. 15∼18세기 유럽 화가의 회화 작품을 구입한 지인도 박 교수와 비슷한 말을 했다. 패션, 음식, 자동차 등에 일절 관심이 없고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사는 그가 몇 년 전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는 “유명 화가의 작품이 아니어서 그리 비싸진 않다”며 “정교한 구도로 짜임새 있게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힘들 때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그래서 눈길이 자주 가는 곳에 그림을 두고 상처받거나 지칠 때면 하염없이 바라본다고 한다. 또 다른 지인은 2년 넘게 피트니스센터를 꾸준히 다니며 ‘몸만들기’에 빠져 있다. 그는 “몸은 정직하다. 운동한 만큼, 또 음식을 먹은 만큼 그 결과가 그대로 나타난다”며 웃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사는 게 괴롭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팍팍한 세상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주거나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다.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통해 위안을 얻는지 찾아내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탐색해야 한다.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된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전시가 적지 않다. 국립예술단체와 지역문화재단에서는 1만∼2만 원에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작은 도서관, 동네 서점에서 글을 쓰고 낭독을 해 볼 수도 있다.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대상을 찾는다면 삶은 더 충만해지고 내면 역시 단단해질 것이다. 고달프게 여겨지는 이 시간도 언젠가 끝난다. 유한한 시간을 어떤 색깔로 채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9-15 23:48 
[오늘과 내일/손효림]함께하며 성장… 단절의 시대, 주목받는 연극의 힘“연극은 혼자서는 못해서 좋아요.” 사람이 부족해 늘 허덕이던 서울 소재 대학의 한 연극 동아리가 2021년 회원 모집 공고를 내자 50명이 몰려들며 공통적으로 한 말이었다. 이 동아리는 2018, 2019년까지만 해도 공연을 올리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인 20여 명을 확보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동기, 선후배를 설득해 한 명 한 명 채워 나갔다.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연습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연극 동아리는 인기가 없었다. 팬데믹이 덮치며 2020년, 2021년 비대면 수업이 전면 실시됐고 캠퍼스는 적막에 싸였다. 2021년, 동아리에 새로 필요한 인원은 30여 명인데 50명이나 지원하는 이변이 생긴 것. (2020년에는 뽑지 않았다) 당시 동아리 회장은 “예전에는 희망하기만 하면 무조건 ‘모셔’ 왔는데, 처음으로 지원서를 받고 면접까지 봐서 회원을 뽑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그렇고, 다른 연극 동아리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같이 모여서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단다. 외로움에 시달린 학생들에게 연극이 일종의 탈출구가 된 셈이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동아리 출신 중 광고회사, 방송사 등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취업한 경우가 꽤 많아진 것. 공연을 하려면 배우, 연출가, 조명·음향 감독, 무대디자이너 등이 논의를 거듭하며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생각이 다르면 설득하고, 때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수십 명의 관객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한다. 이는 회사 업무에 필요한 주요 자질이기도 하다. 하반기 채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요즘, 한 대기업 임원은 “젊은 사원들 가운데 메신저가 아니라 얼굴을 보고 말하거나 전화 통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같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 MZ세대 중에서는 전화 공포증인 ‘콜포비아(Call Phobia)’ 때문에 스피치학원에서 전화 통화 방법을 배우는 이들도 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진 연극이 단절의 시대에 논리적이며 명료한 표현, 공감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라는 특징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극단 연습실에 가보면 대사의 의미, 전달 방법과 그 이유 등을 하나하나 고민하고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극은 사회를 반영하고 인간과 삶의 본질을 꿰뚫기에, 이를 곰삭혀 체화하다 보면 내면도 깊어진다. 국내 최고 권위를 지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들을 때마다 이를 명징하게 확인하게 된다. 연극인들은 자기만의 언어로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게 전한다.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만 줄줄이 나열하다 끝나는 경우는 못 봤다. “연극은 내가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내 안의 것도 보고 바깥의 것도 보게 하면서요.”(배우 지현준) “‘날아가 버린 새’의 주인공이 상처로 가득 찬 마음속 검은 비닐봉지를 비워내듯, 이 작품을 만나는 모든 분들도 자신 안에 있는 검은 봉지를 비우는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작가 장지혜) 배우 생활 20년 만에 연기상을 받은 남명렬 씨의 소감은 웃음 터지면서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소망 질투 자책 애증 부러움 불운 호기 분노…. 동아연극상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었습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연극을 시작했는데, 수상이든 연기든 자기를 내려놓을 때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시대, 연극 동아리의 인기는 연극이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또렷하게 비추고 있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8-25 00:06 
