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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처음 시도한 건 노무현 정부 때다. 2003년부터 일명 ‘362사업’으로 불린 핵잠 건조를 비밀리에 추진하다 무산됐다. 미국이 핵 개발 우려를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트럼프 1기 때 문재인 정부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우리가 핵잠의 동력원인 소형 원자로 기술과 잠수함 건조 능력을 갖춘 만큼 원자로를 돌릴 핵연료, 즉 농축우라늄 공급을 요청했지만 비확산 원칙을 내세운 미국에 막혔다. 그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잠 건조를 전격 승인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핵연료 공급을 공개 요청한 지 하루 만이다. ▷한국은 잠수함이 20여 척 있다. 하지만 모두 디젤엔진이다. 수시로 물 밖으로 나와야 디젤터빈을 돌릴 산소를 얻고 축전지를 충전할 수 있다. 적국에 들키기 쉽다. 핵잠은 농축우라늄이 다 탈 때까지 최대 30년간 연료를 바꿀 필요가 없다. 작전 중 물 위로 올라올 일이 없다. 최대 속도도 디젤 방식보다 3배 이상 빠르다. 북한 해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핵미사일 기지를 감시할 수 있다. 미국의 거부에도 끈질기게 핵잠 허용을 요구해 온 배경이다. ▷은밀하게 적국 근해에 접근하는 핵잠은 현대전의 판도를 가를 게임 체인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6개국만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정은이 2021년 확보를 지시하더니 올 3월 건조 중인 동체 일부를 공개했다. 핵심인 소형 원자로 기술을 확보한 정황은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파병 대가로 기술을 이전하면 완성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북한이 핵잠을 완성하면 우리 영해는 속수무책으로 뚫린다. 미국에 이어 잠수함 보유 2위인 중국은 압도적 건조 능력으로 차세대 핵잠 개발에 달려들어 남중국해, 동중국해뿐 아니라 서해까지 잠항 반경을 넓히고 있다. ‘강한 일본’을 내세운 다카이치 내각도 최근 출범하자마자 핵잠 개발을 시사했다. 미중 패권 경쟁, 북한의 핵 개발, 동맹국도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라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맞물려 동북아 안보 지형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해양 자강(自強)’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핵잠은 지금부터 만들어도 약 10년이 걸린다. 정부가 미국에서 핵연료를 공급받아 여건을 갖춘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에 속도를 높이려 한 이유다. 그런데 트럼프는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건조 장소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미 조선업이 대대적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 했다. 핵잠 건조를 쇠락한 미 조선업 재건의 기회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는 ‘마스가’의 상징이지만 잠수함 건조 시설이 없다. 우리 해군은 완성 시점이 늦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핵잠 개발에 차질이 없도록 한미가 분명히 정리해야 할 대목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더불어민주당 소속 최민희 국회 과방위원장의 딸 결혼식 논란은 국회의원의 윤리의식이 국민의 상식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종합세트’ 같다. 국정감사 기간에 국회에서 결혼식을 한다며 돌린 모바일 청첩장엔 한때 신용카드 결제 링크까지 있었다. 피감기관들이 압박을 느낄 것이 뻔한데도 결혼식 날짜를 바꾸지 않았다. 대기업과 피감기관 인사들한테서 받은 고액의 축의금은 위법 논란으로 번졌다. 그런데도 최 위원장은 사과나 반성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 이제는 딸 결혼 시점을 둘러싼 의혹까지 나왔다. ▷최 위원장 딸의 결혼식은 국감 시작 닷새 뒤인 18일이었다. 국회 사랑재에 마련된 식장엔 과방위원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피감기관들의 화환 100여 개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최 위원장 딸의 페이스북엔 ‘2024년 8월 14일부터 결혼’이라고 표시돼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해 찍은 웨딩 스냅 사진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해당 페이지는 비공개 상태다. 물론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은 나중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1년 2개월이나 지난 뒤인지, 그것도 하필 국감 중이어야 했는지 의아하다. ▷2012년 국회에 입성한 최 위원장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당선돼 8년 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그해 6월 과방위원장이 됐다. 그해 8월은 국감 기간이 아니었다. 국민의힘은 ‘국감 때 피감기관으로부터 축의금을 수금하려는 목적으로 결혼식을 늦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의문을 풀어야 할 책임은 최 위원장에게 있다. 하지만 그는 29일에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청첩장 논란 땐 양자역학을 공부하느라 신경을 못 썼다며 궤변 논란을 일으키고, 고액 축의금 문자가 드러나자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니 이젠 의혹에 대한 기본적인 해명조차 회피하는 모습이다. 그는 여당에서도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면역세포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면역세포는 적과 나를 구분해 암세포만 공격해야 하는데, 판단력을 잃고 건전한 세포까지 공격하고 있다는 논리다. 악의적 허위 조작 정보가 암세포라며 그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노무현 정신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했다. ▷최 위원장이 노무현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국감 기간에 딸 결혼식을 치러 피감기관들을 오게 해놓고 이를 ‘건전한 세포’라고 주장하는 것이 노무현 정신은 아닐 듯하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없애야 할 암세포라고 낙인찍으며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 낡은 진영 논리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같은 당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의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가치를 해하는 것도, 엿장수 마음도 노무현 정신이 아니다’라고 꼬집었겠나.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미중일을 상대로 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외교전의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관세 협상 막판까지 한국을 압박한 트럼프, 11년 만에 방한하는 시진핑, 강성 우파 다카이치까지 만만한 상대가 없다.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5개월째에도 한미 한중 한일 관계 모두 불확실성의 안갯속에 있다. 한미는 팽팽한 관세 협상이 길어지면서 정작 동맹의 큰 그림을 그릴 청사진이 흐릿하다. 한중은 ‘안미경중은 끝났다’고 선언한 한국과 ‘미국 편에 서지 말라’는 중국의 요구 사이에 서 있다. 한일은 ‘과거사를 넘어 미래지향적 협력으로 가자’는 이시바 시절의 합의가 이어질지 기로에 있다. 미중일 외교에 드리운 어슴푸레함을 얼마나 걷어낼 수 있을지에 APEC 외교전의 성패가 달렸다.대미 대중 대일 불확실성 걷어내야 첫 관문은 한미 정상회담이다. 최대 쟁점인 대미 투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면 합의를 미루는 게 낫다. 다만 그 신경전 와중에 동맹의 핵심 축인 대북 억지력 강화 논의가 뒷전으로 밀리는 건 우려스럽다.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없이 북한의 대남 핵 위협을 막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 출범 이후 한미가 이를 집중 논의한 적이 없다. 8월 정상회담 때도 트럼프의 확장억제 공약은 없었다. 미국의 대북 정책도 모호하다. 트럼프가 비핵화 없는 핵 동결에 덜컥 합의해도 된다고 보는지, 어떤 북핵 구상이 있는지 분명치 않다. 한미는 한국이 우라늄 농축 권한 등을 더 많이 갖기로 공감했다고 한다. 향후 원자력 협정 개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경계심을 높일 국내 일각의 핵무장론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트럼프가 북핵을 용인하고 핵우산 강화에도 미온적이라면 불필요한 핵무장 여론을 자극할 수 있다. 이번 회담이 비핵화·북핵 억지 현안에서도 긴밀한 공조를 확인하는 자리가 돼야 하는 이유다. 2016년 사드 보복으로 냉각된 한중 관계는 윤석열 정부를 거치며 양국 갈등을 조정할 외교가 실종됐다. 시진핑과의 회담에서 이를 되살리는 게 1차 과제다. 10년 가까이 암묵적으로 이어지며 한중 협력의 걸림돌이 된 한한령(한류 금지령) 해결도 필요하다.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중국과도 척지지 않겠다는 전략이 ‘미국의 대중 억제에 동참하지 말라’는 중국의 요구와 어디서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미중이 관세 전쟁 휴전을 시사했지만 첨단기술·안보를 둘러싼 패권 경쟁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한국의 미래가 달린 산업에서 한화오션처럼 미국과 협력하는 기업을 제재하는 일이 재발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해야 한다. 한미 군사력 견제와 무관치 않은 중국의 서해 구조물 알박기도 해양주권 차원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마지노선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두루뭉술 넘어가면 이 대통령의 말처럼 미중 두 개의 맷돌 사이에 끼어 이도 저도 못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李 정부 5년 대외 전략의 분수령 한미 관계가 안정적이라 하기 힘든 상황에서 한일 관계마저 흔들리면 외교의 우군을 잃는 셈이 된다. 다카이치와의 회담에서 한일 관계가 오락가락 트럼프 시대를 헤쳐 나갈 ‘안보·경제의 안전판’이라는 비전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일본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일 대화를 추진해 왔다.