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어야 산다』 남녀노소 체면 안차리고 「끼」자랑

  • 입력 1998년 8월 10일 19시 31분


“그럼 바텐더랑 하죠, 뭐….”

지난 금요일 오후9시경 서울 서교동 홍익대 앞의 한 칵테일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바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 천연덕스레 바텐더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카페안 10여명의 손님들은 “와”하는 탄성을 터뜨리면서도 얼굴마다 ‘설마…’하는 의구심.

저녁시간마다 이 칵테일바에서는 영화 ‘칵테일’에서 톰 크루즈가 보여줬던 것같은 ‘칵테일 쇼’가 펼쳐진다. 바텐더가 신나는 댄스음악에 맞춰 현란한 동작으로 선홍색 칵테일인 ‘섹스 온 더 비치’를 만들어 남자와 동행한 여자손님에게 공짜로 선사한다. 조건은 남자 파트너와의 ‘프렌치키스’.

이날도 바텐더는 한 쌍의 남녀에게 칵테일을 건네고 키스를 권유. 그런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연인사이가 아니었던지 같이 온 남성과 입맞춤을 거부했던 것. 바텐더는 “싫다면 벌칙으로 모든 손님에게 술을 사든지, 아니면 바 안에 있는 남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키스하라”고 짖궂게 종용.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바텐더를 상대로 지명, ‘뽀뽀’를 해버렸다.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자연스럽고 능란하게….

‘무대’에 오르기를 주저 않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돌발적으로 어떤 종류의 무대에 서더라도 숨겨 놓은 끼와 속내를 서슴없이 펼쳐보인다. ‘온 국민의 무대체질화’가 진행중인 걸까.

무대의 종류는 다양하다. 동창회 회갑잔치 집들이부터 호텔 나이트클럽의 이벤트, 직장회식의 2차장소로 찾은 단란주점까지. ‘무대체질’인 사람이 노래나 춤, 말솜씨를 뽐낼 ‘멍석’은 어디든 깔려 있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무대체질화의 장애요인이 되지 못한다.

SBS의 오락프로그램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의 ‘장수퀴즈’코너. TV카메라나 마이크와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고희(古稀) 즈음의 촌로들이 개그맨 버금가는 넉살좋은 입담을 선사. 이상훈 담당PD.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삶의 여유 때문일까. 노인들도 방송출연에 따른 거부감이 거의 없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각 방송사들이 ‘시청자 참여프로그램’을 앞다퉈 제작하는 것은 일반인의 무대체질화가 밑바탕이 됐다는 것.

최근 평일 낮시간에 대학동창 3명과 경기 일산의 한 가족레스토랑을 찾은 김명희씨(35·주부). “식당측에서 ‘주부가요대전’을 시작한다고 발표하자 대학 재학시절 얌전만 빼던 애들이 앞다퉈 무대에 나가 노래실력을 발휘하는 데 깜짝 놀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KBS 2TV의 ‘TV는 사랑을 싣고’. 스타의 옛 지인을 찾기 위해 초중고교를 찾아 당시의 선생님들과 스타의 생활기록부를 뒤적거리는 장면. 리포터와 농담을 나누는 선생님들에게서 특유의 근엄함은 찾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한 마디라도 재미있게 할까’ 골몰하는 모습들.

‘무대체질’의 근저에는 일종의 ‘주인공 심리’가 깔려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조연보다 주연이 되고자 하는 이들. 무대체질인 사람이 늘어나면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D광고기획사의 광고기획담당 김홍섭대리(29). “원래 숫기가 없는 성격인데 다른 동료들은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한 가닥씩 하는 무대체질들이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박진생정신과의원의 박원장은 “수직적 사회구조가 붕괴하면서 개개인의 표현욕구가 분출되는 과정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학습’과 ‘모방’이 이를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 그는 “왕성한 자기표현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든 이들이 무대에 서길 원한다면 누가 그들을 보고 들어줄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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