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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효림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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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손효림]한 치 앞 모르는 삶, 충만하게 몰입할 대상 있나요“인생에 확실한 건 없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러기에 오늘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 에세이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반복되어도 싱그럽다’를 최근 펴낸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석좌교수(69)에게 출간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책은 그가 30년 동안 찍은 사진과 오랜 기간 써 온 일기를 선별해 만들었다. 박 교수는 1만 장 넘는 사진과 함께 일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고 한다. 심장내과 명의(名醫)로 주중 매일 수술을 집도하는 그는 환자들을 보며 마음먹은 걸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장 질환은 갑작스레 찾아와 사람을 쓰러지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 역시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지자 지금 이 순간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을 늘 마주하는 그이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현재 고등학생인 늦둥이 셋째 딸은 그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특히 자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저도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의 전성기(?)를 못 봤거든요. 늦둥이 딸도 마찬가지겠죠. 30, 40대인 두 딸들에 비해 막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적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은 그의 몸과 마음을 채워 줬다. “같은 풍경을 여러 번 찍어도 카메라 각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사진을 보며 놀라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사진은 없어요. 그 사진은 오직 하나뿐이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긴 것처럼요.” 그의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아무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주는 힘, 그리고 사진 에세이 출간이라는 마음먹은 일을 해낸 데 따른 뿌듯함이 전해져 왔다. 15∼18세기 유럽 화가의 회화 작품을 구입한 지인도 박 교수와 비슷한 말을 했다. 패션, 음식, 자동차 등에 일절 관심이 없고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사는 그가 몇 년 전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는 “유명 화가의 작품이 아니어서 그리 비싸진 않다”며 “정교한 구도로 짜임새 있게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힘들 때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그래서 눈길이 자주 가는 곳에 그림을 두고 상처받거나 지칠 때면 하염없이 바라본다고 한다. 또 다른 지인은 2년 넘게 피트니스센터를 꾸준히 다니며 ‘몸만들기’에 빠져 있다. 그는 “몸은 정직하다. 운동한 만큼, 또 음식을 먹은 만큼 그 결과가 그대로 나타난다”며 웃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사는 게 괴롭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팍팍한 세상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주거나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다.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통해 위안을 얻는지 찾아내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탐색해야 한다.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된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전시가 적지 않다. 국립예술단체와 지역문화재단에서는 1만∼2만 원에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작은 도서관, 동네 서점에서 글을 쓰고 낭독을 해 볼 수도 있다.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대상을 찾는다면 삶은 더 충만해지고 내면 역시 단단해질 것이다. 고달프게 여겨지는 이 시간도 언젠가 끝난다. 유한한 시간을 어떤 색깔로 채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9-15 23:48
[오늘과 내일/손효림]함께하며 성장… 단절의 시대, 주목받는 연극의 힘“연극은 혼자서는 못해서 좋아요.” 사람이 부족해 늘 허덕이던 서울 소재 대학의 한 연극 동아리가 2021년 회원 모집 공고를 내자 50명이 몰려들며 공통적으로 한 말이었다. 이 동아리는 2018, 2019년까지만 해도 공연을 올리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인 20여 명을 확보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동기, 선후배를 설득해 한 명 한 명 채워 나갔다.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연습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연극 동아리는 인기가 없었다. 팬데믹이 덮치며 2020년, 2021년 비대면 수업이 전면 실시됐고 캠퍼스는 적막에 싸였다. 2021년, 동아리에 새로 필요한 인원은 30여 명인데 50명이나 지원하는 이변이 생긴 것. (2020년에는 뽑지 않았다) 당시 동아리 회장은 “예전에는 희망하기만 하면 무조건 ‘모셔’ 왔는데, 처음으로 지원서를 받고 면접까지 봐서 회원을 뽑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그렇고, 다른 연극 동아리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같이 모여서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단다. 외로움에 시달린 학생들에게 연극이 일종의 탈출구가 된 셈이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동아리 출신 중 광고회사, 방송사 등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취업한 경우가 꽤 많아진 것. 공연을 하려면 배우, 연출가, 조명·음향 감독, 무대디자이너 등이 논의를 거듭하며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생각이 다르면 설득하고, 때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수십 명의 관객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한다. 이는 회사 업무에 필요한 주요 자질이기도 하다. 하반기 채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요즘, 한 대기업 임원은 “젊은 사원들 가운데 메신저가 아니라 얼굴을 보고 말하거나 전화 통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같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 MZ세대 중에서는 전화 공포증인 ‘콜포비아(Call Phobia)’ 때문에 스피치학원에서 전화 통화 방법을 배우는 이들도 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진 연극이 단절의 시대에 논리적이며 명료한 표현, 공감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라는 특징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극단 연습실에 가보면 대사의 의미, 전달 방법과 그 이유 등을 하나하나 고민하고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극은 사회를 반영하고 인간과 삶의 본질을 꿰뚫기에, 이를 곰삭혀 체화하다 보면 내면도 깊어진다. 국내 최고 권위를 지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들을 때마다 이를 명징하게 확인하게 된다. 