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려는 한국으로서는 대북 정책에서 협력의 여지가 있다. 한일이 각자 강점을 가진 반도체 등 첨단기술 공급망에도 협력 공간이 많다.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이런 협력을 가로막아선 안 된다는 공감대 형성이 먼저다. APEC은 국격 상승의 기회이지만 미중일과의 연쇄 회담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이재명 정부 5년 대외 전략의 향방을 결정할 분수령이기도 하다. 이를 위한 ‘외교 주춧돌’을 놓을 역량이 있는지 곧 판가름 날 것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서울 곳곳이 혐중(嫌中)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명동, 중국인 동포들이 많이 사는 대림동은 물론 잠실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노골적 혐오를 드러내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이들이 외치는 ‘하늘이 중공을 멸할 것’ 같은 구호는 표현의 자유로 넘기기엔 지나치다. 이런 피켓을 중국인 관광객들 얼굴 가까이 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 중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단체가 적지 않다. ‘중국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거나 ‘윤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주장 등 윤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보였던 ‘윤 어게인’ 구호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윤 전 대통령은 ‘중국이 선거 부정에 연루된 주권침탈세력’이라는 강변을 앞세워 12·3 불법 계엄을 정당화하려 했는데, 지금 벌어지는 혐중 시위의 뿌리가 된 셈이다. ▷한국 내 반중 정서는 이전에도 있었다. 동아시아연구원(EAI) 조사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2015년 16.1%에서 올해 71.5%로 증가했다. 2016년 중국의 사드 보복 사태를 기점으로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가 비이성적 혐오로 극단화하지 않도록 막는 게 국정이고 정치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반중 정서를 악용해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혐중을 부추겼고, 그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 유튜브를 중심으로 허위 정보가 우후죽순으로 확산됐다. ▷이런 혐오는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463만 명으로 외국인 중 1위였다. 그런데 이제 겨우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한 명동 상인들은 혐중 시위 탓에 중국인 관광객이 끊길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올해 5월엔 유엔이 공식 보고서를 통해 혐중이 심각하다고 한국에 지적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중국계 사람들에 대해 온·오프라인에서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힌 것이다. ▷한국도 혐오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다. 일본에선 재일교포들이 줄곧 차별과 혐오에 시달렸다. 2013년경부터 본격화된 우익들의 혐한 시위엔 ‘조선인은 쓰레기’ 같은 극단적 표현이 난무했다. 미 조지아주 공장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도 외국인들이 미국인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지지 세력 마가(MAGA)의 왜곡된 외국인 혐오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 삐뚤어진 외국인 혐오가 기승을 부리게 놔둘 수 없는 이유다. 독일,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선 국적·인종 등을 이유로 증오를 선동하면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한다. 우리도 외국인 혐오를 근절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때가 됐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최근 패널인증제를 들고나왔다. 당 대표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뽑아 방송에 패널로 출연시키겠다는 취지다. “방송에서 의견을 가장해 당에 해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건 해당행위”라며 제명까지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방송에 나가 당을 비판하는 인사는 내쫓을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은 셈이다. 당내에선 “전두환 때 보도지침”이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후 열흘 가까이 별말 없던 국민의힘은 15일 새 대변인단 명단을 발표했다. ▷원외 인사들로 9명을 꾸렸는데, 그중 5명이 처음 만든 미디어대변인이다. 이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 반탄 인사나 친윤계로 분류된다. 국민의힘은 방송에 집중 투입해 당의 입장을 신속히 전달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패널인증제라는 명칭을 쓰진 않았지만 이들이 TV와 라디오에 출연하는 ‘공식 스피커’라는 뜻이다. 당내에선 패널인증제의 신호탄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패널 출연 여부는 방송사가 정할 일이다. 당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특정 인물들만 출연시켜달라고 방송사에 요구한다면 그 자체로 언로를 막겠다는 시도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장 대표가 패널인증제를 꺼내 든 건 강성 당원들의 ‘윤 어게인’ 주장에 올라타 당선된 이력과 무관치 않다. 실제 강성 당원들은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주장해 온 인사 30명을 ‘위장 우파’로 규정하고 패널 배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일종의 ‘출연 불가 블랙리스트’인 셈인데, 그렇게 다 쳐내고 나면 방송에 나와 하는 말은 앵무새처럼 당 대표와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금 국민의힘이 처한 상황이다. 당장 장 대표부터 17일 윤 전 대통령 면회를 신청한 사실을 밝혔다. 불법 계엄을 반성하고 변화를 약속해도 모자랄 판에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탄핵 반대 당론을 비판한 인사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뜻도 내비치고 있다. 일부 당 지도부는 탄핵이 부당하다며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석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패널인증제는 당 지도부가 이런 퇴행적 모습을 보여도 국민의힘 패널들은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들린다. ▷윤 전 대통령은 언론의 비판을 외면하고 극우 성향 유튜브에 심취하다 독단에 빠졌다. 국민의힘도 극우 성향 유튜버들은 가까이하면서 당내 비판은 봉쇄하려 하고 있다. 보수가 이제라도 외연을 넓히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부터 보장하는 게 먼저다. 사실 국민의힘은 3년 전 여당 시절에도 패널인증제와 비슷한 방침을 추진한 적 있다. 방송사들에 공문까지 보냈다가 언론을 통제하려 한다는 지적에 흐지부지됐다. 이를 다시 운운하는 것 자체가 국민의힘이 여전히 ‘윤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더불어민주당 당원들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국회의장 후보 경선이다. 당원들은 ‘명심’이 추미애 의원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민주당 의원들은 초강성인 추 의원을 비토하고 우원식 의원을 후보로 선출했다. 당원들은 발칵 뒤집혔다.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2만 명 넘게 탈당했다고 밝힐 정도였다. 깜짝 놀란 그는 당원 권한을 2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당 대표가 강성 당원들을 두려워할 수준이 된 것이다.입법 독주 정당화의 논리, 당원 그전까지만 해도 ‘강성 당원=개딸(이재명 팬덤)’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선관위에 따르면 이 대표가 20대 대선 후보로 선출된 2021년 민주당이 신고한 당원 수는 약 485만 명이다. 1년 전에 비해 80만 명 늘었다. 그해 당비를 납부한 당원 수는 약 130만 명으로 2020년에 비해 40만 명이나 증가했다. 이 대표가 대선 주자로 부상한 뒤 당원이 급증했으니 새로 들어온 당원 상당수를 친명 팬덤이라 생각할 법했다. 하지만 집단 탈당 사태는 강성 당원들이 이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 단순한 ‘친명’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당시 한 친명 의원은 권리당원들의 실체를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적대감’으로 설명했다. 그 도구로 이재명을 선택한 것이기에 ‘싸우는 이재명’이 아니면 ‘이재명의 민주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협치하라는 주장은 현실을 정말 모르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됐다. 협치를 강조하면 친명계라도 비명계 의원들을 조리돌림 할 때 쓰던 멸칭인 ‘수박’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강성 당원들에게 ‘수박’은 단지 비명이어서가 아니라 극렬히 싸우지 않는 의원들에 대한 경멸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민주당 대표 경선 때 정청래 대표를 겨냥한 ‘수박’ 공세가 먹히지 않은 이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과거 이 대통령을 비판한 정 대표의 발언 등이 인터넷에 나돌았지만 대세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찐명’ 박찬대 의원과의 격차를 벌린 건 협치 여부였다. 정 대표는 경선 초기부터 협치보다 내란 척결이 먼저라고 했고, 야당과 협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박 의원은 강선우 여성가족부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했다가 ‘수박’으로 몰렸다.강성 당원 요구가 국익과 다르다면 정 대표는 그 강성 당원들에게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찾으려는 듯하다.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며 제1야당과 눈도 안 마주친다. 