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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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 초반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1954년 IBM에서 개발한, 지금은 화석처럼 변한 ‘포트란’이라는 프로그램을 밤새워 공부한 후 연필로 작성해 제출하면, 전산실의 여직원이 한 줄 한 줄 타이핑해서 천공카드를 만들어줬다. 이 종이로 된 천공카드를 집어넣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그 결과를 도트프린터로 프린트된 문서로 얻을 수 있었다.

학교 컴퓨터는 미국 대학에서 폐기 처리된 컴퓨터를 가져와 조립한 물건이었다. 이 전산실을 처음으로 운영했던 분은 물리학과 교수님이었다. 고가의 컴퓨터를 이론물리학 연구에 활용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산실이 생긴 후 몇 년이 지나자 대학에 전산학과가 생겼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또 하나 더 하자면, 당시 물리학과 실험실에는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를 제작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국내에 존재하던 유일한 장치였다. 그땐 개발도상국을 도와주는 차관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에서 고가의 장비를 살 수 있었는데, 당시 물리학과 교수님이 이 장비를 구매해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실 하나를 가득 채운 이 장비를 이용해 실리콘 웨이퍼를 길게 성장시킨 후 얇게 자르면, 그것으로 반도체 집적회로나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었다.

하루는 국내 최대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 선배가 직장 동료와 함께 실리콘 웨이퍼를 만들기 위해 학교로 찾아왔다. 학교 장비는 작은 크기의 실리콘 웨이퍼를 만들 수 있는 장치였다. 한동안 학교에서 실험하던 선배는 실험이 끝나자 발길을 끊었고, 그 무렵 교수님도 은퇴를 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만드는 장치는 고철로 폐기처분되었다. 아마도 그즈음이 우리나라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직접 만드는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원리를 최초로 개발한 화학자는 폴란드 출신의 얀 초크랄스키(초흐랄스키)다. 그의 이름을 딴 초크랄스키 방법은 1916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실수로 금속 펜을 잉크병이 아닌 금속을 녹이는 도가니에 넣는 바람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단결정을 만드는 이 독보적인 기술을 꽃피운 곳은 미국이었다. 1948년 벨 랩의 물리학자 고든 키드 틸은 초크랄스키 방법을 이용해 순수한 실리콘 단결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단결정은 반도체 연구에 시동을 걸었고 곧 트랜지스터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모든 일은 실리콘 단결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대학에 반도체 학과를 설립하는 것 자체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오래된 컴퓨터를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가 직접 분해해 배에 싣고 온 원로 교수님의 기개를 생각한다면, 반도체 학과의 설립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분명하게 정답이 보인다. 40년 전 그와 같은 유연한 생각 덕분에 지금 우리가 반도체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왜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봤으면 좋겠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과학#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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