연극인들은 자기만의 언어로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게 전한다.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만 줄줄이 나열하다 끝나는 경우는 못 봤다. “연극은 내가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내 안의 것도 보고 바깥의 것도 보게 하면서요.”(배우 지현준) “‘날아가 버린 새’의 주인공이 상처로 가득 찬 마음속 검은 비닐봉지를 비워내듯, 이 작품을 만나는 모든 분들도 자신 안에 있는 검은 봉지를 비우는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작가 장지혜) 배우 생활 20년 만에 연기상을 받은 남명렬 씨의 소감은 웃음 터지면서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소망 질투 자책 애증 부러움 불운 호기 분노…. 동아연극상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었습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연극을 시작했는데, 수상이든 연기든 자기를 내려놓을 때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시대, 연극 동아리의 인기는 연극이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또렷하게 비추고 있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8-25 00:06
[오늘과 내일/손효림]드라마를 통해 본 직업으로서의 교사“너, 내가 공문을 얼마나 잘 쓰는지 모르지? 내가 공문을 겁나 잘 써서 교감이 나만 시켜. 근데 왜 너만 (연봉이) 몇백억이야?” 올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 전종렬(김다흰)이 대학 동기인 ‘일타 강사’ 최치열(정경호)과 소주를 마시며 자조적으로 한 말이다. 주인공 최치열은 연봉 수백억 원에, 그가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가 1조 원에 달한다고 해 ‘1조 원의 남자’, ‘일타 오브 일타’로 불린다. 교사들의 분노가 거세게 터져 나오면서 교사가 나온 드라마, 영화가 떠올랐다. 학생, 학부모 등 각자 입장에 따라 교사들의 분노에 대한 생각은 다르겠지만 교사가 처한 상황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이도 적지 않다. 교사는 익숙하면서도 구체적인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직업군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교사의 현실은 드라마,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청소년 드라마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교사는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생들을 차별하는 등 단편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다. 유명 대사,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를 남긴 영화 ‘친구’(2001년)가 대표적이다. 담임교사(김광규)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며 학생들을 체벌하기 전, 뺨을 잡아 흔들며 던진 이 질문은 교사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와 함께, 그럼에도 반발할 수 없었던 높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지도하기는 어려워지고 학부모를 대하는 건 만만치 않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전종렬은 수업 시간에 최치열의 강의 교재를 몰래 푸는 전교 1등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야단친다. 하지만 “수업 내용은 중딩 때 다 풀어본 것”이라며 오히려 발끈하는 학생의 모습에 어이없어 한다. 이를 본 동료 교사는 “힘들게 임용고시 준비할 때만 해도 내가 생각한 교사의 위상은 이게 아니었는데…”라며 고개를 젓는다. 이들 장면에 대해 “학교 현장과 진짜 비슷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고하늘(서현진)이 정교사가 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그린 드라마 ‘블랙독’(2019∼2020년)은 교육자이자 직장인으로서 교사를 두루 조명한다. 기간제 교사가 겪는 차별을 비롯해 업무를 둘러싸고 교사들 간에 벌어지는 팽팽한 기싸움과 경쟁, 그리고 동료애까지…. ‘학교판 미생’으로 불린 이 드라마는 교사를 때론 상처 입고 좌절하면서 성장하는 한 인간으로 그렸다. 극본을 쓴 박주연 작가는 실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취기가 잔뜩 오른 전종렬은 최치열에게 말한다. “나는 우리 애들 사랑해.” 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너 애들한테 그런 맘도 없지?” 스타 강사보다 연봉은 적지만 학생에게 책임감과 애정을 갖고 애쓰는 교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전한다. 계약 기간이 1년인 고하늘은 주저앉고 싶을 때나, 정교사 시험 준비를 하는 틈틈이 학생들을 떠올린다. “내년에 학교로 선생님 만나러 오고 싶어요”라는 고3 학생들은 그에게 “어우, 이쁜 내 새끼들”이라는 말과 함께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마음 한편에 학생에 대한 정을 지닌 교사를 비추는 이들 장면은 비록 드라마지만 학교 현장의 단면이기도 하다. 교사가 저 너머에 외따로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보통의 인간임을 짚는 작품들은 이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어쩌면 이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많은 이들 사이에 자리한 간극을 좁히는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8-04 00:03
[오늘과 내일/손효림]과도한 아이돌 보호, 팬 멍들고 아이돌 망친다“가슴을 만지더니 ‘애플워치죠?’ 하며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가 옷을 올리라고 했다. 어떤 분이 들어와 내가 속옷 검사 당하는 걸 봤다.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이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윗가슴을 꾹꾹 눌러 보더니, 아랫가슴도 꾹꾹 눌러서 너무 당황했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참가하는 행사도 아니었다. 아이돌 그룹 팬 사인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항이나 대통령 참가 행사에서는 보통 검색대를 통과하게 하고 검사 기기로 몸에 닿지 않게 훑는다. 방탄소년단(BTS)이 소속된 하이브의 계열사가 일본에서 선보인 9인조 보이그룹 ‘&TEAM’(앤팀)의 팬 사인회에서 팬들의 속옷 검사를 해 성추행 논란이 일고 있다. ‘하이브 레이블즈 재팬’ 소속 9인조 보이그룹 앤팀이 8일 서울 동작구에서 연 팬 사인회에서 여성 보안요원들이 손으로 팬들의 속옷을 검사했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가수와의 대화를 녹음하면 안 된다며 녹음기 소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피해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주최 측의 해명은 더 놀라웠다. 행사를 연 하이브 산하 팬 커머스 플랫폼 위버스샵은 9일 입장문을 내고 “전자장비를 몸에 숨겨 반입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해 이를 확인한 것”이라고 사과하면서도 “보안 검색에 비접촉 방식을 도입하는 등 개선안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속옷 검사를 한 책임을 팬에게 떠넘긴 데다 보안 검색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팬 사인회에서 가수와 팬은 짧은 시간 1 대 1로 대화한다. 위버스샵은 이를 녹음한 내용이 외부에 유출돼 곤란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난감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그런 말을 안 하게 가수들을 교육하면 될 일이다. 이번 사건은 아이돌 보호를 명목으로 일부 소속사들이 도를 넘는 행동을 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촬영장 등에서도 아이돌에 대한 소속사의 과잉보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연출가가 아이돌에게 연기 지시를 하니, 매니저가 ‘아티스트와 직접 얘기하지 말고 저를 통해서 해 달라’고 말해 다들 기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작사 관계자는 “촬영하는 아이돌은 한 명인데 담당자가 3명이나 왔다. 