원로들이 당원만 봐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지만 연일 국민의힘 해산을 외친다. 친명과의 거리감 때문에 당내 의원들 지지 기반이 약한 점을 의식한 듯 강성 당원들과 직접 소통하며 ‘정청래 팬덤’을 확대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정 대표는 국회에 불려온 증인에게 호통 치고 국민의힘 의원들과 볼썽사나운 설전을 벌이던 과거의 정청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재명 대표 때처럼 야당 대표가 아니라 국정의 책임을 대통령과 나눠 진 집권 여당의 대표다. 야당이 아무리 형편없다 해도 없는 존재 취급하면 정 대표가 그토록 비판해 온 윤석열 전 대통령의 야당 무시와 다를 게 없다. 당장 여당이 약속한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만 해도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통과된다. 국민의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국회 문턱을 넘기 어렵다. 이제 정 대표는 강성 당원들에게만 부응하는 쉬운 길을 갈지, 강성 당원들의 요구가 국익과 다르다면 설득하는 어려운 길을 갈지 갈림길에 놓였다. 집권 여당 대표의 막중한 책임을 인식한다면 후자가 ‘수박’ 비난을 들어가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정 대표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진격하기 직전 먼저 동부 돈바스를 공격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곳이다. 우크라이나가 이 지역의 러시아인들을 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엔 돈바스가 키이우 등 주요 도시로 연결되는 철도 등 교통의 허브, 즉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이 있었다. 이곳을 러시아가 완전히 점령하면 언제라도 수도로 쳐들어갈 수 있는 진격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돈바스를 완전히 포기하라. 그러면 현재 전선에서 공격을 멈추겠다’고 제안했다. 우크라이나로선 쉽게 응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침략당한 나라보다 침략자 푸틴의 ‘돈바스 요구’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럽 정상들에게 전하는 ‘거간꾼’ 역할을 자처했다. 대선 전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공언해 온 트럼프는 전쟁을 빨리 끝내 ‘평화 중재자’ 이미지를 굳히려 하고 있다. ▷트럼프는 돈바스를 넘겨받는 대가로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이라는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전쟁 전 젤렌스키는 안전 보장을 위해 나토 가입을 추진했고, 푸틴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이라고 비난하며 침공의 또 다른 명분으로 삼았었다. 트럼프는 푸틴과 회담 뒤 유럽 정상들에게 ‘유럽의 안보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푸틴이 결사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문제는 트럼프가 제시한 안전 보장안으로 우크라이나가 안심할 수 있느냐다. 미국은 한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나토가 공동 대응하는 ‘나토 조약 5조’와 비슷한 집단방위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데 푸틴도 동의했다고 했다. 하지만 푸틴은 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안보 보장 약속에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1994년 핵무기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19일 새벽(한국 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회동하는 젤렌스키는 힘겨운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트럼프는 ‘영토를 포기하고 안전 보장 약속을 받으라’고 종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회담 전 공언했던 대러시아 제재에 대해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실행할 생각이 없음을 내비쳤다. 젤렌스키가 트럼프-푸틴의 조건을 수용한다면 트럼프에겐 노벨 평화상을 노릴 새로운 기회가 된다. 불법 침공의 가해자는 웃고, 거간꾼은 잇속을 챙기며, 피해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 안보를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냉혹한 장면이 펼쳐질지 지켜볼 일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20일 일본 국회 참의원(상원) 선거를 통해 총 15석을 확보한 참정당은 일본인들에게도 그리 낯익은 정당은 아니었다. 교사를 하다 정치에 뛰어든 마흔여덟 살 가미야 소헤이(神谷宗幣)가 창당한 지 5년밖에 안 됐다. 가미야 자신도 3년 전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에 선출된 뒤에야 중앙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가미야는 당시 ‘유대계 국제 금융자본 세력이 코로나 공포를 과장하며 마스크 착용을 호소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펼쳤다. ▷그렇게 극우 성향의 군소정당에 머물러 왔던 참정당은 이번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단독으로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갖게 됐다. 참정당의 약진 속에 집권 자민당은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과 중의원(하원) 모두에서 과반을 빼앗겼다. 자민당 독주를 상징하는 ‘55년 체제’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참정당은 ‘일본인 퍼스트’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세계화가 일본 빈곤의 원인’, ‘외국인들 때문에 일본인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는 주장도 꺼냈다. 일본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혜택을 외국인들이 빼앗아 간다는 논리였다. ▷참정당의 외국인 관련 주장에는 사실이 아닌 대목도 많았다. 가미야는 유세에서 근거도 없이 ‘외국인들이 뭐든 위조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에 그의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소셜미디어엔 ‘외국인이 늘어 치안이 나빠지고 있다’ 등 외국인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낸 글들이 올라왔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출구조사를 해보니 참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참정당에 투표했다는 응답자의 42%가 4050세대였다. 오랫동안 취업난에 시달려 와 일본에서 ‘취업 빙하기 세대’ 또는 ‘로스 제네’(잃어버린 세대)라 불리는 세대다. ▷일본 언론은 이들처럼 고물가와 실업, 양극화 등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유권자들이 그 원인을 외국인에게 세금을 쓰는 정부 때문이라고 돌리는 참정당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분석했다. 일본은 지난달에만 쌀값이 100% 폭등했다. 고물가로 실질임금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정작 집권 자민당은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염증이 갈수록 커져가는 틈새를 극우 정당이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참정당의 ‘일본인 퍼스트’는 일본판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똑 닮았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혜택이 외국에 다 돌아가고 있다며 일자리를 잃고 임금이 낮아진 백인 중산층과 블루칼라의 분노를 자극했다. 올해 독일 총선에서 반(反)이민 국경 통제를 주장한 극우 정당이 2위를 차지한 이면엔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한 독일의 망가진 경제가 있었다. 경기 침체의 책임을 다른 나라에 전가하는 이런 자국 우선주의는 외국인에 대한 극단적 혐오를 양분 삼아 자라났다. 음모론과 포퓰리즘이 뒤섞인 참정당의 배외주의도 예외가 아니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2010년 한나라당 시절부터 10년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등장한 것은 8번이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박근혜 비대위, 2020년 총선 참패 뒤 꾸린 김종인 비대위 등이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2022년 이후 최근 3년은 더 자주 비대위가 등장했다. 22일 출범한 송언석 비대위는 그 3년간 7번째였다. 그사이 선출된 당 대표는 김기현, 한동훈 전 대표 등 2명뿐이었다. ▷김 전 대표가 9개월, 한 전 대표가 5개월을 했으니 당에 정식 대표가 있었던 기간은 1년 2개월에 불과하다. 민주화 이후 다섯 번 집권했고 원내 1, 2당을 오간 정당의 리더십이 붕괴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런 혼란은 윤석열 전 대통령 집권 시기와 겹친다. 그 시작은 윤 전 대통령과 갈등했던 이준석 대표를 밀어낸 뒤 잇따라 들어선 주호영, 정진석 비대위였다. 훗날 윤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 친윤 정 위원장의 당시 일성은 무조건 대통령 뜻을 따르자는 “당정 일체”였다. ▷돌이켜 보면 친윤이 똘똘 뭉쳐 대통령을 싸고돈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 정 위원장 체제 때 경선 초반 지지율 꼴찌였던 김기현 의원은 친윤계의 조직적 지원 덕분에 대표가 됐다.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총선 때 김건희 여사 문제 등으로 윤 전 대통령과 충돌했지만 당초 한 위원장 추대로 분위기를 몬 것은 친윤계였다. 대선 후보 교체 시도 파동으로 물러난 친윤 권영세 위원장까지 대부분 지도부는 ‘윤심’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49일의 짧은 임기를 마친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물러나며 “기득권이 당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날 선 표현으로 친윤계를 겨냥한 배경이다. 