[오늘과 내일/손효림]드라마를 통해 본 직업으로서의 교사“너, 내가 공문을 얼마나 잘 쓰는지 모르지? 내가 공문을 겁나 잘 써서 교감이 나만 시켜. 근데 왜 너만 (연봉이) 몇백억이야?” 올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 전종렬(김다흰)이 대학 동기인 ‘일타 강사’ 최치열(정경호)과 소주를 마시며 자조적으로 한 말이다. 주인공 최치열은 연봉 수백억 원에, 그가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가 1조 원에 달한다고 해 ‘1조 원의 남자’, ‘일타 오브 일타’로 불린다. 교사들의 분노가 거세게 터져 나오면서 교사가 나온 드라마, 영화가 떠올랐다. 학생, 학부모 등 각자 입장에 따라 교사들의 분노에 대한 생각은 다르겠지만 교사가 처한 상황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이도 적지 않다. 교사는 익숙하면서도 구체적인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직업군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교사의 현실은 드라마,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청소년 드라마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교사는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생들을 차별하는 등 단편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유명 대사,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를 남긴 영화 ‘친구’(2001년)가 대표적이다. 담임교사(김광규)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며 학생들을 체벌하기 전, 뺨을 잡아 흔들며 던진 이 질문은 교사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와 함께, 그럼에도 반발할 수 없었던 높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지도하기는 어려워지고 학부모를 대하는 건 만만치 않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전종렬은 수업 시간에 최치열의 강의 교재를 몰래 푸는 전교 1등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야단친다. 하지만 “수업 내용은 중딩 때 다 풀어본 것”이라며 오히려 발끈하는 학생의 모습에 어이없어 한다. 이를 본 동료 교사는 “힘들게 임용고시 준비할 때만 해도 내가 생각한 교사의 위상은 이게 아니었는데…”라며 고개를 젓는다. 이들 장면에 대해 “학교 현장과 진짜 비슷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고하늘(서현진)이 정교사가 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그린 드라마 ‘블랙독’(2019∼2020년)은 교육자이자 직장인으로서 교사를 두루 조명한다. 기간제 교사가 겪는 차별을 비롯해 업무를 둘러싸고 교사들 간에 벌어지는 팽팽한 기싸움과 경쟁, 그리고 동료애까지…. ‘학교판 미생’으로 불린 이 드라마는 교사를 때론 상처 입고 좌절하면서 성장하는 한 인간으로 그렸다. 극본을 쓴 박주연 작가는 실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취기가 잔뜩 오른 전종렬은 최치열에게 말한다. “나는 우리 애들 사랑해.” 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너 애들한테 그런 맘도 없지?” 스타 강사보다 연봉은 적지만 학생에게 책임감과 애정을 갖고 애쓰는 교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전한다. 계약 기간이 1년인 고하늘은 주저앉고 싶을 때나, 정교사 시험 준비를 하는 틈틈이 학생들을 떠올린다. “내년에 학교로 선생님 만나러 오고 싶어요”라는 고3 학생들은 그에게 “어우, 이쁜 내 새끼들”이라는 말과 함께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마음 한편에 학생에 대한 정을 지닌 교사를 비추는 이들 장면은 비록 드라마지만 학교 현장의 단면이기도 하다. 교사가 저 너머에 외따로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보통의 인간임을 짚는 작품들은 이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어쩌면 이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많은 이들 사이에 자리한 간극을 좁히는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8-04 00:03 
[오늘과 내일/손효림]과도한 아이돌 보호, 팬 멍들고 아이돌 망친다“가슴을 만지더니 ‘애플워치죠?’ 하며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가 옷을 올리라고 했다. 어떤 분이 들어와 내가 속옷 검사 당하는 걸 봤다.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이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윗가슴을 꾹꾹 눌러 보더니, 아랫가슴도 꾹꾹 눌러서 너무 당황했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참가하는 행사도 아니었다. 아이돌 그룹 팬 사인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항이나 대통령 참가 행사에서는 보통 검색대를 통과하게 하고 검사 기기로 몸에 닿지 않게 훑는다. 방탄소년단(BTS)이 소속된 하이브의 계열사가 일본에서 선보인 9인조 보이그룹 ‘&TEAM’(앤팀)의 팬 사인회에서 팬들의 속옷 검사를 해 성추행 논란이 일고 있다. ‘하이브 레이블즈 재팬’ 소속 9인조 보이그룹 앤팀이 8일 서울 동작구에서 연 팬 사인회에서 여성 보안요원들이 손으로 팬들의 속옷을 검사했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가수와의 대화를 녹음하면 안 된다며 녹음기 소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피해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주최 측의 해명은 더 놀라웠다. 