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향기]'삿포로여인숙' 네개의 鐘 실마리로 삶의…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50분


작가 하성란 (33)의 작품을 수놓는 찬사는 주로 ‘영화같은 정밀한 묘사’에 모아져 있다. 지난해 발표한 창작집 ‘옆집 여자’는 ‘인간의 악의에 대한 집요한 천착’이 작품마다 얄미울 정도로 고른 성취를 나타냈다는 점에서도 일정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가 새 장편 ‘삿뽀로 여인숙’(이룸)을 선보였다.

책이 작가의 아이와 같다면, 이 책은 앞선 언니들에게 유별난 동생으로 여겨질 것이다. 치밀한 암시와 복선을 통해 주인공을 일정한 함정으로 이끌어가면서 긴장과 때로 통쾌함마저 유발했던 그의 바로 윗언니 (옆집 여자)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주인공 진명 앞에 파노라마처럼 등장하는 여러 존재들은 주인공의 행로를 특별한 방향으로 유도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행동을 극사실화처럼 보여준 뒤 각자의 숨은 동기를 추적해나가는 것이 하성란 소설 읽기의 특별한 재미였지만, ‘삿포로 여인숙’의 주인공들에게서 남의 삶에 침입하고 공격을 가하고, 사랑의 제스처를 나타내거나 물러서는 등의 이유를 짚어내기란 힘들다. 대신 주인공 각각의 존재양식은 ‘신비’하며, 불가해한 만큼 예전 작품의 주인공들보다 풍성한 이미지 속에 싸인다.

주인공의 고교시절, 쌍둥이 남동생 선명의 사고사로부터 이야기는 출발한다. 친한 형제를 잃은 진명의 귀에 어느날 ‘내 이름은 고스케입니다’라는 뜻의 일본어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진명은 대학 입학에 관심을 잃은 채 평범한 사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그의 생활속에는 그의 모든 행동을 꿰뚫는 듯한 30대 남자 김정인, 키카 큰 동년배 남자 김동휘, 비즈니스맨 브라운 등이 얽혀든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 동기는 ‘네개 종(鐘)’의 미스테리가 제공한다. 죽은 선명이 수학여행 때 기념품으로 산 에밀레종의 미니어처다. 하나는 진명에게, 하나는 선명에게, 하나는 동급생이었던 윤미래에게. 10여년이나 지난 뒤 네 번째 종의 주인을 찾아가는 여행이 작품의 제목과 연관된다. 머릿속에서 울려오던 이름 ‘고스케’의 비밀도 베일을 벗어간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정밀묘사’의 솜씨는 작품 서두의 교통사고 장면에서 경탄을 자아낸 뒤 작품 구석구석에서 거듭 재현되지만 중반부 이후에는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인간의 악의에 대한, 잔인하다 싶기까지 한 해부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대신 세계와 삶의 불가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모험의 여정을 출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첫 시도는 성공한 것일까. 기자는 완전히 설복되지 않았다는 느낌. 그것은 작가가 너무 많은 얘기를 펼쳐놓고 닫지 않은 듯한 인상 때문이다. 김정인이 동업자 최태경을 죽이게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을 서둘러 퇴장시키고자 한 때문은 아닌가.

김동휘는 왜 주변부에서만 머물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가. 말없이 자취를 감춘 윤미래는 왜 하루아침에 산악인으로 변해 죽음을 맞는가. 이 모든 불평은 무릇 ‘소설 플롯이란 수미일관 납득할만하며 명백한 인과관계를 갖춰야 한다’는 기자의 시대착오적 관념 때문일까.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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