당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윤 전 대통령, 그에 영합해 당권을 차지하려 했던 친윤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당을 ‘용산출장소’로 전락시켰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김 전 위원장은 ‘공천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줄 세우기 정치’, ‘권력자에 기생하는 측근정치’ 등을 낡은 정치 폐습으로 꼽았는데, 모두 친윤계가 보였던 모습과 무관치 않다. ▷김 전 위원장은 그런 정치를 타파하고 기득권이 와해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친윤이 여전히 주류를 자처하는 국민의힘에 그런 동력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다. 대선 때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안철수 의원이 어제 당 쇄신을 지휘할 혁신위원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그 역시 김 전 위원장처럼 당내 세력이 약한 비주류다. 안 의원은 국민의힘이 사망 선고 직전의 코마(의식 불명) 상태에 놓여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가 ‘얼굴 마담’을 넘어 의사 출신답게 보수 재건의 진짜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딸 주애가 처음 공식석상에 나타난 건 2022년 11월이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장에 흰색 패딩 점퍼에 빨간 구두를 신고 아빠 손을 잡은 채 등장했다. 북한은 “존귀하신 자제분”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선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국가정보원은 그 뒤로도 1년 가까이 후계자로 보지 않았다. 김정은은 2010년, 2013년, 2017년생으로 추정되는 세 자녀가 있고, 주애는 둘째인 데다 첫째가 아들이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인 북한에서 첫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어린 딸을 ‘백두혈통’의 후계자로 점찍을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그 판단은 2023년 말부터 유력한 후계자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주애는 그해 하반기 김정은만 입고 쓰던 가죽코트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타났고, 후계자나 수령에게만 쓰는 ‘길을 인도하다’라는 뜻의 ‘향도’, ‘샛별 여장군’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국정원은 지금은 첫째가 아들인지 분명치 않다고 설명한다. ▷후계자 수업을 받는 듯한 행보로 존재감이 커진 주애는 그제 북한이 공개한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준공식에도 등장했다. 열두 살 주애는 스위스 명품 까르띠에 제품으로 추정되는 시계를 찼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키가 170cm 정도인 김정은과 비슷할 정도로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 부인 리설주가 1년 반 만에 나타나 주목됐는데, 더 눈길을 끈 건 김정은, 주애 부녀와의 거리였다. 나란히 걷는 부녀보다 3, 4m 처진 채 뒤따랐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오빠 뒤 멀찍이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려던 것과 비슷하다. ▷주애 곁에서 파안대소하는 김정은도 눈에 띄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고령의 장성들에게 주눅 들지 않는 등 자신을 닮은 주애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한다. 미국에 망명한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은 김정은이 여덟 살 때 장성들을 무릎 꿇린 뒤 충성 맹세를 받았다고 했다. 주애가 김정은의 총애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후계자로 확정된 건 아니다. 김정은도 스물여섯에 공식 후계자가 됐고 그 전엔 이복형제 김정남과 권력투쟁을 겪었다. ▷누굴 후계자로 하건 북한은 유례없는 3대 세습에 이어 4대 세습을 향해 가고 있다. 북한에는 후계자의 3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다음 세대’, ‘비범하고 뛰어난 예지력’, ‘걸맞은 업적’이다. 세 번째를 위해 대미, 대남 문제든 군사, 경제든 주민들에게 선전해 먹힐 일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은 2010년 서해상 연평도 포격 도발을 후계의 치적으로 선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으로 후계자의 입지 강화 시도가 우리를 겨냥한 도발일지, 깜짝 협상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애가 자주 등장하는 지금 평양의 후계 구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우리 외교의 위치를 시계 방향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미국이 3시라면 중국은 9시다. 미중이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미국에 가까우면서 중국과 아주 멀지 않은 1시나 1시 반으로 좌표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동맹인 호주와 일본은 2시 반과 2시, 미국 견제용 브릭스와 중국 견제용 쿼드에 참여하는 인도는 12시 반 정도로 봤다. 그가 방향과 함께 강조한 건 일관성이었다. 시침이 크게 왔다 갔다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반대 쪽을 설득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방향·일관성 다 불안정했던 韓 외교불행히도 우리 외교는 방향과 일관성 모두 불안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진핑, 푸틴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오른 것은 논쟁적이었다. 12시 방향에 가까웠다. 오래지 않아 한중 관계는 사드 배치로 악화 일로였다. 초장부터 우리 안보 문제라고 당당히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중국에 ‘뒤통수 맞았다’는 비난의 빌미를 줬다. 시침은 크게 흔들렸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 방중 때 중국에 저자세였다. 사드 갈등을 봉합했지만 미국에 친중 정권이라는 의심을 남겼다. 시침은 다시 12시를 바라봤다. 임기 말 한미 정상회담 성명에 대만, 남중국해 문제가 들어갔다. 중국 견제 동참으로 해석된 이 변화에 중국은 “불장난하지 말라”고 발끈했다. 시침은 다시 크게 흔들렸다.윤석열 전 대통령은 시침을 거의 2시까지 돌렸다. 미국의 중국 포위에 적극 동참했다. 그의 대만 문제 발언에 중국은 “불장난하면 반드시 타 죽는다”며 거칠게 반발했다. 자유 진영의 든든한 일원이 돼야 중국과 당당히 상대할 수 있다는 논리였는데, 정작 중국을 대화 상대로 설득할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이 10년은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그 한복판에서 외교 좌표를 설정해야 할 때였지만 정권마다 한쪽으로 경도되거나 오락가락하며 허약한 실력을 드러냈다. 그 결과는 미국의 의심이거나 압박이었고, 중국의 반발이거나 보복이었다. 미중 사이에 끼인 우리의 처지는 더욱 불안해졌다.우리도 ‘외교의 마지노선’을 갖자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일본 중국 순으로 정상 통화를 했다. 한미일 협력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중국 때리기에 앞장서지는 않겠다는 방향이 엿보인다. 그런 이 대통령도 지난날 언행을 되짚어 보면 외교 시침이 크게 요동했다. ‘셰셰’ 발언, 한미일 협력 및 한일 관계에 대한 거친 비판은 그 지향이 12시를 향하는 것으로 비쳤다. 대선 과정에서 변침한 것은 그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일관된 원칙이 될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동북아에서 각기 상대의 영향력을 밀어내려는 미중 대립의 강한 척력(斥力)은 한국을 각자의 방향으로 끌어당기려는 인력(引力)을 더욱 억세게 만들고 있다. 안미경중은 안 된다는 미국의 경고엔 한국에 안보와 경제 모두 중국 억제 전선에 적극 동참하라는 다그침이 깔렸다. “상호 핵심 이익과 중대한 우려를 존중하라”는 시진핑 발언엔 대만 문제 등 중국 때리기에서 벗어나라는 압박이 보인다.이럴수록 일관성이 중요하다. 1시든 1시 반이든 방향을 정했다면 진폭이 커선 안 된다. 미국 앞에선 미국에 부응하고, 중국 앞에선 중국에 영합하는 임기응변의 줄타기 외교는 불신을 자초한다. 시침을 크게 흔들지 않으려면 특히나 대만, 주한미군 등 민감한 현안마다 원칙을 정교하게 세워야 한다. 그 원칙에 디딘 유연한 외교가 반복될수록 무게감이 생기고, 우리도 ‘여기만큼은 넘지 말라’는 외교의 마지노선이란 걸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우리 결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존중받고 설득할 수 있다. 그 무대에서 대통령의 언사 하나하나가 대선 전과 달리 천금같이 무거워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1937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높은 인기를 업고 재선된 직후다. 대법원이 거듭 뉴딜 정책은 위헌이라 판결했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루스벨트 대통령은 법을 바꿔 대법관 수를 늘리려 했다. 여당이 상·하원 모두 압도적 다수이니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 계획은 제동이 걸렸는데, 여당 의원들이 반대한 결과였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해도 대법원 재구성 계획은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어떤 대통령도 사법기관을 입맛대로 바꾸려 하지 않은 절제의 규범을 루스벨트가 깨려 했기 때문이었다.“루스벨트 지지해도 그 계획은 반대”대통령이 잘못된 길에 들어설 때 집권 여당의 견제가 그 경로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에선 오히려 여당이 대통령 뜻대로만 움직이며 브레이크 없는 입법 독주로 내달린 적이 많았다. 문재인 정부 때 총선 승리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은 부동산 관련 법 등 논란의 법안들을 국회 절차를 무시하며 속전속결로 통과시켜 반발을 불렀다. 이는 이듬해 여당이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됐다.지금 민주당은 5년 전 민주당보다 더 사납게 달릴 태세다. 대통령 당선 시 형사재판 면제 법안, 허위사실공표자 대상 축소 법안 등 이른바 ‘이재명 방탄법’의 대선 직후 처리를 벼른다. 당선이 확실한 이재명 후보가 일극체제란 말이 나올 정도로 민주당을 장악한 것과 무관치 않다. 개딸로 대변되는 이재명 팬덤은 민주당이 아니라 이 후보에게 열렬하다.그런데 민주당은 이제 3년 만에 처음으로 이 후보 아닌 새 당 대표를 뽑아야 한다. 가장 쉬운 길은 ‘이재명당’일 때의 민주당이다. 새 대표가 누구든 대통령 뜻에 따라 독주를 불사하는 거여(巨與)에 강성 이재명 팬덤은 환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주당을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수렴해 정책과 입법으로 실현하는 국정의 공동 책임자’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입법, 행정 권력이 한몸처럼 서로 견제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에 빠진다. 