메이크업, 헤어, 의상 담당자는 따로 있었고, 이들은 로드 매니저, 일반 매니저, 홍보 담당자였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과잉보호는 K팝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데 따른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아이돌 그룹 한 팀을 데뷔시키려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 노력이 든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아주 작은 일이 일파만파 확대돼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 되면 투자한 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고 했다. 이어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를 작은 위험까지 방지하려면 이중 삼중, 나아가 사중 오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과정에서 팬들이 몸과 마음을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근시안적 사고다. 아이돌이 누리는 인기와 부는 팬 덕분이다. 지나친 보호가 아이돌에게 좋은 것도 아니다. 평생 정상에 있을 순 없고, 인기를 장기간 유지하긴 쉽지 않다. 결국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을 챙기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도 씩씩하게 홀로 나아갈 아이돌이 얼마나 될까. 소속사들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 K팝이 세계를 호령한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지만, 운영 시스템은 글로벌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7-14 00:03
[오늘과 내일/손효림]방황의 시간이 길어 올린 뜻밖의 열매“솔직히 ‘파이 이야기’는 아무도 안 읽을 줄 알았어요.” 2002년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 작가(60)가 말했다. 이달 초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파이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를 밝히다 이렇게 털어놓으며 웃었다. ‘파이 이야기’는 50개국에서 1200만 권 넘게 판매됐고, 리안(李安) 감독이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3년)는 미국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었다. 배가 침몰해 인도 소년 파이가 호랑이와 보트를 타고 227일간 태평양을 표류한 일을 그린 소설은 아슬아슬한 모험,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냉철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든 성찰, 놀라운 반전을 지닌 걸작이다. 캐나다 트렌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마텔은 20대에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치과 의사가 되는 게 어때?’라며 여러 일에 대해 한마디씩 했어요. 하지만 직업을 갖는 게 두려웠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춤, 악기, 그림 등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었거든요.” 그러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 기다리며. 어느 날 인도를 여행하겠다는 한 여성을 따라 무작정 인도로 갔다. “인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수중에 돈도 별로 없어서 캐나다보다 물가가 싼 곳에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덮쳐 전기 충격기에 맞은 것 같았어요.” 그는 인도에서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글을 썼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죽어버린 이야기’를 접고 느릿느릿 지내다 보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까지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어요. 원숭이는 수시로 나타나 바나나를 낚아채 가는가 하면 도마뱀도 자주 출몰하고 코끼리도 볼 수 있었죠. 동물원이 아니라 일상에서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파이,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의 부모, 보트에서 파이가 호랑이를 경계하면서도 어느덧 의지하게 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쫓아간 그 여성과 잘되지는 않았다”고 웃으면서 “인도에서 ‘파이 이야기’의 단초를 얻었고 문장을 써 나가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한 황동혁 감독(52)도 대학 때 영화만 보며 지낸 적이 있었다. 서울대 신문학과를 다닌 그는 “휴학을 한 학기 했지만 수업도 거의 안 들어가고 1년 넘게 휴학생처럼 살았다. 매일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2개씩 봤다”고 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지인에게서 받아온 비디오카메라로 재미 삼아 학교 축제, 농활 등을 찍고 상영했다.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는 걸 보고 “영상을 찍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구나”라고 느끼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들이 세계적인 소설가, 감독이 된 건 재능과 노력 그리고 행운까지,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 하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던 그 시간 역시 지금의 이들을 만드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살펴보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정표를 발견하게 했으니.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무위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유럽에서 대학에 입학하기 전 1년간 여행, 봉사 등을 하는 ‘갭 이어’가 보편화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시간이 생산적인 결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나에 대해 알아가고 생각을 다지는 건 나이에 상관없이 필요하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마텔의 말에서 여백의 시간이 주는 힘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6-23 00:00
[오늘과 내일/손효림]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말하는 이들에게서 빛을 보다“호텔 로비에서부터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면목 없고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셨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원한 순천향대 의대 명예교수(74)는 지난달 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78)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를 만난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숨진 일본 규슈 옛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시비(詩碑)를 세우는 일을 2015년부터 해 온 니시오카 교수는 관할 구청의 불허로 건립이 최종 무산되자 한국인 30여 명이 전한 1000만 원가량의 후원금을 돌려주려 한국을 찾은 것. 봉투에는 5만 원짜리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신 교수가 건넨 100만 원 그대로였다. 사죄하는 편지와 시비 건립 추진 경과를 날짜별로 쓴 A4 용지 2장도 있었다. 신 교수는 “교수님이 한 시간 늦었는데 알고 보니 서울 종로구, 인천 강화도에 사는 분에게 후원금을 각각 돌려주고 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장호병 수필가(71)도 이튿날 대구로 온 니시오카 교수로부터 후원금을 돌려받았다. 장 작가가 대구문인협회장이던 2017년, 문인 10여 명과 전달한 것이었다. “봉투에 9만2000엔과 5만 원, 1만 원권으로 총 410만 원이 있었어요. 