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이건희의 두려움 “반도체, 중국에 잡히면 다신 회복 못해”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17일 23시 21분


반도체 위해 ‘솥단지도 내다판다’는 中
낸드플래시는 한국 턱밑까지 추격
삼성 파업은 中에 날개 달아주는 격
노조 ‘1등 오만’ 버리고 ‘위기’ 직시해야

천광암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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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방한하면 꼭 삼성의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합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저에게 반도체의 핵심기술인 디자인, 즉 회로선폭에 대해 묻습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은 매출 등 일반적인 내용을 묻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달라요. 반도체 기술의 핵심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인터뷰는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이 반도체에 관심을 가질수록 저는 더욱 초조해집니다.… 수십조 원을 투자해 여기까지 온 반도체산업이 중국에 발목을 잡히면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어요.”

잡과매철(砸鍋賣鐵). 1995년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강조하며 인용한 사자성어다. 가난한 집이 밥 짓는 솥을 내다팔아 장사 밑천을 장만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와 결연한 의지로 반도체를 키우라는 뜻이다.

실제로 장 주석 발언 직후부터 중국은 최초의 국가적 대규모 반도체 프로젝트인 ‘909 공정’을 시작하는 등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해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섰고, 그 흐름은 후진타오 시대를 거쳐 시진핑 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고 있다.

‘잡과매철’의 결의(決意)로부터 30여 년, 중국 반도체 산업은 눈이 부실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메모리 산업의 양대 축 중 하나인 ‘낸드플래시 메모리’다. D램 중 하나인 HBM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 간에는 3년 정도의 기술 격차가 있지만, 낸드플래시는 그 격차가 1년 이내로 좁혀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반적으로 낸드플래시는 얼마나 단을 높이 쌓느냐가 핵심경쟁력이다. 그런데 중국의 YMTC는 한국 기업(300단 안팎)에 거의 육박하는 270단까지 이미 쫓아왔고, 400단 이상으로 단수를 높이는 데 필요한 기술까지 개발해 놓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머지않아 한중 간의 기술 수준이 역전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메모리가 아닌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급속히 커지고 있다. 중국의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도 지난해 4분기 기준 6%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해 2위인 삼성전자를 바짝 뒤쫓고 있다.

행여라도 미국의 규제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어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완전한 오산(誤算)이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을 겨냥해 내린 ‘대륙봉쇄령’ 이래로 수많은 경제 제재가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한 역사는 거의 없다. 대륙봉쇄령만 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영국 경제에 타격을 줬지만 길게 보면 기술혁신을 통해 난관을 돌파하는 쪽으로 경제 주체들을 이끌어, 진행 중이던 영국의 산업혁명과 신시장 개척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망가진 쪽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규제도 결국은 대륙봉쇄령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규제가 시행되기 전만 해도 중국 빅테크들은 시장에 나와 있는 질 좋고 저렴한 외산 제품을 사다 쓰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절박함이 덜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기술 자립과 제품 국산화에 사활을 걸고 있고, 중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SMIC, CXMT, 캠브리콘 등 중국의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린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중국을 최대 시장으로 두고 있는 한국 반도체산업으로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선두주자인 삼성전자가 성과급 갈등과 파업으로 ‘자충수’를 둔다면, 중국 반도체 업체들로서는 한 번 더 날개를 다는 셈이다. 지금까지 삼성이 수많은 고난과 도전을 극복하고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해 온 비결은 끊임없는 ‘위기의식’이다. 하지만 개인 성과급을 위해 회사에 최대 100조 원에 이르는 피해를 안길 수 있는 파업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삼성전자 노조를 보면 위기의식의 상실을 넘고, ‘안주(安住)’를 넘어 ‘오만’의 경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오랜 기업 흥망사에서 변함 없는 철칙은 오만 앞에 무너지지 않는 1등은 없다는 것이다. GM이 그랬고, 노키아가 그랬으며, 인텔이 그랬다.

삼성전자 노조는 이제라도 “중국에 발목을 잡히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이건희 회장의 두려움과 경고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턱밑에서 칼을 갈고 있는 중국 ‘추격자’들의 존재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

#중국#반도체#삼성전자#파운드리#기술격차#미국규제#반도체굴기#성과급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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