대통령이 권력을 절제하지 못하거나 민의를 거스를 때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수적 우위를 앞세운 힘의 정치에서 벗어나 자제력을 보인다면 민주당은 한때 이재명 팬덤의 분노를 살지언정 국정 성공의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여야 제 모습 찾아야 정당정치 회복민주당에 그 길이 쉽지 않은 만큼 3년 만에 소수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이 정당의 제 모습을 찾는 길은 더욱 험난해 보인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독단을 막기는커녕 그 그늘에서 당권 투쟁의 패싸움을 벌이다가 스스로 무너졌다. 윤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당 지도부가 12차례 바뀌었다. 그 결과 국민의힘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정당이 돼버렸다.지금도 국민의힘은 당권 투쟁으로 바쁜 모습이다. 계파의 사익에 급급한 파당(派黨)은 공동체의 비전 대신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를 택하기 마련이다. 대선 이후에도 대선 때처럼 반(反)이재명 구호만으로 수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야당은 반대자이지만 입법 권력 없는 소수 야당은 보이콧 정치만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집권 세력과 경쟁하며 적대를 넘어서는 대안 세력이 돼야 국민의 다음 선택을 기대할 수 있다.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제가끔 가시밭길에 섰다. 쉬운 길을 가겠다면 대선 전처럼 하면 된다. 어렵더라도 여당이 대통령을 견제하며 야당을 대화와 타협의 파트너로 삼고, 야당이 대통령과 여당을 집권 경쟁의 상대로 존중하는 정당정치 복원의 길로 가야 한다. 정당이 제 기능을 찾지 못하면 민주주의 회복의 대선 의미도 퇴색된다.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 그저 또 한 번의 선거가 지나간 셈이 된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선거 때면 어김없이 집 앞 우편함에 선거관리위원회가 발송하는 후보들의 선거공보물이 도착한다. 하지만 우편함에 눈길을 주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6·3 대선을 불과 하루 앞둔 2일까지 ‘어떤 아파트와 오피스텔엔 우편함 절반 이상에 공보물 봉투가 그대로 꽂혀 있다’거나, ‘어떤 아파트에선 뜯지도 않은 공보물 봉투들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줄줄이 발견됐다’는 보도들이 잇따른 배경이다. ▷막상 공보물을 열어봐도 빳빳한 종이에 화려하게 인쇄된 후보들의 공약엔 ‘어떻게’는 잘 보이지 않고 ‘뭘 하겠다’는 장밋빛 약속들만 나열돼 있을 때가 많다. 그 내용이 후보들의 TV토론회나 언론의 공약 분석,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들보다 더 친절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선 땐 두 차례 공보물을 보낸다. 첫 공보물은 최대 16쪽까지 만들 수 있는 책자형이고 두 번째는 전단형이라고 부르는 1쪽짜리다. 전단형은 책자형을 요약한 수준이라 굳이 두 번 보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러니 아예 공보물을 보지도 않고 버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선관위가 지난달 유권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공보물·벽보로 후보 정보를 얻는다는 응답은 3.3%에 그쳤다. TV 대담·토론회 및 방송 연설(36.7%),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20.2%), 언론 보도(17.1%), 인터넷(14.2%)에 비해 한참 낮았다. 사실상 공보물로 후보를 선택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관위는 이번에 지난 대선보다 50억 원 늘어난 약 370억 원을 공보물 발송 예산으로 편성했다. 선관위가 이번 대선 기간 두 차례 우편으로 부친 공보물은 책자형과 전단형 각 2400만 부를 합쳐 약 4800만 부에 달한다. 이뿐 아니다. 지난 대선 기준으로 보면 각 정당이 두 차례 공보물을 제작하는 데 후보당 많게는 50억 원 가까이 들었다. 대선 득표율이 15%를 넘기면 선거가 끝난 뒤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으니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공보물을 만들고 보내는 것이다. 소각 등 버려진 공보물 처리에 드는 지자체 예산까지 감안하면 읽지도 않는 인쇄물에 수백억 원 혈세를 헛되이 쓴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고령층 등 디지털 접근성이 떨어지는 계층을 생각해 종이 공보물을 완전히 없애는 건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효용성도 불분명한 인쇄 공보물에 세금을 쏟아붓는 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국회와 선관위에선 온라인 공보물 도입, 인쇄형 공보물 축소 방안 등이 거론된다. 은행이 고지서를 모바일이나 이메일로 받을지, 우편물로 수령할지 묻듯 유권자들이 선택하게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성인의 98%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모바일 시대에 공보물만 아날로그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12·3 비상계엄을 겪으며 유명해진 책이 하버드대 교수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난다.” 중남미 동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3년 전 대선 때 윤 전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이들 중에서도 그 선택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48%대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계엄이 잘못됐다며 탄핵에 찬성한 여론이 60∼70%에 달했다. 이들에겐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무너진다는 말이 더 와닿을지 모르겠다.대통령 선출도 심판도 ‘국민의 의사’그러나 선거는 2년 뒤 또 있었다. 총선은 역대 최악의 여당 참패로 끝났다. 윤 전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 운영과 불통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돌려세웠고, 그 결과 심판받았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이렇게 짚었다. ‘피청구인은 2년 동안 자신이 국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그리하지 않았고 민심과 멀어졌다. 헌재는 또 이렇게 지적했다. ‘총선 결과가 피청구인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더라도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해선 안 됐다.’윤 전 대통령을 국정 최고 책임자에 오르게 한 것이 ‘국민의 의사’였듯, 윤 전 대통령을 심판한 것도 ‘국민의 의사’였다. 윤 전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위헌적 계엄 폭주로 내달렸을 때, 국회가 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외면한 ‘국민의 의사’가 국회를 야당 과반으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선거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주권을 국민의 대표에게 위임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도무지 실감되지 않던 이들도 계엄의 밤엔 선거로 드러난 서릿발 같은 주권으로 지도자의 민주주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증거를 목격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붕괴한다는 하버드대 교수들의 지적은 적어도 이 대목에선 틀렸다.유권자는 ‘민주주의 경기장’의 심판물론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정작 선거가 끝난 뒤 공복이 아니라 주인처럼 행세하고 국가권력과 의회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때면, 시민들이 자유로운 건 오직 선거 때뿐이고 선거가 끝나는 순간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는 루소의 말이 현실과 더 가깝게 들릴지 모른다. 상대를 존중하는 관용, 권한을 남용하지 않으려는 절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금의 정치를 보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느 한쪽은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건지 비전이 흐릿하고, 어느 한쪽은 행여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독식할 걱정이 들면, 이들에게 과연 내 주권을 맡겨야 할지 선뜻 투표장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그러나 유권자들의 손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선거는 한 번이 아니라 때마다 돌아온다. 유권자는 무한히 되풀이되는 민주주의 경기장의 심판이다. 룰을 어기거나 룰 안에서라도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팀은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없도록 레드카드를 들 수 있다. 단 한 번의 경기만 있다면 선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 여기겠지만 다음 경기에도 나오고 싶다면 심판의 휘슬에 곤두설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선택받더라도 국민의 뜻을 함부로 독점하면 다음엔 매섭게 심판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도록 계속해서 투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를 통해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는 주권자의 의사를 정치인들이 얕보지 못할 것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 집권 기간 국가안보실장이 세 번 바뀌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윤 전 대통령 해외 순방 브리핑 때마다 실장을 제쳐두고 브리핑을 도맡았다. 거침없는 행보에 실세라는 말이 들렸지만 일본의 과거사 사과에 대해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는 부적절한 발언 등 설화를 종종 일으켰다. 