당시 100만 원을 엔화로 환전해 계좌로 보낸 분이 있었는데 이를 엔화 그대로 갖고 오신 거죠.”(장 작가) 도쿄 호세이대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니시오카 교수는 1981년 한국으로 와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10여 년 강의하다 199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윤동주의 시에 매료된 그는 연세대 교정에서 윤동주 시비를 보고 자신의 고향에서 시인이 운명한 사실을 몰랐던 것을 참회했다. 이에 1994년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매달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매년 위령제를 지낸다. 일본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 도시샤대와 하숙집 터(현 교토조형대), 친구들과 소풍 갔던 교토 인근 마을 우지에 시비가 각각 있다. 니시오카 교수가 후쿠오카에 시비를 세우려 한 건 시인이 마지막 머문 곳에 그가 존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원자들은 8년간은 물론 지난달 3박 4일 한국을 방문한 데 든 비용을 니시오카 교수가 부담한 것을 미안해했다. 돈을 안 받으려 했지만 “저승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으로 윤동주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노 교수의 말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니시오카 교수는 한국까지 온 데 대해 “후원금을 만나서 받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고 돌려드려야 한다”고 했다. 후원금을 활동비로 쓰지 않은 이유는 뭘까. “시비가 건립됐다면 당당히 활동비를 정산했겠지만, 이를 이루지 못했기에 돌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통비 등을 챙겨 주신 분도 있어 그동안 제가 쓴 돈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윤동주를 알게 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게 뭔지 배웠습니다. 윤동주의 고국에는 ‘윤동주 정신’을 가진 분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후원금을 돌려주는 이도, 받는 이도 가장 많이 한 말은 “부끄럽다, 미안하다”였다. “한국인도 안 하는 일에 일본인이 헌신적으로 나서는 걸 보며 부끄러웠습니다.”(신 교수) “이 돈은 미안해서 그냥 쓸 수 없습니다. 시비 건립 추진 과정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장 작가) 시비는 세우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실패는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6-01 21:30
회화, 삽화, 패션… 프랑스 거장 뒤피의 유쾌한 변주 [오늘과 내일/손효림]파도가 일렁이는 청명한 바다 위에 여유롭게 떠 있는 배들을 그린 유화, 리라를 들고 숲을 거니는 오르페우스를 새긴 목판화 삽화, 오렌지색 바탕에 투우사를 작게 그려 넣은 원피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의 작품들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뒤피의 국내 첫 회고전 ‘라울 뒤피: 색채의 선율’은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 180여 점을 통해 자유로움과 유쾌함을 선사한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바다를 보며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경리 일을 하며 성가대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았다. 뒤피의 회화가 지닌 경쾌함과 따스함의 씨앗은 이런 환경에서 심어졌으리라. 뒤피는 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거장 반열에 오른다. 전시 작품들은 구체적인 정보를 알면 좀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지만 그냥 편하게 보기만 해도 좋다. 부드러운 곡선에 맑게 채색한 아틀리에, 바닷가, 물고기 그림은 마음을 툭 내려놓게 만든다. 꽉 짜여진 틀에 맞춰 달리느라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이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기(電氣)의 역사와 영향을 그린 대형 벽화 ‘전기의 요정’을 석판화로 만든 동명 작품은 토머스 에디슨, 그레이엄 벨 같은 역사적 인물부터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까지, 친숙한 이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뒤피가 특히 사랑했던 파란색은 많은 작품에서 농담을 달리하며 시원하게 담겼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동물시집’에 실린 목판화를 비롯해 여러 책에 삽화로 담긴 뒤피의 석판화도 볼 수 있다. 삽화를 본 유명 패션디자이너 폴 푸아레(1879∼1944)의 제안으로 뒤피는 직물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직물은 옷, 가구, 벽걸이용 천 등에 사용됐다. 뒤피의 패턴으로 만든 원피스 17점을 비롯해 그가 누이에게 선물한 검붉은 장미와 초록색 잎이 큼지막하게 어우러진 원피스는 지금 바로 입고 다녀도 눈길을 끌 정도로 세련됐다. 흰색과 검은색 꽃무늬가 가득한 소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가벼워지는 기분으로 전시장을 거닐며 확인할 수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피는 업(業)의 본질에 집중하면서 다른 분야로 활동 반경을 차츰 확대해 나갔다는 것을. 그는 ‘시각적 표현’이라는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장르로 변주를 해나갔기에 해당 분야에서도 돋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모두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직물 패턴 디자인을 제안받은 뒤피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압박을 겪다 결국 이를 수락한다. 이후 작업을 하며 직물 디자인의 매력에 빠졌다. 업의 핵심을 파악하고 이를 응용하며 보폭을 조금씩 넓힐 것. 그의 여러 장르 작품들이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 같았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는 놀랍다. 뒤피는 말했다.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짐작하기조차 아득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고 또 이렇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았을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기쁨의 화가’로 불리는 뒤피의 작품들이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건 이런 그의 마음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5-11 21:30
조건 없는 이해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힐링소설’ 열풍[오늘과 내일/손효림]“‘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어때?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엄마가 좋아하실까?” “음, 둘 다 괜찮을 것 같아.” 얼마 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소설 판매대에서 자매로 보이는 두 여성이 책을 한 권 한 권 찬찬히 살펴보며 작은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는 것 같았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윤정은 지음)는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마음의 상처를 사라지게 하는 신비로운 세탁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소설이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무라세 다케시 지음)은 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이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 사고가 난 날의 열차에 올라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 판매대에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1·2’(이미예 지음), ‘불편한 편의점1·2’(김호연 지음),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 지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 헤이그 지음) 등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자그마한 건물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을 포근하게 그린 표지가 많았다. 