행사를 연 하이브 산하 팬 커머스 플랫폼 위버스샵은 9일 입장문을 내고 “전자장비를 몸에 숨겨 반입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해 이를 확인한 것”이라고 사과하면서도 “보안 검색에 비접촉 방식을 도입하는 등 개선안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속옷 검사를 한 책임을 팬에게 떠넘긴 데다 보안 검색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팬 사인회에서 가수와 팬은 짧은 시간 1 대 1로 대화한다. 위버스샵은 이를 녹음한 내용이 외부에 유출돼 곤란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난감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그런 말을 안 하게 가수들을 교육하면 될 일이다. 이번 사건은 아이돌 보호를 명목으로 일부 소속사들이 도를 넘는 행동을 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촬영장 등에서도 아이돌에 대한 소속사의 과잉보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연출가가 아이돌에게 연기 지시를 하니, 매니저가 ‘아티스트와 직접 얘기하지 말고 저를 통해서 해 달라’고 말해 다들 기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작사 관계자는 “촬영하는 아이돌은 한 명인데 담당자가 3명이나 왔다. 메이크업, 헤어, 의상 담당자는 따로 있었고, 이들은 로드 매니저, 일반 매니저, 홍보 담당자였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과잉보호는 K팝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데 따른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아이돌 그룹 한 팀을 데뷔시키려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 노력이 든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아주 작은 일이 일파만파 확대돼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 되면 투자한 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고 했다. 이어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를 작은 위험까지 방지하려면 이중 삼중, 나아가 사중 오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과정에서 팬들이 몸과 마음을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근시안적 사고다. 아이돌이 누리는 인기와 부는 팬 덕분이다. 지나친 보호가 아이돌에게 좋은 것도 아니다. 평생 정상에 있을 순 없고, 인기를 장기간 유지하긴 쉽지 않다. 결국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을 챙기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도 씩씩하게 홀로 나아갈 아이돌이 얼마나 될까. 소속사들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 K팝이 세계를 호령한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지만, 운영 시스템은 글로벌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7-14 00:03 
[오늘과 내일/손효림]방황의 시간이 길어 올린 뜻밖의 열매“솔직히 ‘파이 이야기’는 아무도 안 읽을 줄 알았어요.” 2002년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 작가(60)가 말했다. 이달 초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파이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를 밝히다 이렇게 털어놓으며 웃었다. ‘파이 이야기’는 50개국에서 1200만 권 넘게 판매됐고, 리안(李安) 감독이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3년)는 미국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었다. 배가 침몰해 인도 소년 파이가 호랑이와 보트를 타고 227일간 태평양을 표류한 일을 그린 소설은 아슬아슬한 모험,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냉철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든 성찰, 놀라운 반전을 지닌 걸작이다. 캐나다 트렌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마텔은 20대에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치과 의사가 되는 게 어때?’라며 여러 일에 대해 한마디씩 했어요. 하지만 직업을 갖는 게 두려웠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춤, 악기, 그림 등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었거든요.” 그러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 기다리며. 어느 날 인도를 여행하겠다는 한 여성을 따라 무작정 인도로 갔다. “인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수중에 돈도 별로 없어서 캐나다보다 물가가 싼 곳에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덮쳐 전기 충격기에 맞은 것 같았어요.” 그는 인도에서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글을 썼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죽어버린 이야기’를 접고 느릿느릿 지내다 보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까지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어요. 원숭이는 수시로 나타나 바나나를 낚아채 가는가 하면 도마뱀도 자주 출몰하고 코끼리도 볼 수 있었죠. 동물원이 아니라 일상에서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파이,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의 부모, 보트에서 파이가 호랑이를 경계하면서도 어느덧 의지하게 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쫓아간 그 여성과 잘되지는 않았다”고 웃으면서 “인도에서 ‘파이 이야기’의 단초를 얻었고 문장을 써 나가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한 황동혁 감독(52)도 대학 때 영화만 보며 지낸 적이 있었다. 서울대 신문학과를 다닌 그는 “휴학을 한 학기 했지만 수업도 거의 안 들어가고 1년 넘게 휴학생처럼 살았다. 