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들고 온 北 여자축구단 [횡설수설/윤완준]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18일 23시 09분


남북 간 인적 교류가 끊기면서 벌써 6년간 개점휴업 상태이긴 하지만 휴전선을 지나 방북할 수 있는 통로는 2곳이다. 개성으로 연결되는 경의선 출입사무소,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동해선 출입사무소다. 신원과 짐을 확인하는 건 출입국 절차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무소엔 출국, 입국이라는 표현 대신 ‘출경’(出境), ‘입경’(入境)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신원을 확인할 때도 여권이 아니라 북한이 내준 초청 문서를 근거로 통일부가 발급한 방북 증명서를 보여줘야 했다.

▷이는 우리 헌법과 법률이 북한을 외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로 규정했고, 남북관계발전법은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명시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방남 역시 통일부가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이들의 방문 신청서를 승인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남북 교류를 동족 간의 일로 봤던 북한도 이런 왕래 방식을 수용했다.

▷그런데 북-미 비핵화 협상이 깨진 2019년 트럼프-김정은의 ‘하노이 노딜’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무장을 선언하더니 대남 단절 조치를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했다. 2024년 헌법에서 통일, 민족대단결 같은 표현을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한국을 ‘제1의 적대국’이라 불렀다. 곧바로 북한은 남북 회담과 교류를 담당하는 조평통 등 대남 기구를 전부 폐지했다. 통일전선부는 노동당 10국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최근 노동당 10국이 외무성으로 편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급기야 북한은 두 달 전 헌법에 남북을 경계를 맞댄 두 국가로 못 박았다.

▷이런 상황에서 1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을 찾은 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보인 모습은 새로운 딜레마를 안겼다. 통일부는 이전처럼 이들에게 방남 증명서를 발급했다. 그런데 북한 선수단은 그 증명서가 아니라 북한 여권을 내보이며 입국 심사를 받겠다고 했다. 우리가 사증을 발급하거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으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셈이 된다. 출입국청은 이를 피하려 여권은 얼굴 사진을 비교하는 용도로만 참고했다고 했다.

▷선수단은 굳은 표정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자신들의 최고 지도자가 ‘영원한 적국’이라고 규정한 곳에 와서 활짝 웃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통일부는 18일 통일백서에 ‘남북이 사실상의 두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겠다’는 대목을 넣었다. 하지만 당장 여권 문제부터 난제다. 우리 선수단이 북한에서 국제 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이 생길 경우 북한이 여권 없이는 ‘입국’을 거부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북한이 통일을 지운다고 우리도 섣부르게 두 국가 운운하다가는 그런 관계가 고착화되는 빌미를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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