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학계 ‘87년 체제 극복론’급부상

  • 입력 2005년 5월 10일 19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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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은 무능하고, 경제성장은 제자리 걸음이고, 노동계는 귀족화하고, 시민단체는 권력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무성한 한국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방안은 무엇일까. ‘87년 체제론’은 과연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거대담론을 대체할 수 있을까.
정치권력은 무능하고, 경제성장은 제자리 걸음이고, 노동계는 귀족화하고, 시민단체는 권력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무성한 한국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방안은 무엇일까. ‘87년 체제론’은 과연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거대담론을 대체할 수 있을까.
최근 학계에서 ‘87년 체제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담은 ‘87년 체제론’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곳은 노동운동이 분출한 1987년을 기점으로 삼았던 노동학계. 그러다 계간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가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와 87년 체제’를 주제로 권두좌담을 펼치고 올여름 이를 주제로 대규모 학술회의를 준비하면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로 ‘87년 체제론’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학계에서 ‘87년 체제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분단체제를 ‘48년 체제’로 규정한 뒤 17대 국회의 과제를 48년 체제의 극복으로 바라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학계 출신의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2공화국을 ‘48년 체제’△ 박정희 정권 등장∼5공을 ‘63년 체제’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이행기를 ‘87년 체제’로 삼등분하며 탈냉전과 세계화 흐름을 예상 못한 87년 체제의 극복을 모색할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48년 체제가 15년, 63년 체제가 24년, 87년 체제는 18년째 지속됐으므로 변화를 모색할 시점이 됐다는 것.

이는 정치권에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는 것과도 현실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동아일보의 최근 17대 국회의원 여론조사에서 개헌을 할 경우 바람직한 권력구조로 4년 중임제를 꼽은 의원은 77.4%였다.

성공회대 유철규(경제학) 교수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87년 체제론’을 펼친다. 유 교수는 “유신정부 시대의 경제적 비전을 형상화한 화보에는 한강변에 고층아파트가 열을 짓고, 고속화도로에 승용차가 줄을 잇는 장면이 등장한다”며 “88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마이카시대가 열리고 한국경제가 수출 중심에서 내구소비재 중심으로 전환함으로써 그 경제적 비전이 완성된 것이 87년”이라고 말했다.

그는 “87년 이후 한국경제는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과도기적 단계였지만 92년 금융시장 개방 등 개방화 조치와 97년 외환위기로 인해 그런 모색이 강압적으로 종결됐다”며 “이후 신자유주의 등 수입된 경제관의 지배를 받으면서 내부 비전 창출에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87년 체제는 민주화, 시장의 투명성, 노동자의 권익보호, 시민사회 성장이라는 명(明)과 함께 3김 정치, 부의 편중, 집단이기주의, 시민운동의 권력화라는 암(暗)도 낳았다”며 87년 체제의 극복은 바로 그 암(暗)을 겨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의 리더십 교체만으로는 당면한 국가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총체적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

연세대 국제대학원 박명림(정치학) 교수는 87년 체제 극복의 담론을 헌법조항과 직접 연결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는 “87년 6월 항쟁 이후 현행 헌법으로 개정될 때 당대의 과제인 권위주의 종식과 장기집권 방지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3당 합당, DJP연합, 탄핵파동에 직면하게 됐다”며 “질 높은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사회협약으로서 헌법의 전면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중임제 개헌 등 현실적인 권력구조 개편을 떠난 헌법 개정 논의는 보수-진보 간 이념대립이 치열한 한국 상황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격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서울대 정종섭(헌법학) 교수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법을 건드리는 것은 선정적 발상”이라고 경계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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