매일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2개씩 봤다”고 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지인에게서 받아온 비디오카메라로 재미 삼아 학교 축제, 농활 등을 찍고 상영했다.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는 걸 보고 “영상을 찍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구나”라고 느끼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들이 세계적인 소설가, 감독이 된 건 재능과 노력 그리고 행운까지,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 하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던 그 시간 역시 지금의 이들을 만드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살펴보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정표를 발견하게 했으니.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무위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유럽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 1년간 여행, 봉사 등을 하는 ‘갭 이어’가 보편화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시간이 생산적인 결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나에 대해 알아가고 생각을 다지는 건 나이에 상관없이 필요하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마텔의 말에서 여백의 시간이 주는 힘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6-23 00:00 
회화, 삽화, 패션… 프랑스 거장 뒤피의 유쾌한 변주 [오늘과 내일/손효림]파도가 일렁이는 청명한 바다 위에 여유롭게 떠 있는 배들을 그린 유화, 리라를 들고 숲을 거니는 오르페우스를 새긴 목판화 삽화, 오렌지색 바탕에 투우사를 작게 그려 넣은 원피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의 작품들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뒤피의 국내 첫 회고전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은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 180여 점을 통해 자유로움과 유쾌함을 선사한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바다를 보며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경리 일을 하며 성가대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았다. 뒤피의 회화가 지닌 경쾌함과 따스함의 씨앗은 이런 환경에서 심어졌으리라. 뒤피는 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거장 반열에 오른다. 전시 작품들은 구체적인 정보를 알면 좀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지만 그냥 편하게 보기만 해도 좋다. 부드러운 곡선에 맑게 채색한 아틀리에, 바닷가, 물고기 그림은 마음을 툭 내려놓게 만든다. 꽉 짜여진 틀에 맞춰 달리느라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이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기(電氣)의 역사와 영향을 그린 대형 벽화 ‘전기의 요정’을 석판화로 만든 동명 작품은 토머스 에디슨, 그레이엄 벨 같은 역사적 인물부터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까지, 친숙한 이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뒤피가 특히 사랑했던 파란색은 많은 작품에서 농담을 달리하며 시원하게 담겼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동물시집’에 실린 목판화를 비롯해 여러 책에 삽화로 담긴 뒤피의 석판화도 볼 수 있다. 삽화를 본 유명 패션디자이너 폴 푸아레(1879∼1944)의 제안으로 뒤피는 직물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직물은 옷, 가구, 벽걸이용 천 등에 사용됐다. 뒤피의 패턴으로 만든 원피스 17점을 비롯해 그가 누이에게 선물한 검붉은 장미와 초록색 잎이 큼지막하게 어우러진 원피스는 지금 바로 입고 다녀도 눈길을 끌 정도로 세련됐다. 흰색과 검은색 꽃무늬가 가득한 소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으로 전시장을 거닐며 확인할 수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피는 업(業)의 본질에 집중하면서 다른 분야로 활동 반경을 차츰 확대해 나갔다는 것을. 그는 ‘시각적 표현’이라는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장르로 변주를 해나갔기에 해당 분야에서도 돋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모두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직물 패턴 디자인을 제안받은 뒤피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압박을 겪다 결국 이를 수락한다. 이후 작업을 하며 직물 디자인의 매력에 빠졌다. 업의 핵심을 파악하고 이를 응용하며 보폭을 조금씩 넓힐 것. 그의 여러 장르 작품들이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 같았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놀랍다. 뒤피는 말했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짐작하기조차 아득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고 또 이렇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았을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기쁨의 화가’로 불리는 뒤피의 작품들이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건 이런 그의 마음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5-11 21:30 