한 지인은 “요즘 인기 있는 소설책 표지가 워낙 비슷해 얼핏 보면 한 시리즈 같다”고 말했다. 백화점, 편의점, 서점, 도서관 등 일상 속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위로를 전하는 소설들이 수년째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강세를 보이고 있다. 북카페, 세탁소, 초콜릿 가게 등 업종(?)도 점점 더 다양해지는 추세다 (당연한 얘기지만 작품마다 완성도는 제각각이다). 출판계에서는 “소설을 쓰려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가게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이른바 ‘힐링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등 과거 일본에서 있었던 현상이 시간차를 두고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힐링 소설의 인기는 상처받고도 호소할 데 없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책 후기에는 재미있었다는 반응과 함께 자신처럼 평범하고 마음을 다친 등장인물이, 자신도 종종 이용하는 공간에서 상처를 다독이는 과정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손님이 줄어 답답한 마음에 홀로 소맥을 들이켜는 정육식당 최 사장이 앉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 아래에 슬쩍 갖다 놓은 모기향(‘불편한 편의점2’), 줄야근하며 애써도 계약직에서 벗어날 수 없자 자신을 집어삼킬 정도의 분노에 휩싸인 정서가 뜨개질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서점의 구석 자리(‘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소소하지만 마음 한편을 채워 준다.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공동체에 대한 갈증도 엿보인다. 법조인을 목표로 곁눈질 없이 공부해 변호사가 된 후 정신없이 일하다 갑상샘암 판정을 받자 살아가는 이유를 짚어보게 된 소희, 뮤지컬 연출가의 꿈을 접고 아버지 회사에서 억지로 일하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무기력감에 빠진 수혁에게 북카페 사장과 직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다 이들이 입을 열면 귀 기울일 뿐이다(‘책들의 부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고, 어떻게 비칠지 고민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간. 간절히 원하지만 실현하기는 쉽지 않기에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달래고 있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4-20 21:30
최고 만드는 건 제자리서 혼신 쏟는 이들[오늘과 내일/손효림]황홀함 그 자체였다. 세계 최정상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단(BOP)이 30년 만에 전체가 내한해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달 초 선보인 ‘지젤’은 그랬다. 11일 오후 2시 공연에서 지젤 역을 맡은 BOP의 간판스타 도로테 질베르는 연인과 사랑에 빠진 기쁨, 배신당한 후의 광기, 영혼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끝내 지켜내는 애절함을 완숙하게 연기했다. 남자 주인공 알브레히트 역을 맡은 기욤 디옵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앞뒤로 빠르게 32회 교차하는 난도 높은 기술을 깔끔하게 선보여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디옵은 수석무용수 위고 마르샹의 갑작스러운 무릎 부상으로 대신 무대에 올랐다. 디옵은 BOP의 떠오르는 신예지만, 남자 주역이 교체됐다는 공지가 뜨자 취소 표가 꽤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국내 관객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탄탄한 기량으로 단숨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공연이 끝난 후 박수와 환호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자 무대에 올라 감사 인사를 하던 호세 마르티네즈 BOP 예술감독이 말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의 삶에는 매우 희귀한 순간이 있습니다. 꿈의 실현인 에투알(수석무용수) 지명의 순간이죠.” 그리고 디옵을 에투알로 깜짝 지명했다. 354년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最古) 발레단 BOP 최초로 흑인 에투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올해 쉬제(솔리스트)로 승급한 그가 ‘프리미에 당쇠르’(제1무용수)를 건너뛰고 에투알이 된 것이다. 에투알은 전체 단원의 10% 이내에 부여된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세네갈인 아버지를 둔 디옵은 놀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질베르와 동료들을 차례로 껴안았다. 2년 전 박세은이 BOP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에투알에 지명됐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처럼, 말 그대로 별의 순간을 맞은 이를 보니 가슴이 찡했다. 질베르와 디옵 못지않게 눈을 사로잡은 건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이었다. 남자를 유혹해 죽을 때까지 춤추게 만드는 처녀 귀신 윌리들이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하얀 망사의 로맨틱 튀튀를 입고 추는 ‘윌리들의 군무’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군무,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의 왕국 군무와 함께 ‘3대 발레 블랑’(하얀 발레)으로 불린다. 24명의 윌리는 두 발끝으로 소리 없이 빠르게 이동해 마치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대열을 정교하게 유지한 채 중력을 거스른 듯 일제히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은 영혼을 연기한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끼게 했다. 출산으로 이번 무대에 서지 않은 박세은이 지난해 7월 BOP 주역급 무용수들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선보인 ‘파리오페라발레 2022 에투알 갈라’가 개개인의 탁월한 기량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면, ‘지젤’은 빼어난 이들이 제대로 빚어낸 하모니였다. 윌리로 이번 무대에 선 한국인 강호현(쉬제)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낮에 식사할 시간이 없어 저녁에 두 끼를 몰아서 먹을 때도 있을 정도로 단련을 거듭했다. 그처럼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빈틈없이 제 역할을 해냈기에 압도적인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군무 없이 주연 없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단원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다. 잠깐 무대에 오르더라도 그 시간을 제대로 꽉 채울 수 있게 연습해야 한다는 당부다. 비단 무대뿐일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탈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각자 자리에서 묵묵히 애쓰는 이들 덕분이다. 감동을 주는 모자이크 작품은 적당히 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3-30 21:30