윤 전 대통령 탄핵과 파면 국면에서 잠잠했던 그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백악관 인사와 나란히 서 환하게 웃는 사진과 함께였다. ▷김 차장 옆 인물은 앨릭스 웡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이었는데 국가안보실은 두 사람이 지난달 25일 백악관에서 만났다고 했다. 두 사람이 협의했다는 내용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역량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협력 방안’과 ‘양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중심이 돼 정부 차원의 조선업 협력을 진전시켜 나가는 방안’이었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NSC 중심의 조선업 관련 워킹그룹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조선업은 다음 정부가 마무리하기로 한 한미 관세 협상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런데 파면된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 차장이 난데없이 미국에 가 이 현안을 논의했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김 차장이 웡을 만난 시점은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에서 한미 2+2 관세 협상을 벌인 다음 날이었다. 정부 협상팀이 이미 조선업 협력의 비전을 밝히며 의제로 올린 현안을 대통령실이 지원도 아니라 중심이 돼 추진하겠다고 불쑥 발표해 버린 셈이다. 주한미군 문제 역시 미국이 그 역할을 중국 견제로 재조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며 안보 틀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이슈라 김 차장이 섣불리 의제로 꺼낼 주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김 차장이 방미 전 다른 부처와 사전에 상의했는지도 불확실하다. 최 부총리는 어제 국회 상임위에서 김 차장의 방미에 대해 “언론에 보니까 그렇더라”고 했다. 가뜩이나 민감한 정부 교체기에 행여 미국에 잘못된 신호를 줄까 당국자들이 조심하는 판에, 김 차장은 안보부터 경제 통상까지 협상팀과 상의했는지도 불분명한 협의를 백악관과 했다니 ‘월권’ 논란은 물론이고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실이 미국의 보복관세 발표 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방미 여부를 논의했다거나 한국이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체코를 한 대행이 방문하는 걸 검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 차장의 ‘오버’가 혹시 한 대행의 대선 출마용 업적을 쌓으려는 시도 아닐까 하는 의심은 그저 오해이길 바란다. 지금 대통령실이 할 일은 인수위 없이 시작하는 다음 정부에 국정 현안을 차분히 인계하는 것이지 돌출 행동으로 불필요한 분란을 만드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윤핵관’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도 실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청와대 이전 TF팀장을 맡은 것은 물론 인수위 인사검증팀 구성에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 직을 맡지 않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 소통하며 권부 사정에 밝았다. 지난해 하반기에도 ‘누가 친윤 핵심이냐’는 질문에 친윤 의원들조차 윤 의원을 꼽을 정도였다.친윤 핵심에 공천·인사 청탁 의혹 그런 그가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 씨 의혹의 주요 관련자로 이름이 오른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전 씨가 윤 의원에게 인사 청탁 문자를 보낸 건 2022년 인수위 출범 나흘 뒤였다. 자신이 인사를 3명 부탁했는데 1명은 들어갔고 2명은 확정이 안 됐다는 재촉성이었다. 그런데 전 씨가 인사를 부탁했다고 문자에 밝힌 의원은 윤 의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핵심 친윤 의원 2명의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 전 씨가 윤 전 대통령 집권 초부터 정권 핵심들에게 인사를 청탁해 1명은 성사될 정도의 위치였다는 셈인데, 이 말고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 씨는 그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윤 의원과 또 다른 친윤 핵심 의원에게 군수 후보 공천을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해당 인사가 공천을 받았다. 전 씨 휴대전화엔 처남 몫으로 A 행정관이 대통령실에 들어갔다는 취지로 의심되는 문자도 있다. 전 씨 처남은 대선 후보 시절 윤 전 대통령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천은 물론 공공기관 임원, 검찰, 경찰 인사를 청탁받은 문자에 이력서까지 전 씨 휴대전화에 수두룩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전 씨가 도대체 어떤 위상이었기에 친윤 핵심들에게 접근하고 청탁이 쏟아졌는지 궁금해진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캠프를 찾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전 씨가 논란이 되자 그와 인사 정도 한 사이라고 해명한 바 있지만 최근 밝혀진 정황은 그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전 씨가 검찰 조사에서 윤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고 진술했고, 윤 전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 씨는 지난해 9∼12월 10차례 전 씨와 통화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 씨에게 김건희 여사의 전시기획사 고문 명함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의문은 더 커진다. 윤 전 대통령 부부와의 관계를 과시하지 않고서야 무속인이 정치 브로커처럼 여기저기서 공천이며 인사 청탁을 받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청탁들이 성사됐다면 불법 공천·인사 개입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돈이 오갔다면 불법 정치자금이 될 터인데, 검찰이 수사로 밝혀야 할 것이다.정권 수준 보여주는 법사폰·황금폰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될지 모를 이런 내용들은 검찰이 전 씨의 이른바 ‘법사폰’을 포렌식으로 복원한 뒤 쏟아지고 있다. 뭔가 익숙한 광경이다. 명태균 씨 의혹도 명 씨의 ‘황금폰’이 열리자 분명한 정황과 사실들이 흐릿했던 의혹의 겉옷을 벗었다. 윤 전 대통령이 친분을 부인했지만 관계를 의심할 새 정황이 드러나는 것도, 각종 공천과 인사, 이권 개입 의혹이 잇따르는 것도 비슷하다. 명 씨 의혹에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줄줄이 거론된 것처럼 전 씨 의혹에 친윤 의원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정체가 무속인이든 정치 브로커든 진짜 얼굴이 무엇이든 권력 주변에 부나비처럼 달려들어 기생하며 그 곁불을 쬐려 했다는 본질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권력 중심에 가까운 양 행세하며 잇속을 챙기려 한 듯한 의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여기저기 촉수를 뻗치며 버젓이 활개 친 정황은 이 정권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준다. 그들과 어떤 관계였든 그 관계를 분명히 끊어내지 못한 권력자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2008년 3월 열린 첫 국무회의에는 전임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됐던 행정자치부 장관 등 장관 4명이 참석했다. 헌법에 국무회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하고 최소 15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런데 당시 장관 후보자가 연달아 낙마해 15명을 채우지 못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전임 정부 장관들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현 내각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뺀 국무위원 수가 딱 15명이다. 국무위원 19명 중 국방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장관 등 4명이 사퇴해 공석이다. ▷어디서 장관을 꿔 올 수도 없는 현 정부는 한 명이라도 더 사퇴하면 헌법상 국무회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는 위헌 상황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국무회의 효력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정국에서 가장 먼저 사퇴한 이는 ‘계엄 2인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면직 당일 열린 국회 긴급 현안 질의에 김 전 장관이 출석해 계엄 전말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왔다. ▷김 전 장관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동문인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의 사퇴 경위도 비슷했다. 이 전 장관이 계엄 옹호 발언 등으로 자신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다음 날 사의를 밝히자마자 윤 전 대통령이 면직을 재가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윤 전 대통령이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상태에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라 의도가 더욱 의심됐다. 이후 이 전 장관은 계엄 당일 윤 전 대통령의 쪽지를 본 뒤 언론사 단전·단수를 지시한 의혹이 드러나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윤 전 대통령 파면 뒤 김문수 전 노동부 장관이 대선에 출마하며 사퇴해 한 명 더 줄었다. 여가부 장관 자리는 지난해 김현숙 전 장관이 잼버리 파행으로 물러난 뒤 윤 전 대통령이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해 1년 넘게 비었다. 4명 공석 다 윤 전 대통령이 초래한 것인데, 남은 장관을 15명으로 유지해도 국무회의 참석자가 의사정족수 11명이 안 돼 회의조차 열 수 없는 상황을 정부가 우려할 지경이 됐다. 통상 화요일에 열리는 국무회의를 월요일인 14일로 앞당긴 것도 15일 장관들의 해외 출장과 국회 일정 등이 겹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엄 직전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해 반드시 심의를 거쳐야 할 국무회의를 열 생각이 없었다.