조건 없는 이해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힐링소설’ 열풍[오늘과 내일/손효림]“‘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어때?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엄마가 좋아하실까?” “음, 둘 다 괜찮을 것 같아.” 얼마 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소설 판매대에서 자매로 보이는 두 여성이 책을 한 권 한 권 찬찬히 살펴보며 작은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는 것 같았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윤정은 지음)는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마음의 상처를 사라지게 하는 신비로운 세탁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소설이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무라세 다케시 지음)은 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이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 사고가 난 날의 열차에 올라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 판매대에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1·2’(이미예 지음), ‘불편한 편의점1·2’(김호연 지음),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 지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 헤이그 지음) 등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자그마한 건물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을 포근하게 그린 표지가 많았다. 한 지인은 “요즘 인기 있는 소설책 표지가 워낙 비슷해 얼핏 보면 한 시리즈 같다”고 말했다. 백화점, 편의점, 서점, 도서관 등 일상 속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위로를 전하는 소설들이 수년째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강세를 보이고 있다. 북카페, 세탁소, 초콜릿 가게 등 업종(?)도 점점 더 다양해지는 추세다 (당연한 얘기지만 작품마다 완성도는 제각각이다). 출판계에서는 “소설을 쓰려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가게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이른바 ‘힐링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등 과거 일본에서 있었던 현상이 시간차를 두고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힐링 소설의 인기는 상처받고도 호소할 데 없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책 후기에는 재미있었다는 반응과 함께 자신처럼 평범하고 마음을 다친 등장인물이, 자신도 종종 이용하는 공간에서 상처를 다독이는 과정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손님이 줄어 답답한 마음에 홀로 소맥을 들이켜는 정육식당 최 사장이 앉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 아래에 슬쩍 갖다 놓은 모기향(‘불편한 편의점2’), 줄야근하며 애써도 계약직에서 벗어날 수 없자 자신을 집어삼킬 정도의 분노에 휩싸인 정서가 뜨개질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서점의 구석 자리(‘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소소하지만 마음 한편을 채워 준다.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공동체에 대한 갈증도 엿보인다. 법조인을 목표로 곁눈질 없이 공부해 변호사가 된 후 정신없이 일하다 갑상샘암 판정을 받자 살아가는 이유를 짚어보게 된 소희, 뮤지컬 연출가의 꿈을 접고 아버지 회사에서 억지로 일하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무기력감에 빠진 수혁에게 북카페 사장과 직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다 이들이 입을 열면 귀 기울일 뿐이다(‘책들의 부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고,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간. 간절히 원하지만 실현하기는 쉽지 않기에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달래고 있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4-20 21:30 ‘유럽의 300년 그림에 담기다’, 16일까지 서울 인사아트프라자서 열려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유럽의 300년 그림에 담기다’ 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프라자에서 1월 4일부터 16일까지 열린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비오는 날의 빗물’을 비롯해 피카소, 샤갈, 미로의 석판화를 만날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콘스탄틴 스토이츠너, 오스카 코코슈카, 오스카 라스케의 작품도 소개한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모두 300점이다. 이들 작품은 김진수 전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40여 년간 수집했다. 김 전 교수는 “인상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품이 많고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을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다”며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고전적 회화 작품을 통해 유럽의 300년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각 작품의 액자도 당시 제작한 그대로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다문화 가정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김 전 교수는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은 한국에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의 폭행 등에 시달리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자녀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사용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02-722-9969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2023-01-05 09:45 ‘e브릿지 포럼 2022’ 개최…민간과 정부 협력 플랫폼 고찰‘e브릿지 포럼 2022’가 ‘글로벌플랫폼의 세계: 민간과 정부의 협력 플랫폼’을 주제로 11월 3일 오후 1시 10분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대강당에서 열린다. 