[오늘과 내일/손효림]성공한 이의 지나친 자기 확신, 毒이다세계적인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75·영국)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이 25일 부산 남구 드림씨어터에서 개막한 후 서울로 올라와 7월 14일부터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조승우(43)가 처음으로 팬텀(유령) 역을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웨버가 ‘오페라의 유령’ 후속작으로 만든 ‘러브 네버 다이즈(Love never dies)’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러브 네버 다이즈’는 2010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화려하게 공개됐지만 억지스러운 이야기와 기대에 못 미치는 음악으로 악평이 쏟아졌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천재적인 음악 실력을 지녔지만 흉측한 얼굴 탓에 프랑스 파리 오페라극장에 숨어 살던 팬텀은 사랑하는 여주인공 크리스틴을 통해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깨닫고 사라진다. ‘러브 네버 다이즈’에서 팬텀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코니아일랜드에 놀이동산을 만들어 큰 부(富)를 거머쥐고, 돈에 쪼들리는 크리스틴 가족을 불러들인다. 전편에서 크리스틴과 사랑을 이룬 라울은 술과 도박에 빠진 찌질한 남편이 됐다. 게다가 크리스틴 아들의 생부가 실은 팬텀이란다! 이 대목에서 경악했다. 귀에 꽂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이 가득한 ‘오페라의 유령’에 비해 ‘러브 네버 다이즈’는 동명의 넘버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곡을 찾기 어렵다. 침몰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영화 ‘러브 레터’(1995년)를 연출한 일본 이와이 슌지(岩井俊二·60) 감독이 “‘러브 레터2’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 ‘라스트 레터’(2021년)를 보는 동안 기자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두 아이의 엄마인 사서 유리는 고교 시절 첫사랑인 소설가 교시로를 우연히 만나 편지를 주고받는다. 교시로의 첫사랑은 유리의 언니 미사키로, 한 달 전 스스로 생을 끝냈다. ‘라스트 레터’는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가슴 아프게 그리워하는 주인공에, 편지가 오가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등 ‘러브 레터’의 큰 틀을 그대로 따랐지만 ‘러브 레터’가 선사한 감동을 산산조각 냈다.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도, 가슴 떨리는 음악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맡아 전교생 앞에서 당차게 발표하던 미사키가 대학에 진학해 가짜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딸을 낳은 후 자신을 떠난 그를 기다리다 삶 자체를 놓아버리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미사키와의 사랑을 모티브로 소설 한 권을 낸 뒤 그녀만을 생각하며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홀로 사는 교시로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라스트 레터’가 국내 관객 1만 명을 겨우 넘기며 소리 없이 퇴장한 걸 보면 실망한 건 기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창작품이 성공할 확률은 낮다. 속편을 잘 만들기는 더욱 힘들다. 이를 감안해도 두 거장이 명작의 후속으로 만든 작품이 범작도 못 된 이유는 뭘까. 기자는 이들의 지나친 자기 확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웨버는 스스로를 팬텀과 동일시해, 크리스틴과 팬텀의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이뤄주려다 보니 무리수를 두게 됐다. 이와이 역시 첫사랑을 풀어내는 자신의 감각을 과신한 것 같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싼 경영권 싸움을 보며 두 작품이 떠오른 건 성공한 이들이 종종 범하는 패착 때문이다. 이수만 에스엠 전 총괄 프로듀서(71)는 K팝을 세계에 알린 개척자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공의 결과물만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믿음 역시 강할 것이다. 에스엠 경영권 분쟁의 원인을 이 전 총괄 개인의 문제로만 단순화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과도한 확신과 밀어붙이기가 에스엠 내부 갈등의 씨앗이 됐음은 분명해 보인다. 성공할수록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의심 없는 질주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3-09 21:30
[오늘과 내일/손효림]고통에 대한 공감 이끌어내는 작가들‘슬픈 눈의 소녀는 10세 또는 12세가량임에 분명하다. … 가슴 아래가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움직일 수가 없다. … (휴대전화 카메라를 든) 남자가 “목마르니?”라고 묻는다. 소녀는 답한다. “추워요. 남동생도 여기 있어요.” … 고요하게 눈만 내릴 뿐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남자가 “도우러 다시 올게”라고 하자 소녀는 “가지 마세요!”라고 외친다. 소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점점 희미해진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71)가 뉴욕타임스(NYT)에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린 소녀.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11일(현지 시간) 기고한 글이다. 강진이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후 온라인에 올라온 영상을 본 파무크가 이를 묘사한 내용은 첫 줄부터 읽기가 힘들었다. 소설의 한 장면 같지만 엄연한 현실이기에. 그는 소녀가 구출되는 영상이 올라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폐허 속에서 막막해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알리고 무능한 정부를 질타하기에 앞서 파무크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그가 느낀 아픔을 전한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그의 비판과 요청이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파무크는 1999년 1만7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튀르키예 이즈미트 지진을 겪은 경험을 에세이 ‘다른 색들’(2016년)에 자세히 썼다. 당시 주저앉은 주택의 창문에 달린 망사 커튼이 미풍이 불 때마다 흩날려 집 안이 드러나는 광경을 보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우며 사악함에 열려 있는지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얼마나 미약한가.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한강 작가(53)가 떠올랐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년), 제주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년)를 통해 역사가 개개인에게 가한 폭력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되지 않는 아스라한 분위기에서 제주4·3사건 당시 참상을 해독하기 어려운 제주어로 쓴 ‘작별하지 않는다’에 비해 ‘소년이 온다’에서는 구타당하고 고문 받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폭력적인 장면을 쓰는 데 애를 많이 먹는다는 그는 한 강연에서 말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년)에서 밝힌 내용이다. 한 작가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세상의 온갖 고통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글로 토해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으로 상징되는 육식을 거부하다가 끝내 나무가 되길 꿈꾸는 여성을 그린 ‘채식주의자’(2007년)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한 작가가 그만큼 고통에 민감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고통을 감지하는 데 특히 예민한 촉수를 지니고 이를 전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보다 깊이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생명들이 스러지고, 울부짖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보듬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먼저 필요한 건 고통에 공감하는 게 아닐까. 다행스러운 건 그것이 가능하게 자장처럼 우리를 당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글 그리고 문학,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3-02-17 03:00