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정족수 11명을 채우는 시늉을 했지만 정상적 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계엄을 강행해 국무회의를 무력화했다. 국무회의를 무시했던 윤 전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가 국정 기능이 자칫 마비될 수도 있는 작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낳았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대선 날 당선됐다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국민의 뜻(people’s will)이 오직 대통령에게만 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9일 3시간여의 인터뷰에서 우리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던진 화두는 이 물음이었다. 그는 “선거로 국민의 뜻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설사 99%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 99% 내부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의견 차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자신만이 온전히 국민의 뜻을 체화했다며 독점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대통령 개인의 의지가 혼재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상대 당을 배격하는 것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계기로 드러난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 민주주의 위기를 연구해온 권 교수는 지난달 아시아 정치학자 중 처음으로 세계정치학회(IPSA)가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칼 도이치’ 상 수상자로 선정됐다.》―선거에서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아 승자가 되는 것 아닌가.“국민의 뜻은 선거 날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답하는 유권자마다 다 다르다. 다수 득표로 당선됐다고 해도 그 대통령만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독점하고 다른 진영의 의견은 다 틀린 것이라 배제하면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선거로 당선됐던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가 스스로 ‘차베스, 너는 더 이상 차베스가 아니다. 너는 국민’이라고 말했던 걸 떠올려 보라.”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건가.“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군사쿠데타나 전복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뜻은 원래부터 명확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이 경쟁적 논쟁을 통해 함께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자신만이 국민의 뜻을 알고 체현하고 있다고 믿으면 국민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뜻을 앞세워 사법부를 장악하고 비상대권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에 더해 세계에서 정치적 양극화 문제까지 가장 심각한 나라들이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한국과 미국의 정당은 정서적으로, 이념적으로 양극화돼 있다. 선거 이후 국민의 뜻을 독점하지 않으려면 대통령과 야당이 토론하고 서로 설득하며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원성을 전제로 한 대화를 우리 정치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 파괴적 양극화가 사법부부터 시민사회까지 모두 ‘정치화’하고 분열시키고 있다.” ―우리 정치의 양극화가 왜 심각해졌다고 보나.“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정권이 서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보라’며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보복의 정치가 이어져 왔다. 양당이 공유하는 가치가 거의 사라졌다. 오로지 다수 득표로 상대를 이기려는, 힘에 기댄 싸움만이 남았다. 선거를 보복의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유권자들의 성향도 정치처럼 양극화돼 있나.“그렇진 않다.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 분포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여전히 중도층이 불룩한 단봉형이다. 좌우 양극단이 늘어나고 있지만 쌍봉형은 아니다. 유권자 지형에 비해 정치가 지나치게 극단화돼 있다. 우리 사회가 둘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건 양당 극단 지지층의 목소리가 과다 대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심해도 되나.“아니다. 지금의 정치적 양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시민사회도 더욱 양분될 것이고, 그렇게 중간층이 없어지는 양극단의 쌍봉형으로 유권자 지형이 변하면 민주주의에 정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지금 정치인들이 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여기서 물꼬를 돌려야 한다.” ―어떻게 돌려야 하나.“파괴적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부서지는 걸 막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정당 간 건전한 논쟁과 경쟁의 ‘정치화(politicization)’가 필요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탈정치화(depoliticization)’가 필요하다. 즉, 경쟁 당사자인 정당 간에 공유하는 중립적 규범과 가치를 두텁게 하고, 이를 건드리지 말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런 신뢰의 버퍼존(완충지대)을 만들어 상호 믿음을 쌓아야 한다. 동네 축구로 비유해 보자. 무조건 승리하기 위해 양팀이 암묵적으로 공유해온 룰을 깨지 않는 것이 탈정치화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사례로 설명한다면….“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당시 헌법에 대법관 숫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임명하는 대법관 수를 늘려 대법원을 자기편으로 바꾸려 시도했다. 미국 정치가 지켜야 할 관례, 규범을 깨려 했다. 바로 이런 행태가 정당 간 건전한 경쟁의 토대를 갉아먹는 원인이다. 트럼프 시대에 이런 토대가 무너지면서 파괴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임명도 그런 사례인가.“전례 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신뢰를 깼다는 점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권한대행은 대통령이 아니고 현재는 권력 교체기다. 이런 시기엔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지 않는 게 관례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선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나. “축구도 룰을 자꾸 깨면 심판이 필요하듯 두 번째 방안으로 정치가 법을 어기면 사법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사법 의존은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사법이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돼야 한다. 세 번째 방안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 사회는 진영에 따라 ‘너의 팩트는 나의 팩트와 다르다’며 갈라졌다.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가 당파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팩트부터 지향하는 가치까지 우리 사회가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중립지대의 범위를 넓히는 탈정치화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강제해야 한다.” 권 교수는 이 대목에서 “내가 민주주의자라 해도 나만이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파괴하고, 결국 나만 남으면 그것이 바로 독재라는 점을 우리 정치권이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 방안으로 개헌을 거론한다.“개헌엔 찬성한다. 그러나 개헌만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현재 개헌 논의는 놓치는 게 많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됐다고 평가되는 1940∼1960년대 미국과 정치 양극화가 심각한 현재 미국의 차이가 헌법이 달라 일어난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놓치고 있나.“대통령제가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심플 리액션’이다. 무엇을 하기 위한 민주주의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국가 공동체의 의사를 모아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는 행정부 수반의 조정능력(coordination capability)이 취약한 민주주의는 무능한 민주주의다. 헌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그런 무능한 민주주의는 의미가 없다.” 권 교수는 대표적 사례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했다. 일본은 중대선거구제로 정치 파벌이 난립했고, 그 결과 집권당 당수인 총리의 리더십이 극도로 약화됐다. 권 교수는 “일본은 이를 해결하려 총리의 정책입안 능력과 조정 능력을 강화하는 ‘대통령화(presidentialization)’를 했다”고 말했다. ―일본만의 사례는 아닌지….“그렇지 않다. 유럽도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통령화’의 경향을 보인다. 나라마다 대처해야 할 문제가 복잡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정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이런 능력이 없는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 결과 이를 극단적으로 해결하려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출현한다. 