포럼은 한국정보처리학회 한국경영정보학회 한국행정학회가 공동 주최한다. 공동대회장이자 e브릿지 편집위원장인 안문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개회사로 막을 연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축사를 한다. 고진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장이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혁신 디지털플랫폼정부 추진 방향’에 대해 기조연설1을 한다. 고 위원장은 부처 간 칸막이, 데이터 개방 부족, 경험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정책 결정,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 등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데이터가 연결되는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국민, 기업, 정부가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디지털플랫폼정부를 통해 정부와 민간이 협업하면 한국 디지털정부가 한 단계 더 도약해 세계를 선도하는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어 미국행정학회장을 지낸 마크 홀저 서포크대 교수가 ‘The Vision and Challenge of Digital Platform Government‘를 주제로 기조연설2를 한다. 허성욱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원장이 ‘디지털플랫폼 정부와 국내 ICT 산업의 역할’에 대해 기조연설3을, 김재수 KISTI 원장이 ’과학기술분야 데이터 플랫폼’에 관해 기조연설4를 각각 한다. 이영상 한국중소벤처디지털혁신협회(KASDI) 회장이 ‘데이터 패브릭, 디지털 플랫폼의 미래’로 기조연설5를 한다. 이후 메타버스의 미래에 대해 유철균 대구경북연구원장이 발제한다. 유병준 서울대 교수는 ‘기업육성 플랫폼으로서의 디지털 정부’, 주영섭 서울대 교수는 ‘스마트 제조’, 최석재 한국IBM 상무는 ‘정부 디지털플랫폼 구축-데이터 패브릭 활용방안’에 대해 각각 발제한다. 박효진 세종텔레콤 부사장은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사업을 통해 본 STO 방향 고찰’, 장상현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본부장은 ‘교육-인재양성 플랫폼’, 데이비드 전 DMLab 최고경영자(CEO)는 ‘AI 쇼셜 플랫폼’, 김동필 엘솔루 부사장은 ‘Cloud-based AI Platform‘에 대해 각각 발제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2022-10-31 19:45 
[오늘과 내일/손효림]출발선 떠났다면 일단 나아가라“후회는 없어요.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전화기 너머로 밝은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신이 숨겨 놓은 직장’이라 불리는 알짜 공기업을 지난해 그만둔 최유안 소설가(38)였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올해 1월 출간한 첫 장편소설 ‘백 오피스’를 쓰기 위해 사표를 냈다고 했다. 결단력이 놀라웠지만 마냥 축하를 건넬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한다. “큰 프로젝트가 이어져 소설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다 내 갈 길을 가자고 결심했죠.”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소 딸을 묵묵히 지켜보던 어머니는 업무에 지친 몸으로 꾸역꾸역 글을 쓰는 딸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소설이 너에게 뭐니?” 그는 말했다. “난 소설가로 죽고 싶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당선 전화가 왔고 그는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소설가이길 원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쉽사리 짐작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도로 간절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해 볼 뿐이다. ‘백 오피스’는 단숨에 읽혔다. 호텔리어 강혜원, 행사 기획사 직원 임강이, 대기업 대리 홍지영이 호텔에서 개최하는 대형 행사를 둘러싸고 분투하는 이야기다. 세 여성이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 동료와 벌이는 복잡하고도 팽팽한 신경전, 가차 없는 조직의 논리가 사실적이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려졌다. 현실적이고 밀도 높은 ‘오피스 소설’이 탄생했다는 반가움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이들이 많은 때다. 지난달 열린 청강문화산업대 졸업식에서 용접노동자 천현우 씨(32)가 한 축사가 화제가 됐다. 그는 “살다 살다 졸업 축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 놓았다. 한때 용접하는 자신이 패배자 같아 부끄러웠고, 잘못한 것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는 게 억울했다고. 고민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나는 용접을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타인의 평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당부했다. “쇠와 매연, 공장과 작업복의 회색지대가 저의 세계였듯, 여러분 역시 자신의 세계가 있을 거예요. 자신의 세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선명하게 그 세계를 완성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어 “까고 말해서 덕질하자는 거죠”라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자신의 결정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출발선을 떠났다면 일단 나아가라고. 