‘유럽의 300년 그림에 담기다’, 16일까지 서울 인사아트프라자서 열려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유럽의 300년 그림에 담기다’ 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프라자에서 1월 4일부터 16일까지 열린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비오는 날의 빗물’을 비롯해 피카소, 샤갈, 미로의 석판화를 만날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콘스탄틴 스토이츠너, 오스카 코코슈카, 오스카 라스케의 작품도 소개한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모두 300점이다. 이들 작품은 김진수 전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40여 년간 수집했다. 김 전 교수는 “인상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품이 많고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을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다”며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고전적 회화 작품을 통해 유럽의 300년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각 작품의 액자도 당시 제작한 그대로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다문화 가정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김 전 교수는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은 한국에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의 폭행 등에 시달리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자녀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사용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02-722-9969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2023-01-05 09:45
‘e브릿지 포럼 2022’ 개최…민간과 정부 협력 플랫폼 고찰‘e브릿지 포럼 2022’가 ‘글로벌플랫폼의 세계: 민간과 정부의 협력 플랫폼’을 주제로 11월 3일 오후 1시 10분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대강당에서 열린다. 포럼은 한국정보처리학회 한국경영정보학회 한국행정학회가 공동 주최한다. 공동대회장이자 e브릿지 편집위원장인 안문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개회사로 막을 연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축사를 한다. 고진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장이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혁신 디지털플랫폼정부 추진 방향’에 대해 기조연설1을 한다. 고 위원장은 부처 간 칸막이, 데이터 개방 부족, 경험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정책 결정,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 등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데이터가 연결되는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국민, 기업, 정부가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디지털플랫폼정부를 통해 정부와 민간이 협업하면 한국 디지털정부가 한 단계 더 도약해 세계를 선도하는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어 미국행정학회장을 지낸 마크 홀저 서포크대 교수가 ‘The Vision and Challenge of Digital Platform Government‘를 주제로 기조연설2를 한다. 허성욱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원장이 ‘디지털플랫폼 정부와 국내 ICT 산업의 역할’에 대해 기조연설3을, 김재수 KISTI 원장이 ’과학기술분야 데이터 플랫폼’에 관해 기조연설4를 각각 한다. 이영상 한국중소벤처디지털혁신협회(KASDI) 회장이 ‘데이터 패브릭, 디지털 플랫폼의 미래’로 기조연설5를 한다. 이후 메타버스의 미래에 대해 유철균 대구경북연구원장이 발제한다. 유병준 서울대 교수는 ‘기업육성 플랫폼으로서의 디지털 정부’, 주영섭 서울대 교수는 ‘스마트 제조’, 최석재 한국IBM 상무는 ‘정부 디지털플랫폼 구축-데이터 패브릭 활용방안’에 대해 각각 발제한다. 박효진 세종텔레콤 부사장은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사업을 통해 본 STO 방향 고찰’, 장상현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본부장은 ‘교육-인재양성 플랫폼’, 데이비드 전 DMLab 최고경영자(CEO)는 ‘AI 쇼셜 플랫폼’, 김동필 엘솔루 부사장은 ‘Cloud-based AI Platform‘에 대해 각각 발제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2022-10-31 19:45
[오늘과 내일/손효림]출발선 떠났다면 일단 나아가라“후회는 없어요.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전화기 너머로 밝은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신이 숨겨 놓은 직장’이라 불리는 알짜 공기업을 지난해 그만둔 최유안 소설가(38)였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올해 1월 출간한 첫 장편소설 ‘백 오피스’를 쓰기 위해 사표를 냈다고 했다. 결단력이 놀라웠지만 마냥 축하를 건넬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한다. “큰 프로젝트가 이어져 소설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다 내 갈 길을 가자고 결심했죠.”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소 딸을 묵묵히 지켜보던 어머니는 업무에 지친 몸으로 꾸역꾸역 글을 쓰는 딸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소설이 너에게 뭐니?” 그는 말했다. “난 소설가로 죽고 싶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당선 전화가 왔고 그는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소설가이길 원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쉽사리 짐작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도로 간절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해 볼 뿐이다. ‘백 오피스’는 단숨에 읽혔다. 호텔리어 강혜원, 행사 기획사 직원 임강이, 대기업 대리 홍지영이 호텔에서 개최하는 대형 행사를 둘러싸고 분투하는 이야기다. 세 여성이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 동료와 벌이는 복잡하고도 팽팽한 신경전, 가차 없는 조직의 논리가 사실적이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려졌다. 현실적이고 밀도 높은 ‘오피스 소설’이 탄생했다는 반가움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이들이 많은 때다. 지난달 열린 청강문화산업대 졸업식에서 용접노동자 천현우 씨(32)가 한 축사가 화제가 됐다. 그는 “살다 살다 졸업 축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 놓았다. 한때 용접하는 자신이 패배자 같아 부끄러웠고, 잘못한 것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는 게 억울했다고. 고민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나는 용접을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타인의 평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당부했다. “쇠와 매연, 공장과 작업복의 회색지대가 저의 세계였듯, 여러분 역시 자신의 세계가 있을 거예요. 