트럼프 현상 역시 수십 년간 시민들의 불만과 요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 무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엔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개헌을 한다면 유능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약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젠다 세팅, 국정 조정 권한은 강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5년 단임은 짧다. 4년이나 5년 중임을 통해 저출산, 지방소멸, 부동산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구조개혁을 추진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또 국회와 행정부 간 교착을 막기 위해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켜야 한다. 집권당의 정책 안정성을 위해 부통령제도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막을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절대 오해하지 말라. 모든 권한을 강화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려 사법기관을 동원하는 것 등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검찰, 감사원 등은 대통령 권한에 두면 안 된다. 국회나 중립적인 기구로 옮겨야 한다. 자기 입맛대로 검찰총장을 교체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제어해야 한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사면을 막기 위해 사면권을 제한해야 한다.” 권 교수의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터뷰를 망설였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모든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쏠려 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나온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민주주의가 회복될까. 한발 멈춰서서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지 본질적 문제를 성찰해야 위기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59)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비교정치, 정치이론, 정치경제학이다. 저서로는 ‘개방과 조정’(2024년), ‘경쟁을 통한 변화’(2021년) 등이 있다. 권 교수가 7월 수상하는 ‘칼 도이치’ 상은 세계적인 정치학자 칼 도이치 전 하버드대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유명 정치학자인 후안 린츠 예일대 명예교수,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명예교수 등이 수상했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 이틀 전 이른바 사설정보지(지라시)에 필자 이름이 등장했다. 그 자체도 놀랐지만 내용은 더 황당했다. 필자가 지인들에게 몇 대 몇으로 탄핵이 인용된다는 문자를 보내며 “선동 중”이라는 것이었다. 전혀 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사실이 맞느냐는 주변의 연락을 받고 보니 허위정보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탄핵 정국에서 이런 음해성 허위정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헌법재판관들일 것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4개월간 온·오프라인에서 퍼진 허위정보들엔 노골적 인신공격까지 함부로 담겼다. 그로 인해 재판관들은 테러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심리를 진행해야 했다. 일부 재판관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피부 발진도 겪었다는데 허위정보와 이를 근거로 한 겁박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 근간 흔드는 허위정보 허위정보로 인한 피해 범위는 개인을 넘어선다. 누가 누구 편이라느니, 각본대로 짜고 친다느니 하는 재판관들에 대한 허위정보는 탄핵 찬반 주장에 입맛대로 악용됐다. 탄핵 정국에서 우후죽순 사방으로 퍼져 나간 허위정보는 가뜩이나 심각한 혐오와 분열을 더욱 부추기는 트리거가 됐다. 온라인에서 퍼나르고 극단 성향 유튜브에서 증폭된 허위정보에, 누군가는 음모론의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상대 진영을 저주했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급기야 허위정보는 음지에서 돌려 보고 유튜버가 떠들어 대는 차원을 넘어섰다. 국정 책임자라는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을 계엄 선포 이유로 내세웠다. 민의의 대변자라는 정당은 헌법재판관에 관련된 조작 사진이 사실인 양 논평을 냈다. 탄핵심판정에서 윤 전 대통령 변호인이 뱉어낸 ‘중국인들의 부정선거 자백’ 주장은 헛웃음을 짓게 했다. 이처럼 허위정보는 중상모략의 흑색선전을 넘어 우리 민주주의 근간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곳곳을 파고들었다. 실제 스웨덴의 한 연구소는 허위정보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을 최근 내놓았다.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보다 한 단계 아래 국가로 평가하며 독재가 진행 중인 국가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독재가 진행 중인 국가의 정부는 의도적으로 양극화를 조장하려 허위정보를 이용한다고 했다. 허위정보가 혐오를 부추기고, 혐오가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는 연쇄 작용을 우리는 목격했다.양극단의 정치 깨야 근본 해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허위정보로 몸집을 키운 정치 양극화는 이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무엇이 진짜이고 허위인지 구별할 힘을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팩트가 아니라 진영 논리에 기대 허위정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한 연구가 있다. 지난해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진행한 여론조사를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분석해 보니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이 높을수록 진보 진영이 주장했을 법한 허위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적대감이 강할수록 보수 진영이 주장했을 법한 허위정보를 진실로 수용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상대 진영의 주장은 다 “가짜뉴스”가 된다. 정치 양극화의 토양이 된 허위정보가 이제 정치 양극화의 결과가 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짜뉴스 척결”을 주장하더니 정작 자신은 허위정보를 믿으며 반대 진영에 대한 적대를 부추긴 윤 전 대통령의 정치 실종이 남긴 불행한 유산이다. 허위정보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수준으론 근본 해결이 어렵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퇴행을 사법 절차로 바로잡았다.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양극단 정치를 청산할 과제가 아직 남았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국내에서 전투기 오폭 사고는 드물다. 실전용 폭탄을 잘못 떨어뜨린 적은 아예 없었다. 2004년 F-5B 전투기가 충남 보령시 한 주차장에 폭탄을 잘못 투하해 차량이 훼손됐지만 폭발하지 않는 연습용 폭탄이었다. 이듬해엔 F-16 전투기가 전북 농가 비닐하우스에 연습탄 2발을 떨어뜨렸는데 인명 피해는 없었다. 6일 발생한 KF-16 전투기 오폭 사고가 충격을 주는 건 실전용 폭탄이 8발이나, 그것도 주민 700여 명이 사는 경기 포천시 한 마을을 덮쳤기 때문이다. ▷폭탄이 떨어진 시각은 오전 10시 4분이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느닷없이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건 전시(戰時)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주민들이 혼비백산하며 “전쟁 난 줄 알았다”고 울먹였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마을 곳곳에 폭발 굉음이 들리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들이 느꼈을 공포는 형언하기 힘들 것이다. 한 여성은 어찌나 놀랐는지 남편에게 “여보, 어떻게 해…” 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 “우리 집이 날아갔어”라고 힘겹게 전하는 통화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민가에 떨어진 MK-82 폭탄은 교량과 건물을 파괴하기 위한 대량 투하용으로 쓰인다. 폭발 때 직경 8m, 깊이 2.4m 구덩이를 만드는 건 물론 살상 반경이 축구장 1개 면적에 달한다. 낙탄 위치가 달랐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폭탄은 유도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전투기에 표적 좌표를 정확히 입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좌표 숫자 1개라도 틀리면 몇 km씩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출격에 앞서 바로 그 좌표 15개 숫자 중 위도 숫자 1개를 잘못 입력한 탓에 훈련장에서 8km 떨어진 민가가 오폭당했다는 게 군의 설명이다. 조종사는 좌표를 잘못 입력한 뒤 전투기 탑승 직후 지상에서 한 번, 공중에서 투하 직전까지 두 번 더 표적을 검증해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지만 세 번 기회 모두 지나쳤다. 그런데 애초 조종사만 좌표를 확인한다고 한다. 이번에도 혼자 타는 KF-16 조종사 본인 외에 아무도 좌표를 검증하지 않았다. 한 치 오차도 없어야 할 살상무기를 다루는 매뉴얼이 이리 허술하리라 예상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군 수뇌부는 사고 30분이 지나도록 오폭 사실조차 몰랐다. 김명수 합참의장에게는 사고 36분 뒤,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인 김선호 차관에게는 39분 뒤에야 보고됐다. 원래 폭탄을 투하했어야 할 포천 훈련장에선 사고 뒤에도 다른 훈련이 계속됐고 훈련을 참관한 김 의장과 한미연합군사령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장병들과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합참이 사고를 파악한 시점 자체가 오폭 20분 뒤였다. 사고 1분 만에 구조에 착수한 소방 당국보다 19분 늦었다. 전쟁 때도 이렇게 한심하게 대처할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