혹여 지친다면 에너지를 뿜어내던 순간의 자신 혹은 그런 이들을 떠올려 보라고. 기자는 힘을 얻고 싶을 때면 수상자들의 당선 소감을 종종 읽곤 한다. 감사한 사람들의 이름을 끝없이 나열하는 소감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말이다. 특히 연극상, 신춘문예를 포함한 문학상 수상자들의 소감이 그렇다. “아파도 슬퍼도 글을 썼던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제 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열심히 밥을 먹듯 시를 쓰겠습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종이 위에 끈질기게 머무르겠습니다.” 2018년 본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된 변선우 씨(29)의 소감이다. 계속 시를 부여잡고 있을 그에게 감사하며, 고되고 벅차도 자신이 택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 간절함, 그 열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라며.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2-03-02 03:00 
[오늘과 내일/손효림]질주하는 당신, 무엇을 향하는가굽은 등, 절름거리는 다리, 뒤틀린 손을 지닌 사내. 조카들을 죽이고 정적을 숙청하며 왕좌에 올랐다. 왕권 유지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는 존재는 가차 없이 제거한다. 현재 공연 중인 연극 ‘리차드 3세’에서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실존 인물 리차드 3세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는 폭풍처럼 내달린다. 4년 만에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황정민은 피를 뿌리며 권력을 거머쥐는 리차드를 호소력 짙게 풀어낸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불구라는 이유로 왕좌의 언저리조차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 냉소를 던진 후 치밀한 계획으로 직접 왕좌에 오르는 리차드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서재형 연출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왕관을 꿈꾼다. 리차드를 통해 왕관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렸던 우리의 모습을, 또 멈출 수 없이 내달리게 내모는 우리 사회를 반추해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악다구니를 하며 쉼 없이 달리는 이들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더 갖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잠깐 멈춰서 보라고 말하는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자리한 편의점을 배경으로 소시민의 삶을 정겨우면서도 웃음이 쿡쿡 나게 그린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지친 이들이 나온다. 보험, 자동차,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입에서 단내가 나게 일했지만 하루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소주에 컵라면, 삼각김밥까지 딱 5000원뿐인 40대 가장 ‘경만’이 그렇다. 아들의 악기와 레슨비 마련을 위해 뇌물을 받다 경찰에서 해직된 후 흥신소를 차려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는 ‘곽’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편의점 직원 ‘독고’는 노숙자로 살다 알코올성 치매로 자기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된 인물로, 이들에게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위로를 건넨다. 독고가 노숙자가 된 구체적인 이유는 스포일러라 밝히진 못하지만 오직 성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전원 지역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많은 손님이 찾아오고 여러 행사에 참여하던 분주한 일상이 자연스레 멈췄다. 호크니는 미술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와 함께 쓴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에서 노을 지는 하늘, 떨어지는 빗방울,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를 살펴보는 기쁨에 대해 밝혔다. “나무껍질에 비치는 빛의 잔물결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해가 서서히 지면서 나무 몸통에 햇살이 닿아 생겨난 것이죠. … 사과나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아직 싹이 나지 않았지만 봉오리가 곧 움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모두 놀랍기만 합니다.” 호크니는 자연에서 느낀 경이로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전’에서 나무가 가득한 야외 풍경을 그린 대작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2007년)가 떠올랐다. 가로 12.2m, 세로 4.6m의 이 작품을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노르망디에서 눈을 반짝이며 자연 속 풍경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봉쇄된 천국’이라 부른 그곳에서 거장이 빚어낸 작품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리차드 3세’에서 반기를 든 이들에 의해 최후를 맞는 리차드의 마지막 외침은 처연하다. “나는 진군한다. 아니, 나는 진군해야만 한다.” 끝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나아가려고만 하는 이들의 마음을 은유하는 듯하다. 발버둥치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이 말은 그래서 더 묵직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2-0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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