자신의 세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선명하게 그 세계를 완성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어 “까고 말해서 덕질하자는 거죠”라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자신의 결정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출발선을 떠났다면 일단 나아가라고. 혹여 지친다면 에너지를 뿜어내던 순간의 자신 혹은 그런 이들을 떠올려 보라고. 기자는 힘을 얻고 싶을 때면 수상자들의 당선 소감을 종종 읽곤 한다. 감사한 사람들의 이름을 끝없이 나열하는 소감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말이다. 특히 연극상, 신춘문예를 포함한 문학상 수상자들의 소감이 그렇다. “아파도 슬퍼도 글을 썼던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제 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열심히 밥을 먹듯 시를 쓰겠습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종이 위에 끈질기게 머무르겠습니다.” 2018년 본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된 변선우 씨(29)의 소감이다. 계속 시를 부여잡고 있을 그에게 감사하며, 고되고 벅차도 자신이 택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 간절함, 그 열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라며.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2-03-02 03:00
[오늘과 내일/손효림]질주하는 당신, 무엇을 향하는가굽은 등, 절름거리는 다리, 뒤틀린 손을 지닌 사내. 조카들을 죽이고 정적을 숙청하며 왕좌에 올랐다. 왕권 유지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는 존재는 가차 없이 제거한다. 현재 공연 중인 연극 ‘리차드 3세’에서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실존 인물 리차드 3세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는 폭풍처럼 내달린다. 4년 만에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황정민은 피를 뿌리며 권력을 거머쥐는 리차드를 호소력 짙게 풀어낸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불구라는 이유로 왕좌의 언저리조차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 냉소를 던진 후 치밀한 계획으로 직접 왕좌에 오르는 리차드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서재형 연출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왕관을 꿈꾼다. 리차드를 통해 왕관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렸던 우리의 모습을, 또 멈출 수 없이 내달리게 내모는 우리 사회를 반추해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악다구니를 하며 쉼 없이 달리는 이들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더 갖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잠깐 멈춰서 보라고 말하는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자리한 편의점을 배경으로 소시민의 삶을 정겨우면서도 웃음이 쿡쿡 나게 그린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지친 이들이 나온다. 보험, 자동차,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입에서 단내가 나게 일했지만 하루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소주에 컵라면, 삼각김밥까지 딱 5000원뿐인 40대 가장 ‘경만’이 그렇다. 아들의 악기와 레슨비 마련을 위해 뇌물을 받다 경찰에서 해직된 후 흥신소를 차려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는 ‘곽’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편의점 직원 ‘독고’는 노숙자로 살다 알코올성 치매로 자기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된 인물로, 이들에게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위로를 건넨다. 독고가 노숙자가 된 구체적인 이유는 스포일러라 밝히진 못하지만 오직 성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전원 지역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많은 손님이 찾아오고 여러 행사에 참여하던 분주한 일상이 자연스레 멈췄다. 호크니는 미술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와 함께 쓴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에서 노을 지는 하늘, 떨어지는 빗방울,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를 살펴보는 기쁨에 대해 밝혔다. “나무껍질에 비치는 빛의 잔물결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해가 서서히 지면서 나무 몸통에 햇살이 닿아 생겨난 것이죠. … 사과나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아직 싹이 나지 않았지만 봉오리가 곧 움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모두 놀랍기만 합니다.” 호크니는 자연에서 느낀 경이로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전’에서 나무가 가득한 야외 풍경을 그린 대작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2007년)가 떠올랐다. 가로 12.2m, 세로 4.6m의 이 작품을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노르망디에서 눈을 반짝이며 자연 속 풍경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봉쇄된 천국’이라 부른 그곳에서 거장이 빚어낸 작품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리차드 3세’에서 반기를 든 이들에 의해 최후를 맞는 리차드의 마지막 외침은 처연하다. “나는 진군한다. 아니, 나는 진군해야만 한다.” 끝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나아가려고만 하는 이들의 마음을 은유하는 듯하다. 발버둥치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이 말은 그래서 더 묵직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2022-02-07 03:00
강석우 “3차접종 후 시력 나빠져 글 못읽어”…6년진행 라디오 하차배우 강석우(65)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 부작용을 겪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고 27일 밝혔다. 강석우는 이날 방송된 CBS 음악FM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통해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을 한 후 한쪽 눈의 시력이 점점 나빠졌고 모니터의 글을 읽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강석우는 “이 방송을 그만두지만 제 목소리나 얼굴은 다른 매체를 통해 보실 수 있을 것이다. 6년이 넘는 시간동안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라고 말했다. 강석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SNS)에 마지막 방송 현장을 찍은 영상을 올렸다. “마지막 방송 마지막 멘트 마지막 곡 그리고 꼭 전하고 싶은 말 ‘애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라는 글도 함께 썼다. 영상에서 방송을 끝낸 강석우는 “3, 4개월 정도 무념무상으로 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석우의 SNS를 비롯해 라디오 프로그램 게시판에는 아쉬움과 함께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청취자 게시판에는 ‘꼭 다시 돌아오시리라 믿고 기다릴게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방송 내내 흐르는 눈물은 나만이 아닐 거라 봅니다.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있어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2022-01-2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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